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머의 세계와 시대
영화 '미션'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 인간, 믿음, 폭력, 구원 같은 큰 주제를 담으려 한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고뇌와 선택, 과라니 공동체(Guaraníes)의 질서와 자존, 그리고 제국의 정치적 배신이 한 이야기로 얽히지만, 영화가 만들어내는 숭고한 분위기에는 결국 담아내지 못한 역사와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의 자리가 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 1750)은 단지 국경을 나눈 정치적 사건일 뿐이고, 과라니가 인간인가 하는 더 오래된 질문은 이미 200년 전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고민 없이, 과라니를 구원의 대상, 믿음의 수혜자로만 그리면서 그들만의 신념이나 문화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예수회는 폭력에 맞선 주체로 그려지지만, 그들 역시 과라니를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대하기보다는 가르쳐야 할 존재로 여겼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지 않았다.'미션'이라는 영화를 빌어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 브라질의 시대적 상황, 사회와 역사적 흐름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 마드리드 조약
마드리드 조약(Tratado de Madrid, 1750)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아메리카 식민지의 국경을 새롭게 정리한 협정이다. 외형은 외교 문서였지만, 실상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영토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 1494)은 대서양을 기준으로 동서로 영토를 나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효력은 약해졌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동부에서 내륙 깊숙이 들어가 금광을 개발하고 원주민을 노예로 삼았으며, 그 중심에는 반데이란치스가 있었다.
반데이란치스(bandeirantes)는 상파울루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민병대이자 노예사냥꾼, 그리고 금을 찾아 나선 탐사대였다. 이들은 국가의 공식 지시 없이 내륙으로 깊숙이 진출해 예수회 선교구와 원주민 공동체를 습격했고, 과라니를 포함한 수많은 원주민들을 사로잡아 브라질 각지에 노예로 팔았다.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이들이 지배한 지역은 지도상으로는 스페인 영토였지만, 실제로는 포르투갈의 점령지에 가까웠다. 마드리드 조약은 이러한 사실상의 지배를 법적으로 인정해 준 셈이다.
이 조약의 협상은 포르투갈 외무장관 알렉상드르 드 구즈망(Alexandre de Gusmão)이 주도했다. 그는 '점유한 땅이 곧 영토다'라는 실효 지배 원칙(uti possidetis)을 주장했고, 스페인 측의 마르케스 데 엔세나다(Marqués de la Ensenada)도 이를 수용했다. 조약은 1750년 1월 13일 포르투갈이 리스본에서 먼저 서명했고, 그해 10월 12일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이 이를 비준하면서 발효되었다. 그 결과, 브라질 내륙 대부분이 포르투갈 영토로 인정되었으며, 스페인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아프리카의 일부 식민지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 보상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격렬한 충돌은 파라과이와 브라질 사이 국경 근처에서 발생했다. 이 지역에는 예수회가 운영하던 일곱 개의 선교구가 있었고, 그 안에는 자치적이고 무장된 과라니 공동체가 거주하고 있었다. 조약에 따라 이 지역이 포르투갈령으로 넘어가자 과라니는 이주 명령을 거부했고,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 이 부분이 영화의 배경이 된다.
결국 이 조약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현지 주민들의 저항과 유럽 내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1761년 스페인 국왕은 조약을 파기했고, 영토 문제는 1777년 산 일데폰소 조약(Tratado de San Ildefonso)을 통해 다시 정리되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는 이미 원주민 공동체는 파괴된 뒤였고, 과라니 전쟁은 제국주의 외교가 어떻게 한 지역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로 남게 되었다.
반데이란치스란 누구였나
반데이란치스는 1600년대부터 1700년대 초까지 브라질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주로 상파울루에 살던 이들이었고, 혼혈이 많았다. 이들은 집단을 이루어 브라질 내륙으로 들어가 탐험하고, 금을 찾고, 원주민을 사냥해 노예로 팔았다. 나라의 공식 명령 없이 움직였지만, 실제로는 포르투갈 식민지의 확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데이라(bandeira)’는 포르투갈어로 깃발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탐험대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말이 그들 전체 집단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들은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 그 안에는 무장한 민병대, 노예를 잡는 사람들, 포르투갈인, 혼혈인, 때로는 이미 잡힌 원주민도 함께 있었다.
처음에는 금과 은을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브라질 동부에 살던 포르투갈계 사람들은 내륙 깊은 곳에 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움직였다. 하지만 탐험은 쉽지 않았다. 지도도 없고, 길도 없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을 통역이나 길잡이로 데리고 다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금을 찾기보다 사람을 잡아오는 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반데이란치스는 원주민 마을을 공격해 주민들을 사로잡았다. 붙잡힌 사람들은 강제로 상파울루나 다른 지역으로 끌려와 일을 해야 했다. 그들은 설탕 농장에서 일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하인처럼 쓰였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오기도 했지만, 내륙에서는 이렇게 직접 원주민을 잡아오는 일도 많았다.
말과 총으로 무장한 반데이란치스는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선교사들이 만든 원주민 마을도 자주 공격했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 포르투갈은 이들의 활동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이용해 새로운 땅을 찾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영토를 넓히는 데 활용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당시 남미의 땅을 나누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계가 확실히 정해지지는 않았다. 반데이란치스는 지도상으로는 스페인 땅인 지역까지 들어가 마을을 세우거나 광산을 개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포르투갈은 이런 지역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들은 당시 브라질 사회의 일부였고, 식민지를 확장하고 자원을 확보하며 원주민을 억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신들을 개척자라고 여겼지만, 오늘날에는 이들에 대한 평가가 나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브라질 영토를 넓힌 인물로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약탈자, 침략자, 가해자로 본다. 오늘날 브라질 곳곳에는 반데이란치스를 기념하는 동상이나 그들의 이름을 딴 지명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실제 행동을 다시 돌아보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특히 원주민과 관련된 인권 문제나 역사적 책임을 이야기할 때, 반데이란치스는 계속해서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Boxer, 1962; Fausto, 1999; Hemming, 1978; Metcalf, 2005; Monteiro, 1994).
콩키스타도르와 반데이란치스
항목 | 콩키스타도르 (Conquistador) |
반데이란치스 (Bandeir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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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제국 | 스페인 제국 | 포르투갈 제국 |
역할 성격 | 점령군 |
탐험, 점유(사실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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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구조 | 국왕이 파견한 공식 정복대 |
민간 주도의 사설 탐험대(사실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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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 제국 붕괴, 금·은 탈취, 기독교 전파 |
노예 사냥, 광물 탐사, 내륙 영토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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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지역 | 아즈텍·잉카 등 중남미 고대 제국 |
브라질 내륙, 남동부, 아마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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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 | 1500~1550년대 |
1600~17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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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방식 | 대규모 전투, 무력 점령 |
유입, 정착, 기습(사실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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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의 관계 | 국왕의 명령, 보상 체계 존재 |
초기에는 비공식, 후에 실질적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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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이미지 | 제국 건설의 상징, 동시에 약탈자 |
브라질 개척 영웅, 원주민 억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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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결정짓는 피부색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사람들의 삶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졌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조합에서 태어났는지가 이름이 됐고, 그 이름이 곧 신분이 됐다. 같은 땅에 살아도 누구는 법을 만들고, 누구는 법에 묶였다. 이름은 다르고, 권리는 나뉘고, 일은 따로 주어졌다.
백인은 땅을 가진 사람이었다. 포르투갈에서 왔거나, 백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농장을 운영했고, 행정과 종교를 장악했다. 백인들끼리 결혼했고, 그들의 아이도 백인이었다.
원주민은 정복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노예로 쓰였고, 나중에는 선교사들이 만든 마을로 옮겨졌다. 선교 마을에 들어간 사람은 외부와 단절됐다. 거기서 일하고, 기도하고, 죽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자유로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아프리카인은 잡혀온 사람이었다. 브라질로 끌려와 농장과 광산에서 일했다. 법적으로도 노예였고, 누구의 재산이었다. 어떤 사람은 해방됐지만, 해방돼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아프리카계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은 그대로였다.
메스티소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카보클루는 메스티소와 같은 조합이지만, 상파울루 근처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둘 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탐험대나 사냥대에 포함됐다. 땅을 잘 알고, 원주민 언어를 알고 있었다.
물라토는 백인과 아프리카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도시에서 장인이나 하인으로 일했다. 자유로운 경우도 있었지만,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같은 혼혈이어도 피부색이 어두우면 대우가 달라졌다.
카푸주는 원주민과 아프리카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름조차 남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노예로 살거나, 노예에 가까운 일을 했다. 법적으로 자유인이라도 현실은 달랐다.
크리우루는 아프리카인이지만 브라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브라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대우가 바뀌지는 않았다. 해방된 뒤에도 차별은 그대로였고, 맡을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18세기 브라질, 피부색에 따른 명칭
분류 | 조합 | 주요 활동 | 법적 지위 | 사회적 위치 | 기타 특징 |
백인 (Branco) |
유럽인 × 유럽인 | 행정, 성직 토지 소유 |
자유민 | 최상층 |
포르투갈 출신
식민지 태생 |
원주민 (Índio) |
토착민 | 농사 마을 노동 |
부분적 보호 | 하층 |
통제
강제 이주 |
흑인 (Negro) |
아프리카인 | 노예 노동 | 대부분 노예 | 최하층 |
지속적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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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티소 (Mestiço) |
백인 + 원주민 | 통역, 사냥, 탐험 | 자유민 | 중간층 |
반데이란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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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보클루 (Caboclo) |
백인 + 원주민 (지역 명칭) | 내륙 개척, 실무 | 자유민 | 중간층 |
반데이란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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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라토 (Mulato) |
백인 + 흑인 | 장인, 하인, 노동 | 자유인, 노예 | 하층 |
짙은 피부색은 더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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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주 (Cafuzo) |
원주민 + 흑인 | 농장, 잡역 | 자유인, 노예 | 최하층 |
흑인과 같이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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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우루 (Crioulo) |
아프리카계 식민지 출생자 | 노예, 자유노동 | 자유인, 노예 | 최하층 |
지속적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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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라니 전쟁
마드리드 조약 이후, 파라나 강과 우루과이 강 사이 미시오네스 동부 지역이 포르투갈령으로 넘어갔다. 그곳에는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세운 과라니족 선교 공동체 일곱 곳이 있었고, 이 마을들은 스페인 식민 정책에 따라 운영되는 레두크시온(reducción)이었다. 이 체제는 원주민을 정착시켜 공동 생산, 종교 교육, 기초 교육, 내부 자치, 방어 체계까지 갖춘 집단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과라니 선교구는 교회와 학교, 창고, 농지, 주거지 등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구성원들은 일정한 자율성과 공동의 책임 아래 생활했다.
이 지역이 포르투갈령으로 편입되면서, 과라니족은 스페인령으로 완전 이주하여 이전처럼 스페인 소속으로 남을 것인지, 거주지를 옮기지 않고 포르투갈령이 된 거주지에 그대로 남을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정착지를 유지한다는 것은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과라니족은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를 거부했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처음에 이주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입장이 갈렸지만, 점차 이주 거부 쪽으로 뜻이 모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저항을 택할지, 협상 여지를 남길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고, 일부 지도자는 무장 저항을 준비한 반면 일부는 타협을 모색하려 했다. 예수회는 이 상황을 마드리드와 로마에 보고하고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으나, 수개월에 걸친 교섭과 내부 지연 끝에 명확한 대응은 나오지 않았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조약 이행을 위해 지역을 비워줘야 했고, 포르투갈의 입에선 공백지나 무장 저항이 없는 원주민을 원했다. 과라니족의 이주 거부는 두 국가의 군사적 침략으로 이어지게 된다. 협상은 실효가 없었다. 과라니족은 일부 화승총과 화살, 자제 제작한 방어 시설을 이용해 마을을 방어했고, 선교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로써 1754년 과라니 전쟁(Guerra Guaranítica)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약 2년에 걸쳐 이어졌고, 처음에는 국지적인 충돌과 포위전이 반복되었다. 과라니족은 병력과 화력 면에서 열세였지만 공동체 단위의 결속력이 강했고, 마을 간의 연대도 존재했다. 결정적인 전투는 1756년 2월 10일, 카이바테(Caiboaté)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약 1,500명의 과라니 전사자가 발생했고, 저항의 중심이 무너졌다. 이후 생존자 다수는 포로로 잡히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전투가 끝난 후, 7개의 선교 마을은 점령되었고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마을 시설은 파괴되거나 방치되었고, 예수회는 지역에서 철수했다. 해당 지역은 포르투갈 식민 행정에 통합되었고, 과라니족은 다시 같은 형태의 공동체를 구성하지 못했다. 전투가 끝난 후, 7개의 선교 마을은 점령되었고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마을 시설은 파괴되거나 방치되었고, 예수회는 지역에서 철수했다. 해당 지역은 포르투갈 식민 행정에 통합되었고, 과라니족은 다시 같은 형태의 공동체를 구성하지 못했다(Ganson, 2003; Sarreal, 2014; Hemming, 1978; Britannica).
과라니족은 버려진 게 아니라 제거되었다?
스페인은 과라니 선교구를 영토 문제로 보지 않았다. 조약으로 넘겨준 건 영토가 아니라, 통제불능한 지역이었다. 과라니 공동체는 예수회가 주도했고, 내부 노동과 방어, 교육과 신앙이 결합된 독립 구조를 갖고 있었다. 총독의 명령도, 국왕의 칙령도 그곳에 직접 미치지 못했고, 예수회는 로마의 명령만 따랐다. 이건 제국 내부에서 작동하는 또 다른 통치 모델이었다. 스페인 왕정은 오랫동안 왕권신수설과 종교 통합 질서를 기반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유지해 왔다. 왕은 하늘의 권위를 지상에서 대리하는 존재였고, 교회는 왕정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제도였다. 그 위계에서 벗어나는 충성 구조는 용납되지 않았다.
18세기 초, 스페인은 왕위 계승전쟁(1701~1714)을 겪었다. 그 전후로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 아라곤 계열 지방은 합스부르크(Habsburgo) 가문을 지지하며 부르봉 펠리페 5세(Borbón Felipe V)에 반대했다. 이 지역들은 잠시나마 자체 의회, 세금 권한, 지역 법 체계를 복원하여 중앙정부에 저항했고, 왕정은 이를 실질적 위협으로 여겼다. 전쟁이 끝난 뒤 펠리페 5세는 ‘누에바 플란타 칙령(Nueva Planta, 1716)’을 선포했다. 이 칙령으로 아라곤계 지방의 자치법과 의회를 해산하였고, 카스티야의 언어, 행정, 법률 체계를 일방적으로 적용해 제국 전체를 하나의 중앙집권 구조로 재편했다. 왕권과 다른 질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여기서 제도화되었다.
과라니 공동체는 독립성은 스페인의 왕권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였고 PTSD를 일으켰다. 자체 언어와 종교, 내부 방어력, 외부 권위와의 직접 연결, 자급적 생산 체계까지. 왕이 통제하지 못하는 정치 질서가 국가의 주변에서 작동하고 있었고, 그 모델이 다른 지역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포르투갈은 먼저 예수회를 추방했고, 스페인도 내부에서 예수회 해산을 준비 중이었다. 스페인은 과라니를 버린 것이 아니라 지킬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미 스페인 왕정이 경험한 저항과 반역의 닮은 꼴 조직이 식민지에서 재현되고 있었고, 닮은 꼴 조직인 과라니는 제국 질서 전체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건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었다.
가브리엘과 필딩의 예수회
예수회(Societas Iesu)는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의 인가로 설립되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는 이 교단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선교 확대, 신앙 수호, 고등 교육 체계 확립을 실현하고자 했다. 예수회원은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교황에게 직접 순명하겠다는 서약을 맺으며, 가톨릭 내 어떤 수도회보다도 교황 중심성이 강한 구조를 가졌다. 국적이 어디든, 예수회원은 국가 권력보다 교황의 명령을 우선시했고, 명령 체계는 오직 로마에 귀속되었다.
예수회는 자신들이 활동하는 국가의 승인 아래 있었지만, 국가에 충성하지 않았고 국가 권력의 명령을 자동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인사, 행정, 재정, 파견, 학문 체계까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각국 통치자는 예수회를 허용해야 했지만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 조직의 명령체계는 기존 교회 조직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고, 유럽의 절대왕정 입장에서는 자국 내에 존재하는 외부 권력으로 받아들여졌다. 교황과 직접 연결된 수직적 복종 구조는 지역 통치자에게는 위협이 되었고, 종종 국왕의 뜻과 충돌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예수회는 각국 왕정 체제에서 반복적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보호를 받으면서도 그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깊은 불신을 받았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는 시간이 갈수록 불편함을 넘어서 정권 핵심부에 박힌 미운털로 굳어졌다.
예수회는 선교 영역에서도 교육, 과학, 문화 분야를 포괄하는 조직적 활동을 전개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학교를 세우고 원주민에게 라틴어, 수학, 철학, 논리학, 음악을 가르쳤으며, 자연 관찰과 천문학, 지도 제작에 이르기까지 유럽 학문을 이전하고 확산시켰다. 선교사는 현지 언어를 문법화하고 사전을 편찬했으며, 구전 전통과 민속 신앙을 문서로 남겨 원주민 문화의 일부를 구조화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신앙 전파와 학문 보급을 결합한 이 구조는 교육, 행정, 노동, 방어 기능을 함께 담고 있었고, 일정한 지역 단위에서 예수회는 정치, 경제, 종교를 통합한 실질적 운영 주체로 작동했다.
예수회는 식민지 내에서 상업적 이익, 세력 확장, 방어 조직 운영에 있어 제국의 행정 명령과 다른 속도로 움직였고,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정책 기조와 충돌했다. 어떤 경우에는 원주민의 이해를 우선시해 왕명 이행을 지연하거나 거부하기도 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자국 총독보다 선교사의 말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통제되지 않는 권위는 언제나 제거 대상으로 규정되기 마련이었다. 예수회가 국가적 미움의 대상이 된 것은 이념이나 신학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예수회에 대한 견제는 존재했다. 일부 주교는 예수회의 교육 권한, 선교 권한이 교구와 충돌한다고 보았고, 다른 수도회는 로마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는 예수회가 권력을 독점한다고 판단했다. 교황청 내부에도 예수회의 과도한 독립성이 교황권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교황 명령 외에 다른 권위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구조는, 결과적으로 교황 외에는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교단이 만들어졌다는 뜻이었고, 이는 교황청 내부 질서에서도 예수회가 예외 집단으로 작동했다는 의미다. 결국 예수회는 가톨릭 제도권 내부에서조차 제어할 수 없는 조직으로 인식되었고, 왕정과 교회 양측의 공통된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1759년 포르투갈은 예수회를 전면 추방하고 모든 재산과 교육 기관을 몰수했다. 프랑스와 스페인도 뒤를 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예수회원들은 수용소에 감금되거나 강제 송환되었다. 국가의 이익과 충성 구조에 반하는 교단은 국가적 일치의 방해물로 규정되었고, 각국 왕정은 교황청에 해산을 요청했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는 교서 Dominus ac Redemptor를 통해 예수회를 공식 해산했다. 이 조치는 신학적 판단이라기보다 정치적 안정을 위한 교황의 타협이었다. 예수회의 해산은 가톨릭 내부의 구조 개편이자, 초국가적 종교 권력이 근대 국가 질서 앞에서 꺾인 사건이었다 (Ganson, 2003; Sarreal, 2014; Hemming, 1978; Britannica).
피해자는 사라지고 용서만 바라기
영화 '미션'은 예수회 선교사들과 과라니족 공동체, 그리고 제국주의적 폭력이 충돌하는 과정을 그리며, 회심과 신앙, 정의와 권력, 인간과 신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깊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높이 평가된 부분과 동시에 비판받은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선 호평을 받은 부분은 회심과 속죄의 이야기, 신앙과 인간성의 대조,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음악과 영상미의 조화다. 멘도사의 회심은 이야기 초반부터 강한 감정 몰입을 이끌고, 그가 속죄를 위해 예수회에 들어가는 여정은 관객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가브리엘 신부의 비폭력과 필딩 신부의 무장 저항은 종교 안에서도 신념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며, 관객은 신앙의 윤리와 인간적인 도덕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그에 대해 침묵하는 교황청의 태도는 제도권의 폭력을 보여주며,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무엇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과 숲, 폭포, 공동체의 장면들이 어우러지며 이야기 이상의 설득력을 만들어낸다.
반면 비판받은 지점도 뚜렷하다. 멘도사의 회심은 감정적으로는 강렬하지만, 그 변화가 진심인지 의심될 정도로 내면 묘사가 깊지 않다. 그는 자신의 폭력 앞에 서 본 적이 없고, 그 피해자들과의 관계도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예수회가 왜 공격을 받았는지, 그 배경에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는지는 거의 설명되지 않아서,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교회 내부의 복잡한 논쟁은 생략되고, 군대는 악으로, 예수회는 선으로만 그려지는 구도는 단순하게 느껴진다. 인물들의 고뇌는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감정에 집중되어 있고, 현실보다는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은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멘도사의 회심은 극적으로 그려지지만, 정작 피해자와의 관계는 이야기에서 처음부터 빠져 있다. 가해자의 구원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면서, 그의 죄가 누구에게 향했는지, 그 피해자들이 지금 살아 있는지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죄 지은 본인만 용서받으면 피해자는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이 질문은 끝내 영화 안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영화 '미션'은 '밀양'이나 '데드 맨 워킹'과는 정반대에 선다. 두 영화는 죄의 무게, 피해자의 고통, 신에 대한 의문까지 함께 껴안지만, '미션'은 회심의 감동 속에서 그런 질문들을 지워버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눈물 흘리지만, 어떤 이는 감흥이 없을 수 있다. 그 반응의 차이는 결국 각자의 윤리적 감수성에서 비롯되며,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는 강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약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미션, 밀양, 데드 맨 워킹을 개인적으로 비교
항목 | 미션 | 밀양 | 데드 맨 워킹 |
가해자 중심 시선 | 멘도사의 회심이 중심 가해자의 구원이 서사 동력 ★★★★★ |
범인은 종교적 구원에만 몰입 ★★★ |
가해자는 주요 화자
회개의 주체 ★★★★★ |
피해자 존재감 | 피해자 직접 등장 없음 존재감 없음 ★ |
유족의 고통이 지속적으로 묘사 주제 전개에 핵심적 ★★★★★ |
피해자 가족들과의 대면이 주요 갈등. 감정과 입장 차이
★★★★★ |
죄의 구체적 묘사 | 과거의 죄는 간접 언급 속죄 중심의 서사 ★★ |
범죄 내용이 직접 묘사 죄의 무게가 강조됨 ★★★★★ |
범죄 행위가 명백
묘사가 직설적 ★★★★★ |
회심/구원 묘사의 깊이 | 감정적 회심 장면은 상징적 ★★★★ |
피해자는 외면당함 ★★★ |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회개
사죄를 향한 여정 ★★★★★ |
신의 역할 | 신은 구원의 중심 음악과 영상미로 강조됨 ★★★★ |
신의 부재 종교로 위로가 되지 않음 ★★ |
신은 회개와 고통 속에서 드러남
인간과 함께 고통받는 존재 ★★★★ |
도덕적 균형 | 가해자는 중심, 피해는 배경 구도 자체가 편향적 ★★ |
의도적 불편한 균형 신의 정의를 질문 ★★★★ |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통과 시선
도덕적 거리두기의 작용 ★★★★★ |
주제적 초점 | 회심과 구원 중심 제국주의 비판이 단순 ★★★ |
신의 부조리, 용서의 한계 피해자의 고통이 얽히며 복합적 ★★★★★ |
사형제, 인간 존엄
피해자 권리와 회복 ★★★★★ |
200년 동안 바뀐 게 없는 바야돌리드 논쟁
1550년 바야돌리드(Valladolid) 논쟁에서 유럽 사람들은 “신대륙 원주민도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다뤘다. 결론은 그들도 영혼을 가진 인간이며, 정복하거나 노예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선언으로만 남았다. 이후 20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가 대규모로 끌려왔고, 백인과 원주민, 흑인이 뒤섞이면서 사람들은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자연스럽게 계급처럼 나뉘었다. ‘메스티소(mestizo)’, ‘물라토(mulato)’ 같은 단어는 단순한 정체성 설명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운명을 가르는 이름표였다. 태어날 때 정해진 피부색이 그 사람의 자리를 결정했다.
교회는 이런 구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았다. 원주민을 ‘보호해야 할 존재’로 여기며 선교와 교육을 확대했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실천은 늘었지만, 관계는 바뀌지 않았다. 타이노족이 바야돌리드 논쟁을 유발했고, 200년이 지나 과라니족과 예수회가 사라졌다. 그 시간 동안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보는 눈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교회는 제국과 때때로 갈등했지만, 결국 같은 권력 질서 안에서 움직였다. 피부색은 여전히 운명을 결정짓는 기준이었고, 신의 이름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도구로 사용됐다.
영화 '미션'은 그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 한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안에서 과라니족은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묻지 않는다. 신부들이 그들을 위해 싸우고, 대신 죽지만, 과라니족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신념을 증명해 주는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감동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감동은 구조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바야돌리드 이후 200년,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한다는 말은 존재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션'은 그 오랜 시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은 시선을 담고 있다. 말은 바뀌었지만, 위치는 그대로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이 오보에 소리, 폭포를 오르던 멘도자의 땀내 나던 모습, 처절한 원주민의 혈투였다면 영화는 성공한 것이다. 가해자는 속죄한다는 마음과 행동으로 가해자의 모습을 감춰버렸고, 스페인과 포르투갈군대의 화약 내 진동하는 살육은 과라니족이 꼭 사라져야만 했던 이유를 묻어 버렸다. 가브리엘 신부와 필딩 신부의 서로 무늬가 다른 결단은 교황청을 향한 예수회의 반국가적 모습을 감싸주기에 충분했다. 영화 '미션'은 힘이 있다. 장면 하나하나가 또렷하고, 음악은 이야기를 넘어 기억에 남는다. 말하지 못한 자들의 침묵까지 화면 안에 담으려는 의지는 분명히 보인다. 그래서 비판 속에서도 이 영화는 오래 남는다. 그래서 아름다웠고, 오래 잊히지 않을 것이다.
‘Gabriel’s Oboe’는 손가락만 보고 작곡됐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오보에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손가락 움직임만 보고 'Gabriel’s Oboe'를 작곡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QyWc3hzudo
와우나(Waunana) 부족이 과라니족 역할을 했다. 실제 과라니족은 너무 서구화되어 있어서, 제작진은 콜롬비아의 와우나 부족을 대신 캐스팅했다.
선교지 재현을 위한 실내외 세트를 만들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접경지대에 있는 옛 예수회 유적지 ‘São Miguel das Missões’를 모델로 실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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