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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 1966), 영화가 증언한 식민지의 기억

by napigonae 2025. 5. 5.

영화 밖 스크린 너머의 현실

   영화 '알제리 전투'는 감정 표현이나 서사를 앞세우지 않고, 사건이 전개되는 흐름과 그 배경에 집중해 만든 작품이다. 극적인 음악이 사용되었고, 전체적인 형식은 다큐멘터리를 닮았지만, 인물의 감정이나 내면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대신 시위 장면, 폭력의 발생, 군대의 진압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 영화는 알제리 전쟁을 직접 다룬다는 점에서 하나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영화를 해석하거나 감상평을 쓰는 데 있지 않다. 영화는 하나의 창일 뿐이고, 그 창 너머에 있는 사회와 시대를 들여다보는 데 초점이 있다. 프랑스가 어떤 방식으로 식민지를 지배해왔는지, 그에 저항했던 FLN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MNA가 어떤 경로를 걸었는지, 알제리를 포함한 여러 식민지들이 어떻게 독립을 향해 나아갔는지, 독립 이후에 남겨진 정치의 풍경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 글이 다루려는 것은 영화 화면 밖에 있는 현실이다. '알제리 전투'는 시작점이고,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식민 지배와 탈식민 이후의 실제 삶이다. 항상 그렇지만 영화 이야기는 없다.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되짚어 보자.


코드 인디제, 네이티브 코드, 원주민 법

   코드 인디제(Code de l'Indigénat)는 프랑스 제국이 자국의 식민지에서 원주민을 법적, 정치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마련한 복합적 행정체계였다. 이 체계는 명문화된 하나의 법전이라기보다는, 수많은 법령, 명령, 행정관례가 누적되어 구축된 억압적 제도였다. 1881년 알제리에서 처음 본격 시행된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코친차이나, 안남, 통킹), 서아프리카, 적도아프리카, 뉴칼레도니아, 마다가스카르, 캄보디아, 폴리네시아, 소말릴란드, 카메룬, 토고 등지로 확산되며 광범위한 식민 통치 도구로 기능했다. 코드 인디제의 핵심은 식민지 원주민을 프랑스 본토의 시민(citoyen français)과 법적 지위에서 철저히 분리하고, 피지배자(sujet français)로 규정하는 이중 법적 분류였다. 이 용어는 행정 구분이 아니라, 근대 프랑스 공화주의가 내세운 보편주의와 인권의 이상을 식민지 현실에서 선택적으로 적용한 결과물이다. 프랑스 시민(citoyen français)은 프랑스 민법(Code civil), 형법(Code pénal), 선거권, 표현의 자유, 재산권 등 일련의 시민권과 정치 참여권을 보장받았다. 반면, 피지배자인 sujet français는 프랑스 국적은 부여되지만 시민권은 배제되었으며, 본국법 대신 관습법, 종교법, 행정명령에 따라 제한된 삶을 강요받았다.

코드 인디제 적용국가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c/Empire_colonial_fran%C3%A7ais_%281920%29.png/960px-Empire_colonial_fran%C3%A7ais_%281920%29.png


   알제리에서 이 이중법체계는 특히 분명하게 나타났다. 1865년 제정된 세나튀스 콩술트(sénatus-consulte)는 알제리 원주민을 프랑스 국적자로 인정하면서도, 프랑스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슬람 신앙을 포기하고 프랑스 민법을 수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부과했다. 이는 법적 동일성을 명목상 허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원주민을 문화적 동화 또는 시민권 포기로 내몰았다. 1930년까지 알제리 원주민 중 프랑스 시민이 된 인구는 2,000명을 넘지 않았으며, 이는 전체 인구 대비 극소수에 불과했다. 코드 인디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행정적 통제를 통한 일상적 억압이었다. 원주민은 자유로운 이동이 금지되었고, 거주 이전, 도시 출입, 직업 선택은 모두 지방 행정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원주민이 거주한 지역은 혼합 지방 자치(commune mixte)로 설정되어 프랑스 군정관의 직접적인 행정 감독을 받았으며, 이 체계 안에서는 자치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1881년 제정된 본격적 코드 인디제 법령은 최대 41가지의 특별 행정 위반 항목을 설정하여 원주민에게 차등 처벌을 가했다. 이 위반 항목에는 무단 집회, 세금 미납, 명령 불복종, 공무원에 대한 폭언, 행정관 앞에서의 무례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중 상당수는 본국의 프랑스 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조항들이었다.

   처벌 방식은 벌금, 징역, 강제노역, 재산 몰수, 즉결 처형까지 포함되었다. 벌금은 최대 25프랑까지 부과되었으나 1914년 이후 15프랑으로 조정되었고, 징역은 초기에 최대 15일이었으나 이후 5일로 단축되었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법령보다 훨씬 자의적이었다. 지방 군정관은 원주민에게 법정 절차 없이 즉결 처벌을 내릴 수 있었고, 이에 대한 항소는 불가능했다. 1890년 알제리 오랑 지역에서는 한 원주민이 프랑스 정착민과 충돌한 사건에서 증거 부족에도 불구하고 2년의 강제노역을 선고받았고, 정착민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는 코드 인디제가 ‘법’이라기보다는 ‘질서 유지’라는 목적 아래 작동한 사실상의 명령체계였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영향 역시 심각했다. 1873년 제정된 바르니에 법(Loi Warnier)은 원주민 공동체의 전통적 토지 소유 제도를 해체하고, 프랑스식 개인 사유 재산제로 전환하도록 강제했다. 이 법은 원주민의 토지를 시장에 내놓게 만들었고, 그 결과 프랑스 정착민(colon)들이 광범위하게 토지를 매입했다. 1900년까지 알제리 동부 콘스탕틴 지역에서는 원주민 토지의 60% 이상이 정착민에게 넘어갔다. 토지를 상실한 원주민들은 소작농, 광산노동자, 하급 행정 보조인력으로 전락했다. 이들의 임금은 프랑스인보다 평균 50% 이상 낮았으며, 노동 조건은 극도로 열악했다.

   교육의 영역에서도 차별은 명확했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보통교육 확대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식민지에서는 원주민을 위한 교육 투자가 극히 제한되었다. 알제리에서 프랑스어 교육을 받은 원주민은 5% 미만이었고, 대다수는 전통 종교 교육기관인 메데르사(medersa)나 모스크에 의존했다. 문맹률은 1930년 기준 90%를 상회했다. 이는 원주민을 행정의 복종 대상이자 비판 능력을 갖추지 못한 집단으로 유지하려는 식민 정책의 결과였다.

   사법 체계 역시 이중화되어 있었다. 프랑스 시민은 본국과 동일한 사법 절차를 보장받았지만, 원주민은 특별재판소(tribunal répressif indigène)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소는 프랑스 군정관이 직접 주재했으며, 피고는 변호사 선임도, 항소도 허용되지 않았다. 판결은 종종 사전 수사나 증거 확보 없이 내려졌고, 공개 처형이나 채찍형, 장기 노역 같은 방식으로 집행되었다. 이 사법 체계는 본질적으로 법이 아닌 통치 도구였다.

   지역별 적용 차이도 존재했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외부 속령’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프랑스 본토와 통합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실제 적용은 가장 가혹했다. 반면 모로코, 튀니지와 같은 보호령(protectorat)에서는 명목상 현지 통치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코드 인디제가 완전한 형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보호령에서도 식민 권력은 행정, 군사, 경제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고, 원주민은 정치 참여와 권리 획득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코드 인디제는 법적 제도일 뿐 아니라 정치적 도구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원주민 병력을 징집하면서도 이들에게 시민권은 부여하지 않았다. 참전의 대가로 최소한의 권리 회복을 요구한 목소리는 무시되었고, 전후에도 근본적인 체계 변화는 없었다. 1920년대 알제리, 세네갈, 인도차이나에서는 원주민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연대하여 북아프리카의 별(Étoile Nord-Africaine)과 같은 조직을 결성하고, 코드 인디제 폐지와 독립을 요구했다. 이 운동은 시민권 요구를 넘어, 프랑스 제국 체계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로 이어졌다.

   코드 인디제의 위반 항목 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1874년 알제리에서는 27개 항목이었고, 1881년에는 41개로 증가했으며, 1888년에는 21개, 1914년에는 8개로 줄었다. 1928년 이후 알제리에서는 24개에서 12개로 축소되었지만, 이는 제도의 약화가 아니라 항목 정비에 가까웠다. 프랑스령 카메룬에서는 1935년 한 해에만 32,858건의 행정 위반이 징역형으로 처리되었고, 이는 동일 기간 일반 형법에 따른 형사 범죄 3,512건보다 9배 이상 많았다.

   코드 인디제는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 제정과 함께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실질적 작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았다. 특히 알제리에서는 1954년 독립 전쟁이 발발한 이후까지도 과거 코드 인디제 체계의 법적·행정적 잔재가 존속했다. 식민지 행정관, 경찰, 군대, 사법부는 여전히 원주민에 대한 이중 잣대를 유지했고, 시민권은 정치적 도구로 거래되었다.

   코드 인디제의 장기적 유산은 단지 행정적 불평등에 머물지 않는다. 이 제도는 탈식민화 이후에도 법적 권리, 경제 기반, 교육 격차, 정치 대표성에서 구조적인 불균형을 남겼다. 프랑스 식민지가 독립한 이후에도 토지 소유권, 사법 체계 접근성, 고등 교육 진입률, 도시 자원 분배 등에서 본국과 식민 출신 인구 간의 격차는 해소되지 않았다. 과거 코드 인디제가 개인을 시민(citoyen français)이 아닌 피지배자(sujet français)로 간주했던 위계는 법적 폐지 이후에도 사회적 현실 속에서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다.

   코드 인디제는 식민지 법령이 아니라, 근대 시민 개념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인간의 권리와 시민권이 언제, 누구에게, 어떤 조건에서 적용되는지를 둘로 나눈 이 제도는 프랑스 공화주의가 자국 내에서는 인권을 내세우면서도 식민지에서는 그 권리를 제한한 이중성의 전형적 사례다. 이는 시민권(citoyenneté)이라는 개념이 보편적 인간이 아닌, 특정한 조건을 충족한 인간에게만 허용되는 선택적 제도였음을 입증한다.


프랑스 동기화, 동화주의 정책(politique d'assimilation)

   프랑스 식민 제국의 통치 전략에서 동기화(assimilation)는 문화 전파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핵심 이념 중 하나였다. 이 개념은 프랑스 혁명 이후 형성된 보편주의(universalisme)와 인간의 평등이라는 명분을 식민지에도 확장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출발했다. 프랑스 공화주의는 프랑스어, 프랑스 법, 프랑스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은 누구든 프랑스 시민(citoyen français)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전제는 실질적인 평등이 아니라 선택적 흡수를 위한 조건부 제도였다.

   동기화는 공식적으로는 인종이나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시민권을 부여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운영은 극도로 제한적이고 차별적이었다. 프랑스는 원주민에게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것, 프랑스 민법(Code civil)을 따를 것, 프랑스 교육 제도를 이수할 것, 경우에 따라 이슬람이나 토착 종교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알제리에서는 프랑스 민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동기화의 핵심 기준이었고, 이는 전통적인 관습법 체계나 이슬람 법과의 근본적 충돌을 초래했다. 동기화는 곧 자기 정체성의 부정과 동일한 것이었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Afrique occidentale française)의 '사네갈 4개 도시(Quatre Communes)' 출신 엘리트에게는 제한적으로 시민권이 부여되었고, 동기화된 원주민 출신 인물이 프랑스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로, 대다수 식민지 원주민은 시민권을 신청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프랑스 당국은 동기화를 이상적 모델로 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문턱을 거의 넘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교육은 동기화 전략의 핵심 도구였다. 프랑스 식민 당국은 일부 소수 엘리트에게 프랑스어와 프랑스 역사, 프랑스 법을 가르쳤다. 이들은 제국의 충성스러운 관리나 통역사, 군 장교, 법률가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원주민에게는 초등 교육조차 제공되지 않았고, 고등 교육의 기회는 사실상 차단되었다. 이는 식민 행정이 지식과 비판 능력을 억제하고, 단순 복종을 유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기화는 실질적 평등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소수에게만 허용된 제도적 보상 체계였다.

   동기화의 실패는 20세기 초중반에 더욱 명확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이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이들에게는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은 총을 들고 전쟁에 나선 원주민 앞에서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를 위해 싸웠지만 프랑스로부터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동기화는 이념으로는 유지되었으나, 제도적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

   문화적 차원에서 동기화는 원주민의 언어, 종교, 생활 양식을 배제하고 프랑스 모델을 강제하려는 시도로 작동했다. 식민지 학교에서 아랍어, 베르베르어, 울루프어 같은 토착 언어는 배제되었고, 공공장소에서의 사용도 금지되었다. 공문서, 법정, 학교에서 프랑스어만 허용되었으며, 이는 식민지인의 언어적 단절을 유도했다. 종교적으로도 이슬람은 '문명화 이전'의 상징으로 취급되어 국가의 적대적 통제를 받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은 동기화의 주요 기준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법적으로 동기화는 이중 시민권 체계를 전제로 했다. 프랑스 민법을 수용하고 프랑스 관습에 따르겠다는 서약을 하면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것이 동기화의 공식적 틀이었다. 하지만 민법 수용은 곧 다처제를 포기하고, 가족법에서 이슬람법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 조항은 문화적 항복을 강제하는 요소였으며, 현실적으로 수용이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프랑스는 이 조건을 통해 동기화 신청을 사실상 차단하면서도, 제국의 보편주의 명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명목상 누구나 프랑스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극소수만이 그 문턱을 넘도록 허용되었다. 이로써 원주민은 항상 문 밖에 서 있는 존재로 남았고, 프랑스 시민권은 늘 미완의 목표로만 존재했다. 이 시스템은 원주민에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통제를 더욱 정교화하는 방식이었다. 동기화의 유산은 오늘날 프랑스와 전 식민지 국가들의 관계 속에도 남아 있다. 프랑스는 여전히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와 교육, 외교, 군사 협력을 지속하고 있고, 일부 엘리트는 프랑스 교육을 받아 프랑스 시스템 내에서 활동한다. 이 연결 고리는 과거의 동기화 정책의 연장선이며, 그 정치적 잔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 본토 내 이민자 통합 정책 역시 식민기 동기화의 연속처럼 작동하고 있으며, 이는 문화적 동화 실패에 대한 반복된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동기화는 식민 지배가 영토 통제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프랑스 제국은 단지 식민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을 변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 변형은 선택된 조건 하에서만 허용되었고, 결과적으로 제국 내부에 고의적인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귀결되었다. 프랑스 식민주의는 동기화를 통해 지배를 정당화했지만, 그 정당성은 현실에서는 반복적으로 배제와 모순으로 드러났다.

   동기화는 표면적으로는 시민권 부여와 평등의 이상을 내세웠지만, 식민지 전역에서 실제로는 선택적 차별의 도구로 기능했다. 알제리에서는 '시민'이 되기 위해 요구된 조건들이 이슬람 신앙 포기, 프랑스 민법 수용, 가족법 개정 등 사실상 정체성의 해체를 의미했다. 이는 법적 절차를 넘어, 프랑스 식민 권력이 원주민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시민권을 취득한 원주민들은 본토 프랑스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고, 투표권, 공직 진출, 법원 이용, 토지 취득에서도 반복적으로 차별당했다.

   사네갈의 다카르, 생루이 같은 ‘사네갈 4개 도시(Quatre Communes)’는 동기화 실험의 대표 사례로 자주 인용되지만, 실상 이 지역에서도 시민권자는 전체 인구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프랑스는 해당 지역 엘리트를 통해 동기화의 성공을 선전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프랑스 하원에 진출한 식민지 출신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이들도 본토의 정치 권력에 실질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동등하다는 명분 하에 존재했지만, 현실에서는 외부 인물로 간주되었고, 식민지 대표의 발언권은 제한되었다.

   문화 영역에서도 동기화는 충돌을 낳았다. 프랑스 교육을 받은 식민지 엘리트는 프랑스 문학, 철학, 법률을 습득했지만, 이들은 식민지 사회에서 이질적 존재로 간주되었고, 본토 프랑스 사회에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중 소외는 ‘동기화된 자’가 처한 전형적 상황이었다. 알제리 출신 작가 알베르 멤미(Albert Memmi)는 이 상태를 '식민지인의 모순된 정체성'이라 지칭하며, 프랑스를 내면화한 식민지 엘리트가 조국에서도, 제국에서도 온전한 주체로 인식되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동기화는 문화적 충성심을 요구하면서도, 그 충성의 결과를 보상하지 않았다.

   종교적 차원에서는 이슬람법과 프랑스 민법 사이의 갈등이 특히 심각했다. 프랑스는 민법 수용을 시민권 취득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면서도, 이는 사실상 다수 원주민에게 ‘시민권 포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결혼, 상속, 이혼 등 일상생활의 기본 법리가 프랑스 민법과 충돌할 때, 선택은 거의 언제나 프랑스 법에 유리하게 강요되었다. 이에 따라 동기화를 신청한 가정 내부에서도 법적 분열이 발생했으며, 가족 내부의 권력 재편이라는 사회적 파열을 초래했다.

   프랑스는 식민지 관료 조직 내에서 소수의 동기화된 원주민을 기용했지만, 이들의 승진은 제도적으로 막혀 있었다. 지방 행정관, 고등 판사, 고급 군 장교 같은 직위는 거의 예외 없이 본토 출신 프랑스인이 독점했고, 동기화된 원주민은 하급 행정이나 군보조 인력에 머물렀다. 본국에서 파견된 관료들은 동기화된 원주민조차 ‘진정한 프랑스인’으로 보지 않았으며, 공공 업무에서도 차별적인 지시와 감시를 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로부터 수십만 명의 병력을 징집했다. 이들은 프랑스 본토를 방어하는 전선에 배치되었고, 다수는 전사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은 제도적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는 일부 참전자의 시민권 요청을 수용하는 듯했으나,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군 복무를 마친 원주민이 귀환 후 본국 법원에 청원했을 때조차, 법원은 관할권이 없다는 이유로 판단을 회피했다. 동기화가 프랑스 제국주의의 선전 도구로 기능했다는 점은 이 시기의 대응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교육 체계 안에서도 동기화는 분열을 심화시켰다.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보편 교육’을 내세웠지만, 식민지에서 운영된 학교는 프랑스 본토의 교육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교과서, 교사, 교육 언어, 수업 시간, 평가 기준까지 대부분 하향 조정되었고, 이는 동기화된 원주민이 본토의 시민 사회에 진입할 준비 자체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기제였다. 교육은 동일한 시스템을 약속했지만, 같은 수준으로 제공되지 않았다. 그 결과 프랑스어를 구사하더라도 식민지 출신은 본국 대학 입시에서 탈락하거나, 본토 교사 자격을 취득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다.

   동기화의 모순은 1945년 스팍 법(Loi Lamine Guèye) 이후 더 선명해졌다. 이 법은 식민지 원주민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명시했지만, 실제 법령과 시행령에는 광범위한 예외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 참여, 재산권, 직업 자격 등에서 이전과 동일한 제약이 남아 있었고, 알제리의 원주민은 여전히 별도 행정 단위로 분류되었다. 이중 시민권 체계는 법적으로 폐지된 듯 보였지만, 행정상으로는 계속 유지되었고, 이는 동기화가 제국의 ‘명분’으로 기능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동기화는 정책이라기보다 의도된 불평등을 포장하는 언어적 장치에 가까웠다. 프랑스는 보편주의와 문명화를 내세우며 제국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제국의 문 앞에 선 사람에게는 동일한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다. 시민이 되기 위해 요구된 조건은 사회적 현실을 무시했고, 수용된 소수는 제도 내에서 고립되었으며, 대다수는 그 진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알제리 학살 https://www.middleeastmonitor.com/20170508-remembering-the-massacre-of-45000-algerians/

귀화정책, 조건부 시민권(citoyenneté conditionnelle)

   프랑스는 'naturalisation(귀화)'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귀화를 승인한 뒤에도 시민권을 다시 빼앗거나 없던 일로 만든 사례가 있었다. 이런 일은 주로 그 사람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거나, 귀화한 뒤에 정해진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여겨졌을 때 일어났다. 프랑스 국적법은 시민권을 박탈할 수 있는 이유를 법으로 정해 놓았고, 프랑스 제국이 끝나갈 무렵이나 식민지에서 독립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이 법을 이용해서 식민지 출신 사람들의 시민권을 제한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이런 시민권 박탈은 주로 내무부나 법무부의 결정으로 이루어졌고, 공공 질서를 해쳤는지 또는 국가 안보를 위협했는지가 주요 판단 기준이었다. 1950년대 알제리에서는 귀화를 통해 프랑스 시민이 된 사람들 중 일부가 FLN이나 그와 비슷한 단체에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들이 프랑스에 충성해야 하는 의무를 어겼다고 판단했고, 이 때문에 공식적인 시민권 박탈 명령이 내려졌다. 이 결정은 프랑스 본토의 법원이 아닌 행정 명령으로 처리되었고, 재판 절차 없이 끝났다. 시민권이 박탈되면, 그 사람은 다시 피지배인으로 분류되었고, 항소할 수 있는 방법도 거의 없었다.

 

   알제리가 독립한 이후에도 프랑스는 이미 시민권을 얻은 귀화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행정적인 검토를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1940~1950년대에 귀화한 알제리 출신 사람들 중 일부는 시민권을 신청할 때 허위로 작성한 서류나, 정치적인 성향이 문제가 되어 귀화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많은 귀화자들의 기록이 한꺼번에 검토되었고, 그 중 일부는 시민권을 유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민권이 취소되었다. 이 과정은 프랑스 본토의 행정기관 내부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졌고, 공개적으로 심의되는 일은 없었다. 프랑스 국적법에 따르면, 시민권 박탈은 원래 귀화 후 10년 이내에 범죄나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했다. 하지만 식민지 지역에서는 이 규정이 훨씬 넓게 적용되었다. 귀화자가 정치 활동을 하거나, 종교 지도자로서 활동하거나, 신문에 글을 쓰거나, 노동 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프랑스 당국은 그것을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선의의 위반’으로 해석했다. 이런 식의 해석은 프랑스가 귀화를 조건이 붙은 권리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귀화를 통해 시민권을 얻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출생 시민과 거의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자격,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주어진다. 또, 귀화자는 프랑스 헌법과 법률에 따라 세금을 낼 의무, 병역 대상자의 경우 군 복무의무, 그리고 프랑스 사회의 규칙과 가치에 따라 살아갈 시민적 의무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권리와 의무는 이론적으로는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실제로는 귀화자와 원래 프랑스 시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식민지 출신 귀화자의 경우, 프랑스 본토 사회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귀화자들을 ‘진짜 프랑스인’으로 여기지 않고, 출신 배경이나 피부색, 종교 등을 이유로 차별하거나 배제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귀화자는 시민권을 얻었어도 실제로는 사회 안에서 주변인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취업 시장에서 귀화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거나, 공공 서비스에서 무시당하는 일이 있었다. 또, 언론이나 정치 담론에서 귀화자들을 범죄, 실업, 사회 불안의 원인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는 사회적 편견을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무슬림 귀화자나 북아프리카(예: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출신 귀화자에 대해서는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스티팁 학살(Sétif Massacre, 1945)

   여러 학살이 있지만 대표적 사건 하나만 정리해보자. 1945년 5월 8일, 알제리 동부 도시 스티팁(Sétif)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다. 알제리 내 민족주의 단체는 집회를 계기로 독립 요구 구호를 내걸었고, 일부 참가자가 프랑스 정착민과 충돌하면서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계 민간인이 사망했고, 프랑스 당국은 이를 폭동으로 간주하고 군을 동원하여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프랑스군과 경찰, 정착민 민병대는 스티팁뿐 아니라 겔마(Guelma), 스크나(Kherrata) 일대에서 민간인 검거와 무장 진압을 시작했다. 공습과 대규모 체포가 병행되었으며, 구금된 알제리인은 현장에서 총살되거나 고문을 받았다. 정착민 민병대는 군과 협력하여 주변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보복 공격을 가했다.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공식 문서와 증언 간에 차이가 크다. 프랑스 공식 발표는 약 1,000명 이하의 사망자를 보고했으나, 알제리 측 자료와 일부 역사학자들은 6,000명에서 최대 40,000명까지 피해 규모를 추산한다. 국제 사료 분석에서는 10,000명 안팎을 추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프랑스군은 수 주간 해당 지역에서 검거 작전을 지속했고, 프랑스 해군도 해안 도시에서 포격을 가했다. 사건 이후 수백 명이 군사재판을 거쳤고, 일부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건은 알제리 독립운동 세력에게 식민 통치의 한계를 확인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이후 민족해방전선(FLN) 결성에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는 해당 사건에 대해 오랫동안 공식 조사나 책임 인정을 하지 않았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일부 정부 관계자가 유감을 표명했다. 이 사건은 독립 전쟁 이전 알제리 내 최대 규모의 민간인 희생 사례로 기록되었다(Horne, 1977).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벌인 학살

사건명 연도 장소 가해 주체 피해 대상 사망자 수 추정
스티팁,겔마 학살 1945 스티팁, 겔마
스크나
프랑스군, 경찰
민병대
알제리인 민간인 6,000~40,000명
필립빌 보복 학살 1955 필립빌
스킥다
프랑스군 알제리인 주민 1,200~12,000명
파리 10월 학살 1961 파리 파리 경찰 프랑스 내 알제리인 40~200명
농촌 고문센터,
실종
1957–
1961
알제리 전역 프랑스군 FLN 협력 의심자 수천 명 이상
오랑 집단 처형 1957–
1958
알제리 남부 프랑스군 정치 혐의자 수백 명 추정

 

알제리 태어난 백인, 피에 누아르

   피에 누아르(pieds-noirs)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럽계 백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들은 대개 19세기 중반 이후 알제리로 이주한 프랑스 본토인뿐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출신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 지배를 정착시키기 위해 유럽계 인구의 알제리 이주를 장려했고, 이로 인해 이들은 알제리 사회 안에서 인구상 소수였지만 제도적으로는 우위를 점한 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 시민(citoyen français)의 지위를 가졌고, 프랑스 공교육을 받고 프랑스어를 사용했으며, 법적으로는 본국 프랑스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알제리라는 지정학적,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은 프랑스 본토 사회로부터 '식민지 태생'이라는 문화적 거리감을 끊임없이 부여받았다.

 

   피에 누아르 집단은 식민지 내부에서 원주민(indigènes)과는 철저히 분리된 계층을 구성했다. 이들은 알제리 도시의 중심가를 차지했고, 토지 소유권, 상업권, 고등 교육 접근성 등에서 원주민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프랑스 민법(Code civil)의 보호를 받으며 정당한 사법 절차와 재산권을 보장받았고, 지방 자치나 행정기관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알제리 원주민은 피지배자(sujet français)로 분류되어 동일한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피에 누아르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령 알제리를 본국의 일부로 간주했고, 알제리를 통치 대상이 아닌 '자신들의 고향'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고위 관료나 군 엘리트들과의 관계에서는 미묘한 위계가 존재했다. 억양, 생활 방식, 학력,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피에 누아르를 본국 엘리트 사회의 ‘하위 시민’처럼 규정하는 데 일조했다. 이들은 식민지 안에서는 상층이었지만, 제국의 전체 위계에서는 중간층에 머물렀다.

 

   정치적 성향으로 볼 때, 피에 누아르 집단은 단일하지 않았다. 대다수는 프랑스 공화국에 충성했고, 알제리를 프랑스 영토로 완전 통합하길 원했다. 이들은 독립 요구를 '내전'이나 '분리주의 반란'으로 간주했고, 프랑스 국회나 식민지 행정부를 통해 원주민의 정치 세력화를 지속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모두가 동일한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 피에 누아르는 프랑스 행정의 부패나 무능에 회의를 품고, 원주민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또 극히 일부는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거나, 프랑스 공화국의 위선에 대한 내부 비판을 가했다. 이 같은 소수 입장은 1930년대 좌파 세력이나 사회주의자 네트워크와 연결되었고, 피에 누아르 내부에서도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독립 전쟁 시기에는 극우 민병대 조직인 OAS(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에 적극 가담한 피에 누아르도 있었고, 반대로 민간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본국 정부와 협상하려 한 이들도 존재했다.

카뮈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2/04/09/facing-history

 

   알베르 까뮈(Albert Camus)는 피에 누아르 출신 지식인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알제리의 극빈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공교육 시스템을 통해 철학과 문학을 접한 후 파리에서 활동했다. 까뮈는 공화주의와 휴머니즘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녔지만, 알제리 독립 전쟁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프랑스와 알제리 원주민 사이의 공존을 지지했지만, 알제리의 완전한 독립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제국주의 옹호로 비춰졌고, 알제리 독립 세력에게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까뮈는 피에 누아르로서 알제리를 사랑했고, 프랑스 시민으로서 프랑스를 신뢰했지만, 그 이중 충성은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수용되지 않았다. 그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부조리(absurde)라는 개념은 이 같은 정치적 고립과 정체성의 균열을 문학적 언어로 전환한 결과였다. 그는 피에 누아르 집단이 처한 모순적 현실, 즉 제도적으로는 시민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경계인이라는 지위를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한 인물이었다.

 

   까뮈 외에도 여러 피에 누아르 지식인, 법률가, 종교인들이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입장을 보였다. 어떤 이는 원주민의 시민권 확대를 주장했고, 어떤 이는 민병대 활동에 가담했다. 피에 누아르는 하나의 정치적 집단이 아니라, 제국 내부 질서가 허용한 유일한 ‘식민지 내 시민층’으로 작동하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해명할 기회를 갖지 못한 집단이었다. 프랑스 시민이라는 법적 지위는 그들에게 제국 내 특권을 안겨줬지만, 제국이 해체될 때 그 법적 지위는 정치적 추방으로 전환되었다. 이 점에서 피에 누아르는 식민 지배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해체기의 희생자였다.

 

프랑스 식민지 차별정책과 피해

지역 시행 시기 제도 명칭 차별 적용 내용 프랑스측 피해 통계 당사국측 피해 추정 반식민 운동 사례 기타 특이 사항
알제리 1881–
1946
코드 인디제 이동 제한, 강제노역, 세금 차등, 토지 몰수 1,020명 15,000–
45,000명
Étoile Nord-Africaine, FLN
독립 전쟁 발발의 기점
세네갈 1887–
1946
코드 인디제 선거권 제한, 세금,
형사처벌 차등
수십 명 체포 수십 명
부상
Blaise Diagne 정치 운동
Quatre Communes 제도 적용
마다가스카르 1901–
1946
코드 인디제 토지 몰수, 언론 제한,
강제 징집
약 550명 사망  89,000명 MDRM 운동
독립운동 탄압으로 유혈사태
베트남 1897–
1946
Indigénat 및 보호령 제도 언론·출판 제한,
징용, 차등교육
관리·경찰 수십 명 사망 수백 명
처형·징역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
호치민의 정치 경력 시작
모로코 1912–
1956
보호령 제도 사법 이중체계,
행정권 제한
수천 명 수만 명 압델크림
무장 저항
스페인과 공동 점령 지역 존재
튀니지 1881–
1956
보호령 제도 행정 장악, 프랑스인 우선 토지 할당  수십 명 수백 명
체포
Neo-Destour 당 활동
형식적 베이(Bey) 체제 유지
코트디부아르 1904–
1946
코드 인디제 강제노동, 세금,
군사징용
부상 수 명 수십 명
사망
Félix Houphouët-Boigny 운동
농산물 수탈
중심지
레위니옹 19c–
1946
코드 인디제 계급별 행정 분리, 토지 독점 불분명 수십 명
부상
자치 요구 시위
1946년 해외
영토로 전환
토고 1923–
1946
위임통치
코드 인디제
이중 행정, 강제노동, 세금 불분명 수백 명
강제 노동
Sylvanus Olympio 활동
국제연맹 위임통치 지역
카메룬 1924–
1946
코드 인디제 강제작업, 언론 규제, 선거권 제한 1930년대 수백 명 구금 수천 건 행정범죄 처벌 UPC 정당 활동
유엔 신탁통치
기니 1904–
1946
코드 인디제 토지 몰수, 행정 차별, 교육 억제 수 명 수천 명 Ahmed Sékou Touré 운동
1958년 최초
독립 결정
부르키나파소 1904–
1946
코드 인디제 강제징용, 고문, 토지몰수 불분명 수백 건
이상의 민원
지방 민중 봉기
Volta 지역 분리 후 재통합
차드 1910–
1946
코드 인디제 노동 강제, 종교 차별, 병력 징발 징집 기록만 존재 수천 명
전선 전사
사막 부족 반란
프랑스 적도아프리카 소속
마르티니크 19c–
1946
크레올 차별
행정법 적용
인종차별, 토지 집중, 교육 배제 노동쟁의 수 건 기록 수백 건
시위 탄압
Aimé Césaire 자치운동
1946년 해외
영토 전환
과들루프 19c–
1946
크레올 차별
농장제
노동 착취, 계층 구분, 경찰 탄압 노동자 시위 경찰 부상 수십 명
부상, 체포
노동조합 운동
1946년 이후
행정동등화
프랑스령 기아나 19c–1946 식민지 형벌
차별 행정
강제노역, 정치범 수용, 이민 차별 형벌 집행 수만 명 수천 명
사망
탈출자 연대, 국제 항의
형벌 식민지로 악명

 

모로코의 특별한 1956년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와의 보호 조약에 따라 프랑스령 보호령(protectorat français)으로 편입되었다. 이 보호령 체제는 알제리나 세네갈과 같은 프랑스 직할 식민지와 달리, 모로코의 술탄을 형식상 국가 원수로 유지하고, 프랑스가 외교, 군사, 행정 전반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이중 권력 구조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본국에서 제정된 행정법령이나 식민 통치 규정, 예컨대 코드 인디제 같은 제도가 자동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모로코 원주민은 프랑스 제국 내의 피지배자(sujet français)로 분류되지 않았고, 따로 ‘모로코 피지배자(sujet marocain)’로 취급되었다. 이는 법적으로 프랑스 식민 통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외양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군과 행정관의 권한 아래 놓인 상태였다.

 

   1946년 프랑스가 제국 전체의 코드 인디제를 공식 폐지했을 때도, 이 조치는 모로코에 직접 적용되지 않았다. 프랑스 당국은 모로코의 보호령 지위를 이유로 행정 개혁을 지연했고, 차별적인 처벌과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행정령, 군사령, 지역적 규칙을 지속적으로 운용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공식적으로는 인디제 제도를 폐지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보호령 내에서는 실질적으로 유사한 통치 장치를 운용할 수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술탄의 권위를 활용해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술탄은 실질적 통치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으며, 원주민의 정치 권리는 광범위하게 제한되었다. 상황은 프랑스에게 법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여지를 제공하면서, 정치적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모로코 내 반식민 세력은 이런 형식주의적 위선을 비판했고, 이는 1950년대 이후 민족주의 운동의 고조로 이어졌다. 코드 인디제의 폐지가 모로코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이유는, 프랑스가 의도적으로 보호령이라는 외형을 유지하며 제국의 차별적 통치 기조를 연장했기 때문이다.

FLN, CRUA, MNA의 관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FLN)은 1954년 창설된 조직이지만 그 준비 단계는 그해 초 혁명통일행동위원회(Comité Révolutionnaire d’Unité et d’Action, CRUA)에서 시작됐다. CRUA는 기존 민족주의 세력이 독립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출발했으며, 새로운 무장 봉기 계획을 중심으로 결집한 소규모 정치·군사 연합체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FLN을 출범시켰고, CRUA는 곧 해산됐다. FLN은 정치와 군사조직이라는 이중 성격을 지녔고, 초창기부터 독립 이후 국가 체제까지 포함하는 정치 구상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일당 체제에 가까운 권력 집중 방식을 선호했고, 기존 다당제 흐름과는 분리되었다. 지도부는 알제리 각지에서 온 청년 정치인과 군 출신 인물로 구성되었고, 프랑스령 내 식민지 관료 출신도 일부 포함됐다. 조직은 프랑스 내 이민자 사회,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권, 유럽 내 좌파 세력과 외교 접촉을 시도하며 자신들의 정치 정당성을 확보해나갔다.

 

   FLN은 자신들이 알제리 민족 전체의 대표임을 주장하며 독립운동 내 모든 세력을 통합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경쟁 세력을 배제하고 정치적 독점 구도를 지향했다. 가장 뚜렷한 사례가 알제리 국민운동(Mouvement National Algérien, MNA)과의 갈등이다. MNA는 메스알리 하즈(Messali Hadj)를 중심으로 프랑스 내 이민자 노동자 조직에서 출발한 정치세력으로, 1940년대부터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MNA는 제도 정치와 국제 외교를 중시했고, 무장 투쟁보다는 정치적 협상력을 강조했다. 알제리 본토보다 프랑스 내 조직력이 강했고, 독립 이후 국가 운영 구상에서도 다당제와 의회 중심 체제를 상정하고 있었다. FLN은 MNA를 과거 세력으로 규정하고 민족운동 내에서 인정하지 않았다. MNA가 갖고 있던 정치적 대표성은 FLN에게 위협이 되었고, 특히 유럽과 제3세계에서 외교적 승인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했다. FLN은 정치적으로 MNA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택했고, 알제리 본토뿐 아니라 프랑스 내 알제리인 사회에서도 조직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두 조직 간 충돌은 견해 차이를 넘어서 독립운동 내부에서 누가 정통성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투쟁이었다.

 

   MNA는 FLN의 단일 권력 전략에 반대 입장을 보였고, 독립 이후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형태를 상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전쟁 상황에서 조직 동원력의 열세로 이어졌고, 국제 무대에서도 FLN의 외교력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면서 MNA의 입지는 좁아졌다. 내부에서는 메스알리 하즈의 권위가 유지되었지만, 외부적으로는 FLN의 대체 세력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독립이 현실로 다가올수록 FLN은 자신들만이 협상 주체라고 주장했고, MNA는 정치적 주변 세력으로 밀려났다.

MNA의 활동

   MNA는 처음에는 정치 활동 중심의 조직이었지만, 1956년 이후 본격적으로 무력 투쟁에 나서면서 작전을 실행할 수 있는 조직 체계를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FLN과의 충돌이 심해지자, MNA는 자기 조직을 지키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무장 부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정치 세력 간 경쟁이 아니라 실제 무력 충돌로 상황이 변해갔다. 파리, 마르세유, 리옹 같은 알제리 출신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암살, 협박, 보복 폭력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주된 공격 대상은 FLN의 조직원들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던 일반 이민자나 MNA에 비협조적인 사람들도 피해를 입었다. 두 조직 사이의 싸움은 거리, 가정, 일터 같은 일상 공간으로까지 퍼졌고, 마치 이민자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민간인전쟁 같은 모습이 되었다.

 

   MNA의 무력 활동은 정면 충돌보다는 조용하고 빠르게 끝내는 타격, 보복, 내부 숙청에 가까웠다. 조직은 UDA라는 하위 조직의 자금과 연락망을 이용해 작전 인력을 여러 지역에 나눠 배치했고, 지역마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행동조를 따로 운영했다. 작전은 철저히 폐쇄적인 방식으로 이뤄졌고, 내부 배신이나 탈퇴를 막기 위해 감시 체계도 함께 운영했다. 공격은 공공장소에서 벌어지기도 했고, 야간 습격이나 가족을 이용한 심리적 압박도 작전 수단으로 사용됐다. 프랑스 경찰은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막기보다는 때로는 방치했고, 일부는 MNA 조직원들을 정보원으로 쓰기도 했다. MNA와 경찰 사이에 공식적인 협력은 없었지만, FLN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경찰이 MNA의 활동을 알고도 무시하거나 묵인한 사례가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알제리 본토에서는 FLN에 비해 MNA의 무장 활동이 약했지만, 무력 투쟁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병력 규모는 작았지만, 동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무기를 옮기고 선전물을 배포하거나 주민을 선동하는 시도를 했고, 프랑스군과 직접 충돌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장악하거나 장기간 버틸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활동은 지역마다 들쭉날쭉했고, 내부 정보가 새거나 조직원들이 떠나면서 작전이 중단되는 경우도 많았다. 무기력한 군사력 외에도 민간인과의 연결망 구축, 비밀 통신 운영, 보급로 확보에 힘을 썼지만 이런 부분도 FLN보다 뒤처졌다. 그 결과 알제리 안에서 MNA의 영향력은 점점 약해졌고, 작전 효과도 낮았다.

 

  메스알리 하즈를 중심으로 한 정치 지도부는 무력 사용을 일시적인 수단으로 보고 외교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중간 간부나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던 인물들 중 일부는 FLN과 맞서려면 군사력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더 공격적으로 작전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조직 내부의 입장 차이는 공식적인 분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작전 방식에 영향을 줬고 지휘 체계의 긴장도 커졌다. MNA는 무력 투쟁에 대한 외부의 정당한 인정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외교 무대에서 신뢰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 사회는 대부분 FLN을 알제리 민족의 대표로 보았고, MNA의 폭력 행위는 정치적 명분 없이 고립된 행동처럼 비춰졌다.

 

   무력 활동이 계속되면서 MNA의 작전 방향은 점점 수세적이고 제한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세력을 넓히고 주요 지역을 방어하려는 공격 중심의 전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을 지키고 내부를 통제하려는 숙청과 보복 중심의 활동으로 바뀌었다. 공격보다는 위협을 제거하는 데 더 집중하게 되었고, 이런 변화는 해당 지역에서 MNA가 갖고 있던 정치 기반을 점점 약하게 만들었다. 알제리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MNAFLN에 밀려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지만, 프랑스에 살던 이민자 사회 안에서 펼친 MNA의 무장 활동은 독립운동의 또 하나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FLN의 대두

FLN은 알제리 전역을 무대로 작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시골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산이나 숲처럼 프랑스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은신처를 만들고, 그 근처 마을을 차례로 통제했다. 마을마다 연락 담당을 두고, 병사에게 음식을 제공하게 하거나 정보를 전달하게 했다. 농촌에서는 교통이 느렸기 때문에 FLN이 먼저 움직일 수 있었고, 프랑스군보다 빠르게 다음 작전을 계획했다. 도시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대규모 전투 대신 폭탄 설치나 암살 같은 짧은 공격을 반복했다. 사람들이 모인 시장이나 버스 정류장을 노렸고, 경찰이나 행정 건물도 주요 목표였다. 사람들 사이에 긴장을 퍼뜨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시민들은 어디서 공격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고, 누가 FLN 조직원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FLN은 협조를 강요하거나, 적대적인 사람을 찾아내 처벌하기도 했다.

 

   FLN은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과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남자들에게 입대를 요구했고, 거부하면 가족을 압박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걷었고, 정해진 액수를 내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책임자를 정해 그 사람이 매달 인원과 돈을 제출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과 자원을 확보했다. 연락망도 체계적이었다. 지역별로 구역을 나눠 각각 책임자를 두었고, 서로 다른 지역끼리는 연결책이 따로 움직였다. 작전 내용은 종이에 쓰지 않고 구두로 전달했다. 체포된 사람이 있어도 전체 작전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도로를 피해서 산길이나 들판으로만 이동하기도 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어린아이를 이용해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해외에서도 활동을 벌였다. 주로 프랑스에 살고 있던 알제리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을 모았다. 이민자들에게 협조를 요구했고,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협박이나 공격이 가해졌다. 이렇게 모인 자금은 무기를 구입하거나, 병사들에게 월급을 주는 데 쓰였다. 무기 대부분은 밀수나 국경지대 거래를 통해 들여왔다. 군용 장비는 부족했지만, 소형 무기와 폭약은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FLN은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작전을 벌였다. 남부 사막 지역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소수 정예 병력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작전을 선호했다. 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를 통제하면서 장기적으로 거점을 만들었다. 마을 안에서 정치 교육을 하고, 협조하지 않는 주민은 따로 감시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야간에만 움직이고, 낮에는 흔적을 감추는 방식도 썼다. FLN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소문과 이야기, 선전물도 이용했다. 마을에 몰래 전단을 붙이거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프랑스군의 패배를 강조하거나, 협조자 명단을 퍼뜨리는 방식으로 주민들의 태도를 바꾸려 했다. 이런 활동은 싸움 없이도 마을 분위기를 바꾸는 데 효과가 있었다. 이처럼 FLN은 무기를 쓰는 전투뿐 아니라, 마을을 관리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도 동시에 진행했다.

 

FLN의 자국민 학살

사건명 연도 장소 가해 주체 피해 대상 사망자 수 추정
MNA 조직원 학살 1954–
1962
알제리 및 프랑스 본토 FLN MNA 조직원
가족
4,000명 이상
내부 숙청,
명령 불복종 처형
1956–
1962
ALN 부대 내 군사 기지 FLN/ALN 탈영자, 반명령자
이탈자
수백 명
비협조 마을 보복 학살 1956–
1961
카빌리, 오레스, 텔 지역 FLN 프랑스 협조 혐의
농촌 주민
수십-수백 명 단위
무장 충돌 지역
민간 피해 유발
1957–
1961
알제리 전역 충돌 지대 FLN 비무장 주민
불분명
1962년
정치 보복 학살
1962 알제, 오랑 등 도시 FLN 친프랑스 인사
경쟁 세력, 민간인
수백 명 이상

FLN의 숨은 악행

   FLN은 알제리 독립을 내세우며 프랑스 식민권력과 싸운 조직이었지만, 실제 활동에서는 알제리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폭력도 자주 저질렀다. 1957, 멜루샤(Melouza)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마을은 MNA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FLN은 이를 이유로 마을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조직원들은 마을의 남성 주민들을 광장으로 불러냈다. 처음에는 몇 명만 끌려가는 듯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줄줄이 불려 나왔다. FLN은 일부를 총으로 쐈고, 대부분은 도끼와 식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 사람을 한 명씩 죽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살인은 해가 지고도 계속되었다. 조직원들은 횃불을 들고 밤새 살인을 이어갔다.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피 냄새가 가득한 광장에서 비명을 들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피로 젖은 땅은 마을 한가운데까지 번졌고, 잘려 나간 몸과 피 흘리는 머리가 쌓이면서 땅이 아닌 시체 위를 밟고 다녀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시신들은 급히 묻히지도 못했다. 살아남은 여성들과 아이들은 끌려나와 구경당했고, 여성들은 옷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집 밖으로 내쫓겼다. 어린아이들은 죽은 부모의 옷을 부여잡고 울었고, 울음은 날이 밝을 때까지 끊기지 않았다. (Melouza Massacre, 1957)

 

   FLN은 처음에는 이 사건을 부인했다. 외부 언론이 대량 학살을 보도하자 사실과 다르다고 했지만, 조직 내부 보고서에는 멜루샤 사건을 민중 처벌로 기록해놓았다. 학살 후 마을 지도자가 교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을 버리고 흩어졌다. 이웃 마을로 도망친 생존자 중 한 노인은 후에 우리는 프랑스군에게 쫓겨 다녔지만, 결국 우리를 죽인 건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FLN은 멜루샤에서 끝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다른 농촌 마을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처형이 벌어졌다. 한밤중에 조직원들이 몰래 들어와 마을 대표와 젊은 남자 40여 명을 한 줄로 묶어 강가로 끌고 갔다. 강물 소리만 들리는 어둠 속에서 총성이 여러 번 울렸다. 다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 시신을 찾기 위해 가족들이 강가를 헤맸지만, 일부는 물에 떠내려가 찾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땅에 얼굴을 박고 울던 가족들 곁에는 총을 든 조직원이 계속 서 있었다. (Evans, 2012) FLN은 무장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람과 돈을 확보해야 했다. 자발적인 참여를 기다리지 않았고, 필요하면 위협과 폭력을 사용했다. 병력 모집을 거부한 마을에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청년들을 붙잡아 갔다. 마을 대표가 조직에 협조하지 않고 도망치자 그의 가족을 붙잡아 총을 겨누었다. 마을 전체가 침묵했다. 돈을 내지 않은 집의 이름은 마을 회관 벽에 적혔다. 하루 이틀 후 그 집은 불에 타 무너졌다. 조직은 이런 방식으로 공포를 퍼뜨렸고, 마을 주민들은 복종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협조자가 나타난 게 아니라, 공개된 살인과 폭행을 본 뒤에 복종이 만들어졌다. FLN은 이런 상황을 '정리 완료'로 내부 보고서에 남겼다.

 

   협조자를 찾아내는 기준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떤 마을에서는 프랑스군 순찰대에게 물 한 컵을 건넨 농부가 다음 날 손가락이 잘린 채 마을 입구에 던져졌다. 그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했다. 또 다른 마을에서는 선생이 라디오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업 중에 끌려 나와 학생들 앞에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맞았다. 수업을 듣던 아이들은 책상 밑으로 숨었고, FLN 조직원은 아이들을 보며 이 사람이 어느 편인지 기억해라고 말했다. 이후 이 학교 근처는 주민들에게 기피 장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교사가 살아있는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FLN은 처형을 빠르게 끝내지 않았다.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어떤 사람은 마을 한복판에서 무릎 꿇은 채 하루를 버텨야 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얼굴은 흙먼지를 뒤집어썼고, 눈은 마주칠 곳 없이 땅만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맨발로 들판을 걷게 한 뒤, 돌로 머리를 찍히며 죽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는 자식이 보는 앞에서 먼저 살해당했고, 아이는 울음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주저앉았다. 시신은 멀리 내다버리지도 않고, 마을 외곽의 구덩이에 던져졌다. 가족이 밤을 틈타 몰래 수습했지만, 무덤엔 이름조차 새기지 못했다. 묘비를 세우면 FLN이 다시 온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직은 마을마다 기준을 정했고, 그 기준을 넘지 못하면 정리 대상이 되었다. 병력을 일정 숫자만큼 내야 했고, 돈도 지정한 만큼 내야 했다. 기준은 문서로 남기지 않았고, 조직의 상층부에서 하부로 말로만 전달되었다. 구체적인 숫자도 없이 이 정도면 부족하다는 식의 지시가 내려왔고, 그때마다 마을은 새로운 숙청을 겪었다. FLN은 주민들의 말투나 눈빛, 회의 시간의 태도까지 감시했고, 그 정보는 바로 윗선에 전달되었다. 한 마을은 1년 사이에 FLN에게 여덟 번 불려 갔고, 그 과정에서 대표가 세 번 바뀌었다. 이후 주민들은 아예 대표를 뽑지 않기로 결정했다. 조직이 사람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왜 끌려갔는지조차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이름이 불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남겨진 가족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말을 많이 하면 위험해졌고, 침묵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되었다. 아이들은 말보다 얼굴을 먼저 보며 자랐다. 누구의 표정을 따라야 하는지 보고 배웠다. FLN이 싸운 적은 프랑스군만이 아니었다. 말이 느린 사람, 눈을 피하는 사람, 마을 회의에 늦은 사람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조직은 이름 없는 적을 만들었고, 그 적은 자주 이웃이었고, 때로는 가족이었다.

 

FLN과 MNA 비교

항목 FLN
MNA
창립 시기 1954년, CRUA기반으로 창설
1950년대 초
민족주의 운동 기반으로 성장
주요 인물 여러 지역 출신의 청년 혁명가들
메스알리 하즈 단일 지도체제
무장 투쟁 적극적
1956년 이후 본격화
규모와 영향력은 제한적
정치 목표 일당 중심 체제 지향
다당제 가능성
독립 이후 구상 독립 후 FLN 단독 권력 장악
정치적 타협과 공존 가능성 강조
내부 운영 방식 폐쇄적, 통제 중심
숙청,감시 체계 강조
정치 중심
무장 조직은 나중에 보완
외교 활동 제3세계와 유엔에서 적극 활동
대표성 확보 시도
국제적으로 고립
외교적 정당성 부족
프랑스 내 활동 조직 확장
이민자 사회 내 지배력 확보
프랑스 이민 사회 기반
이후 점차 영향력 사라짐
경쟁 조직에 대한 태도 경쟁 세력은 반혁명 세력
제거 대상
FLN과의 공존 시도
무력 충돌에 휘말림
민간인 통제 방식 강제 징집, 자금 확보
협조 불응 시 폭력 사용
협조 요청 중심
일부 강제력 일부 사용

 

알제리 전쟁 그 이후

   알제리는 1962년 독립 이후 FLN 중심의 통치 체제를 수립했다. 초대 대통령은 벤 벨라(Ahmed Ben Bella)였으며, 그는 독립 전쟁 당시 FLN의 주요 지도자였다. 1965년 군사 지도자 부메디엔(Houari Boumédiène)이 쿠데타를 일으켜 벤 벨라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알제리는 오랜 기간 FLN 단일정당 체제를 유지했고, 정치적 반대 세력은 제도적으로 배제됐다. MNA는 독립 직후 정치권에서 완전히 제거됐으며, 내부 반대자들은 체포되거나 감시 대상이 됐다. 경제는 국유화를 기반으로 운영됐다. 석유, 가스, 광산, 철도, 항만 같은 주요 자산은 모두 국유화됐다. 프랑스계 주민이 떠나며 남긴 대규모 자산도 국유화되어 국가가 관리했다. 농업 부문에서는 토지 재분배 정책을 실시했으나, 생산성과 효율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산업화 정책은 국영기업 중심으로 추진됐고, 주요 투자 대상은 에너지 및 중공업 분야였다.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이 외화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익은 국가 재정에 집중됐다. 중소기업과 민간 산업은 상대적으로 위축됐고, 경제는 수출 원자재에 크게 의존하게 됐다.

벤 벨라 https://es.wikipedia.org/wiki/Ahmed_Ben_Bella

 

   사회 정책 면에서는 문맹 퇴치가 핵심 과제로 설정됐다. 프랑스어 중심의 식민지 교육을 폐기하고, 아랍어를 중심으로 한 교육 체제를 도입했다. 초등 교육부터 대학까지 교육 과정의 아랍화가 추진됐으며, 프랑스어 사용은 공식 문서에서 점차 배제됐다. 그러나 교사와 교육 자료의 부족으로 교육의 질은 지역 간 차이를 보였다. 고등 교육과 기술 교육도 확장됐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은 제한적이었다. 독립 이후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는 한동안 단절됐다. 전쟁 기간 프랑스군의 군사 작전과 민간인 피해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되었고, 프랑스는 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 양국은 외교 관계를 회복했지만, 과거사 문제는 반복적으로 갈등을 일으켰다. 알제리는 전쟁 중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정치적, 외교적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1990년대에는 선거를 통한 정치 개방 시도가 있었으나, 이슬람 운동 세력이 승리하자 군부가 선거를 무효화했다. 그 결과 전국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FLN 체제에 대한 신뢰는 크게 약화되었고, 국가의 통제력도 흔들렸다. 정부는 무장 세력에 강경 대응을 선택했고, 정치 개방은 중단됐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알제리 사회에 강한 통제와 보안 중심 정책이 유지되는 배경이 되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사회 곳곳에서 갈등 요소가 되었다. 알제리 내부에서는 전쟁 피해에 대한 공식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으며, 정부는 전쟁의 의미를 독립과 해방이라는 방향으로 강조한다. 이민자의 역사와 기억은 프랑스 내에서도 쟁점이다. 알제리계 이민자들은 사회적 차별, 경찰 감시, 문화적 갈등에 직면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이 프랑스 사회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알제리계 청년들 사이에서는 프랑스를 비판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이 2021년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의 행위를 ‘범죄’라고 언급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 정치권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일부 정치인은 과거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 양국 관계는 과거사 문제 외에도 이민, 비자 발급, 무역 불균형 같은 문제로 갈등이 계속된다. 알제리는 자국 청년들의 프랑스 비자 발급 제한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알제리 이민자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무역에서는 알제리의 원자재 수출과 프랑스의 제조품 수입이 비대칭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양국 사이의 외교 마찰은 과거사와 현재 문제가 결합되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는 알제리를 통치하면서 법과 제도를 앞세워 통제를 유지했다. 알제리 사람들은 서류상으로는 프랑스의 일부였지만,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특정한 문서가 없으면 투표를 할 수 없었고, 군 복무는 강제로 시켰지만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프랑스 본토에서 쓰이던 평등이라는 말은 알제리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알제리 사람들의 생활은 감시와 허가, 명령으로 이루어졌고, 저항할 수단은 거의 없었다. 유럽 출신 이민자들은 식민지 안에서도 더 나은 대우를 받았지만, 본국에서는 자신들이 완전한 프랑스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알제리 안에서도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함께 살았고, 사회 안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FLN과 MNA는 같은 시기에 독립을 목표로 활동했지만,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컸다. 한쪽은 다른 쪽을 방해자로 여겼고, 무장한 조직은 말로 풀지 않고 직접 공격했다. 알제리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총을 든 쪽은 프랑스군만이 아니었다. 민족주의자들끼리도 서로를 죽였고, 피를 흘린 사람들 중에는 아무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주민들도 있었다. 거리, 농장, 시장, 학교까지 안전한 곳은 없었다. 어린아이와 노인도 폭력의 현장을 피해가지 못했고, 어떤 마을은 지도자가 몇 번씩 바뀌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알제리는 독립한 나라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무너진 일상은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식민지였던 시절의 방식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남았다. 누가 힘을 가졌는지, 어디에 자원이 몰렸는지는 독립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새 정부는 강한 통제를 이어갔고, 어떤 지역은 제대로 된 도로나 학교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다시 목소리를 낼 기회를 찾았지만, 말하는 순간 지목당하는 일도 있었다. 싸움은 끝났지만 두려움은 남았고, 살아남은 사람들 안에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영화의 정치적 민감성으로 인해 5년 동안 상영이 금지되었다. 1971년에야 공식적으로 상영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상영관들은 극우 단체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2003년, 미국 국방부는 이라크 전쟁 초기의 도시 게릴라전에 대비하여 이 영화를 내부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다. 영화는 도시 내 반란 진압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영화는 알제리 독립 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이는 신생 국가의 정체성과 독립 투쟁의 정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한 문화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Algiers November 1, 1954'는 영화 '알제리 전투 '의 오프닝 곡으로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도 사용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SfLVSAqBbs&list=PLe5TmI8uWOSYVEUVmz-H2a2CErmpRQnC0&index=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