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빌미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자신을 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존재로 여겼고, 신대륙 발견을 단순한 항해 성공이 아닌, 성서적 서사 안에 배치하려 했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조차 그는 그곳을 인도라 확신했고, 이후에도 그 믿음을 꺾지 않았다. 이건 지도상 오류가 아니라 신학적 구조물 위에 놓인 확신이었다. 그의 항해는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과정이었고, 그 안에서 ‘실패’란 단어는 허용되지 않았다. 신의 도구는 의미 없는 땅에 닿을 수 없다고 그는 믿었다(West & Kling 1991).
그의 신앙은 내면에서 길어 올린 성찰이 아니라, 굳고 단단하되 유연하지 못한 철근 같은 신념이었다. 복음 전파는 그의 공식적 이유였지만, 그 땅의 사람들은 **형제가 아닌, 개종시켜야 할 ‘오랑캐’**로 읽혔다. 그는 그들을 구원할 대상이라기보다 쓸모를 계산할 대상으로 취급했다. 자신이 인도에 도착했다고 반복하며도 그들을 노동력으로만 다뤘다는 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론 그 이웃을 소모품처럼 쥐어짠 것과 다름없다(Las Casas 1552).
콜럼버스의 자기 확신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라, 구조로 짜인 믿음이었다. 그는 "신의 뜻을 따르는 자는 선하다"고 믿었고, 더 나아가 "내가 하는 일은 신의 뜻이다"라는 확신에 다다랐다. 그 사고는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했고, 폭력도 수탈도 선한 사명으로 재포장됐다. 하지만 그 포장은 복음을 감싼 사랑이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돋보이게 만든 택배 포장지에 가까웠다(Fernández-Armesto 1991).
이 모든 건 당대 유럽의 기독교 중심주의와 유럽 우월주의 틀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그 틀에 순응한 인물이 아니라, 그 예언의 무대 위에 스스로를 세운 자였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사라졌지만, 그는 에덴 동산을 찾아 항해에 나선 셈이었다. 성서의 파편, 세계 지도, 지구의 둘레마저 그의 확신을 설계하는 조각이 되었다(Martínez 2001).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종교인으로 불렸지만 그 신앙은 윤리라기보단, 자기 확신을 감싸는 기능적 언어로 작동했다. 인도에 닿았다고 하면서도 그 땅의 사람을 형제로 대하지 않았고, 구원을 말하면서 지배를 강행했다. 그는 신을 믿은 것이 아니라, ‘신이 나를 믿을 것’이라는 자기 확신을 믿었다.
콜럼버스 착각, 팽창, 모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처음 도달한 곳은 아시아가 아닌 오늘날의 바하마 제도였다. 그는 이 지역이 인도 동부의 섬들이라고 굳게 믿었고, 이후 쿠바와 히스파니올라(현 도미니카·아이티)에 도달하고도 그 착각을 번복하지 않았다. 단순한 항로 오류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엔 종말이 가까웠다는 열혈당원(zealot)처럼 확신했고, 자신은 성서 예언의 실현에 투입된 사도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믿음은 그가 어디에 닿든 '그곳이 맞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West & Kling 1991).
1493년, 그는 17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신대륙으로 향했다. 이때부터 열혈당원은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냈고, 스페인 식민 제국은 히스파니올라에 라 나비다드 요새를 세우며 정복을 구조화했다. 이 땅은 곧 유럽 경제 시스템의 마르지 않는 공짜 우물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이후 그 우물과 함께 말라갔다. 에나코미엔다(Encomienda)라는 이름의 제도 아래, 그들의 삶은 제도적 파괴에 편입되었다 (Pagden 1993).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을 “온순하고 기독교화하기 쉬운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즉 호구라고 판단한 셈이다. 그는 그들을 복음의 수혜자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정복 대상, 수탈 자원, 호구로 간주했다. 세례는 신앙이 아니라 호구 이용권을 발급하는 절차였고, 복음은 그 위에 붙인 공식 문서일 뿐이었다 (Todorov 1999).
스페인 본토의 반응도 뒤섞여 있었다. 일부는 황금과 토지를 반겼고, 일부는 그 ‘호구 이용권’이 지나치게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고 우려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그런 현실을 고발하며, 원주민도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한참 뒤에야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Las Casas 1552).
콜럼버스는 종교인이었고, 자신을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라 여겼지만, 그의 행동은 기독교의 핵심 문장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네 호구를 사용하라’로 바뀐 해석이었다. 그는 그들을 형제로 대하지 않았다. 형제는 없고, 호구만 있었다. 복음을 말하면서 폭력을 휘둘렀고,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호구로 팔아먹었다. 그의 언어는 믿음이 아니라 정당화된 포장지였고, 그것은 호구를 착취하는 데 명분 도구일 뿐이였다 (Fernández-Armesto 1991).
에나코미엔다 제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 호구들을 지배하고 무료 우물을 퍼낼지 큰 숙제였다. 이 유럽의 정복자들은 군대도 행정 체계도 없이, 넓은 땅과 낯선 호구들을 다스려야 했다. 콜럼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이미 존재하던 호구 제도를 끌어왔다. 그것이 바로 에나코미엔다(Encomienda)였다. 이 제도는 원래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 시절부터 사용하던 방식이다. 다시 점령한 땅에서 정복자에게 일정 지역의 호구와 우물을 관리하게 하면서, 그 대가로 왕실에 물을 바치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정복자는 호구들로부터 세금과 노동을 받아낼 수 있었고, 대신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이 제도는 땅을 주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맡긴다는 점에서 특징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유와 다를 바 없었다.
콜럼버스는 이 제도를 신대륙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익숙해서가 아니었다. 첫째, 그에겐 호구들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들에게 일정한 권한과 이익을 주면, 지배가 가능해진다. 에나코미엔다는 소수 유럽인이 다수 호구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해주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둘째,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실과의 계약을 통해 항해 자금을 지원받았기 때문에, 빠르게 무료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금과 향신료를 약속하고 출발했지만 생각만큼 나오지 않자, 그는 결국 호구들의 노동을 이용해 금을 캐고 식량을 생산하게 했다. 셋째, 종교적 명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강력한 열혈당원의 자세로 신대륙에 도착했다 믿었다. 왕실과 교회도 그런 명분 아래 탐험을 후원했다. 하지만 열혈당원의 아름다운 신앙과 호구들을 이용한 무료 우물 퍼내기는 이율배반적이었다. 에나코미엔다는 이 비극을 가려주는 역할도 했다. 호구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친다는 이름으로 그들을 조직화하고, 그 안에서 무료 우물을 퍼올렸다. 정복자는 영혼을 구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영혼을 하늘로 올려 보냈다.
콜럼버스가 에나코미엔다를 도입한 건 필요에 의한 복잡한 명분들이 모두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제도는 신대륙을 호구들에게 중환자실로 만들 뿐이었다. 복음을 말하며 노역을 강요하고, 보호를 말하며 폭력을 일삼았던 이 제도는 콜럼버스 통치의 핵심 수단이자, 식민주의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호구들은 더 이상 공동체 안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유럽 정복자에게 배정되어 우물의 물을 길어야 했고, 명목상으로는 보호와 종교 교육을 받는 조건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수의 중환자를 만들어 냈다. 농업과 광산에 동원되며 하루 종일 일해야 했고, 중노동과 영양 부족, 감당할 수 없는 노동량은 신체적 파괴를 불러왔다. 게다가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은 기존에 면역이 없던 호구들 사회에 빠르게 퍼져, 집단 사망으로 이어졌다.
가족 단위의 생활은 유지되기 어려웠고, 공동체는 흩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전체 마을이 사라지기도 했다. 정신적으로도 변화는 컸다. 호구들의 전통 신앙은 ‘우상숭배’로 몰려 금지되었고, 강제 세례를 받은 채 교회 중심의 새로운 생활에 편입되었다. 말과 노래, 의례, 신화는 다음 세대로 전해지지 못했고, 많은 호구 부족들은 몇 세대 안에 정체성을 잃었다. 정복은 단순히 땅을 차지한 게 아니라, 호구들의 삶 전체를 바꿔놓는 일이었다 (Stannard, 1992; Todorov, 1999).
에나코미엔다 지역별 피해 추산
지역 | 시기 | 인구 변화 추정 | 주요 피해 형태 | 특이 사항 |
히스파니올라 | 1492~1520 | 약 300,000명 → 수만 명 (90% 이상 감소) |
강제 노동, 전염병, 기아, 학살 |
타이노족 거의 소멸
|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
1520~1600 | 약 2,000~2,500만명 → 1~3백만명 (대폭 감소) |
광산 및 농업 노동, 전염병, 기아 |
일부 지역은 제도 종료 후 회복 시도
|
안데스 지역 |
1530~1700 | 수백만명 → 수십만명 (지속적 감소) |
미타(Mita)병행 강제 노동, 공동체 해체 |
왕실 개입에도 제도 지속됨
|
콜롬비아 | 1500~1800 | 수십만명 → 다수의 지역 공동체 소멸 |
장기적 강제 노동, 탈주 및 유랑화 |
에나코미엔다 제도 300년 이상 지속
|
자메이카 | 1509~1600 | 수만명 → 수천명 (거의 전멸) |
농업 중심 강제 노동, 인구 붕괴 |
사회 조직 완전 해체
|
미타 제도까지..
미타(Mita) 제도는 원래 잉카 제국의 노역 방식이었다. 마을 단위로 남성들이 일정 기간 공공사업에 동원, 교대하는 체계였다. 먹고 사는데는 큰 문제 없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이를 식민 통치 입맛에 맞춰 변형했고, 곧 광산을 위한 강제 노동 수단으로 전락한다. 특히 1545년 포토시(Potosí)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된 후, 미타는 제국 무료 우물 퍼내기의 핵심 방식이 된다. 이제 호구들은 공공사업자가 아니라, 제국의 은을 파내기 위해 산에 오르는 ‘노동 단위’로 취급됐다.
동시에 스페인은 안데스 지역에 에나코미엔다(Encomienda) 제도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정복자들이 특정 지역의 호구 공동체에 대한 조세와 노동 징수를 위한 제도였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제도가 분리되어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같은 호구들에게 동시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쿠스코, 아야쿠초, 오루로 같은 고산 마을에서는 호구들이 농지에서 일하고 조세를 바친 뒤, 또다시 미타 명단에 따라 포토시 광산으로 끌려갔다. 그냥 일이 많아진 것이 아니라 쥐어짠 수건을 한 번 더 짜는 방식이었다.
포토시는 해발 4,000미터를 넘는 고산지대였고, 노동환경은 최악이었다. 산소는 희박하고, 채굴 장비도 원시적이었다. 무너지는 갱도, 중금속 중독, 영양 결핍, 저체온증, 고산병이 동시에 덮쳐왔다. 호구들은 빠르게 중환자들이 되었고, 공동체는 박살이 났다. 남성이 거의 사라지거나 농사지을 호구들이 없이 황폐해졌고, 아이들은 어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영양상태도 나쁜 상황에 여기저기 흩어졌다. 잉카 시대의 노동 윤리는 잊혀지고, 남은 건 중환자실 공동체와 버려진 아이들 뿐이었다(Tandeter 1993).
이러한 상황을 일부 유럽인들도 알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목소리는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였다. 그는 《인디오들의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에서 호구들이 기계처럼 다뤄지고 있다고 썼고, 바야돌리드 논쟁에서는 “그들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중 착취와 반복 동원을 언급하며, “한 사람에게 부과된 두 개의 의무는 육체가 아니라 생존을 부정하는 구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공허한 외침처럼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고, 무료 우물 퍼내기는 몇 세기 더 이어졌다 (Las Casas 1552). 에나코미엔다와 미타라는 두 제도는 ‘호구를 통제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중환자 생성 제도였다.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니라, 제국 경제를 굴리는 화석 연료로 여겨졌고, 죽거나 연소하거나 산화했다.
미타 제도로 인한 피해 규모(에나코미엔다와 중복인 지역도 포함)
지역 | 시기 | 미타 동원 규모 | 피해 양상 | 특이 사항 |
포토시 (Potosí) |
1545~1800 | 연간 13,000~ 16,000명 |
고산병, 채굴 사고, 중금속 중독, 높은 사망률 |
가장 큰 미타 집결지,
은 수출 중심지 |
쿠스코 (Cusco) |
1550~1700 | 연간 수천 명 | 노동력 이탈로 농업 기반 붕괴, 가족 해체 |
잉카 중심지로서 정치적 상징성 있음
|
아야쿠초 (Ayacucho) |
1550~1700 | 연간 수천 명 | 미타 후 귀향자 대다수 건강 악화, 지역 공동체 약화 |
광산·농지 양측에서 이중 노동 발생
|
오루로 (Oruro) |
1550~1750 | 연간 수백~ 수천 명 |
지속적 인구 유출로 마을 기능 마비 |
광산 인근
반복 동원에 따른 탈주 증가 |
아레키파 (Arequipa) |
1550~1700 | 연간 수백~1천 명 | 노동자 부족으로 지역 생산력 급감 |
고산 지대 농업 약화로 생계 위협
|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등장
콜럼버스는 끝까지 자신이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고, 새로운 땅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나 지리적 능력은 부족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아메리고 베스푸치다. 그는 단순한 항해자가 아니라, 상인이자 항해 기술자였고, 지도 제작과 천문 관측, 해안 측량 능력을 고루 갖춘 당시 최강의 엄친아였다. 콜럼버스가 새로운 땅의 문을 연 인물이었다면, 아메리고는 그 문 너머 세계가 어떤 곳인지 밝혀낸 인물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모두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의 지리적 성격을 재확인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작업에 적합한 인물이 바로 아메리고였다. 그는 스페인 왕실의 요청을 받아 항해에 참여, 이어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후원 아래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했다. 그의 임무는 그 땅이 아시아의 일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해안선의 길이, 별자리 위치, 계절의 반응 등을 분석해, 그 땅이 완전히 새로운 대륙일 수 있음을 제기했다.
아메리고의 이런 지리적 해석의 결과물들은 유럽 지식인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의 보고서 『신세계 서한(Mundus Novus)』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특히 독일의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는 1507년 세계지도에서 이 대륙을 ‘America’라고 명명하며, “그 땅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르자”고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아메리고는 단순한 항해자가 아니라, 신대륙을 인식의 틀 안에 넣은 첫 인물로 자리잡았다. 아메리고의 주장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엔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왕실과 학문 세계, 지도의 정확성이 있었다. 유럽은 이제 발견보다 해석이 필요한 시대에 들어섰고, 아메리고는 그 흐름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Pagden 1993)
바야돌리드 논쟁의 촉발, 아메리고 베스푸치 영화가 없어서..
콜럼버스 이후 식민제국은 호구들을 대규모로 중환자로 만들었고, 에나코미엔다와 미타 같은 제도는 그 과정을 가속화 시켰다. 이로 인해 수많은 공동체가 파괴되고, 인구는 급감했으며, 유럽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응은 갈라졌다. 반응은 대체로 셋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라스 카사스처럼 ‘그들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한 입장, 또 하나는 ‘그들은 미개하므로 정복은 정당하다’는 식의 찬성 입장, 그리고 대다수는 식민지 밖의 일이라며 'Out of 안중' 이었다.
결국 1550년 스페인에서 열린 바야돌리드 논쟁(Valladolid Debate)을 촉발시킨다. 여기서도 입장은 두 갈래였다. 라스 카사스는 호구들의 인간성과 개종 가능성을 주장했고,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는 야만성과 정복 정당성을 내세웠다. 결론은 호구들도 인간이라는 쪽으로 났지만, 바뀐건 없었다. 철학자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수상록(Essais)』의 「식인종에 대하여」에서 호구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아메리카의 식인 풍습을 이야기하며, 유럽인의 전쟁과 고문이 그보다 덜 야만적인가 되묻는다. 몽테뉴는 ‘자연 상태의 인간’ 개념을 빌려와, 유럽 문명이 오히려 타락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분명한 상대주의적 시선이며, 문명 중심주의를 반성하게 만드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Montaigne 1580). 하지만 몽테뉴는 이 호구들을 대등한 주체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호구들을 철학적 사례로 활용하고, 그들의 삶을 실존적 실험처럼 그린다. 언뜻 우호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오랑캐를 철학의 거울로 사용하는 유럽식 사고 방식에 가깝다. 그는 “그들은 자연의 법에 따라 산다”고 썼지만, 이 말은 그들을 문화적·사회적 존재가 아닌 ‘인간 본성’의 표본으로 본 것이다 (Sayre 1997).
이런 태도는 단순한 이론적 거리를 넘어서, 당대 유럽 세계관의 틀 안에 있는 시선이다. 몽테뉴는 차별주의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사고는 분명히 한계 안에 있음은 확실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몽테뉴 같은 인물조차 그 시야를 넘어서지 못했기에, 그보다 덜 교육받은 이들의 무관심이나 정복 정당화는 시대의 보편적 인식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경험과 사고방식으로 과거를 평가하기보다, 그 시대를 만든 구조와 인식의 틀이 얼마나 좁았는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방식이다 (Pagden 1993).
몽테뉴가 인종차별주의라고?
이 흐름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다. 그는 『수상록』에서 소위 호구들을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 부르며, 유럽인의 잔혹성을 비판한다. 전쟁으로 찌든 유럽이 더 오랑캐스러울 있다고 주장한 그는, 휴머니즘 신학자들을 제외한다면 당시로선 상당히 세련된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묘사한 호구들은 대등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문명을 되돌아 보기 위한 철학적 도구에 가깝다. 몽테뉴는 문명과 오랑캐의 경계를 문제 삼았지만, 그 경계 바깥에 있는 호구들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존중하진 못했다(Sayre 1997).
이러한 한계는 그 개인의 편견이라기보다는, 그가 속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몽테뉴조차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주류 인식이 얼마나 짱짱하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오히려 몽테뉴가 그 틀 안에서 균열을 낸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가 내린 결론은 현대 기준으로 보면 2% 부족하지만, 그가 제기한 질문 자체는 시대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와 유사한 예가 코페르니쿠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의 지동설 주장은 과학적 증거보다 심미적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제기되었다. 신의 창조에 어울리는 세계는 정중앙에 지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질서 있는 체계라고 믿었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비논리적일 수 있지만, 그의 미적·신학적 감각이 결국 세계관을 바꿔놓았다. 몽테뉴가 문화인류학적 껍질을 두드릴 때, 코페르니쿠스 역시 천문학과 천동설의 껍질을 두드렸던 것이다.
몽테뉴도 마찬가지다. 그는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지 않았고, 호구들을 문화적 주체로 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 문명만 진짜 문명이야?’라는 물음은 당대 유럽 사회의 통념을 흔드는 데 충분했다. 그가 이룬 가장 큰 기여는 '우리가 항상 맞아?'라고 되물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과거를 바라볼 때 쉽게 빠지는 함정은, 현재의 윤리와 지식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고 바라보는 태도다. 콜럼버스를 악인이라 단정하거나, 몽테뉴를 불충분한 진보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단순화의 글러먹은 자세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시대의 구조와 언어 안에 있었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말했으며, 때로는 그 구조라는 껍질에 금을 냈다. 역사는 평가가 아니라,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Pagden 1993).
그래서..
콜럼버스의 이름은 탐험, 발견, 정복, 그리고 착취라는 상반된 이미지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그의 인격적 결함이나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가 유럽의 세계 인식에 끼친 결정적인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신의 뜻에 따라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지만, 그 항해는 의도치 않게 기존 세계관에 균열을 내고, 이후 인식의 판도를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Fernández-Armesto 1991). 1492년은 유럽 중심의 신학적·지리적 세계 이해가 외부 현실과 충돌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당시 유럽은 성경과 고대 지리 지식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 범위는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 일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외 지역은 이교와 야만의 공간으로 상상되었고, 인류 역사 안에 포함되지 않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 상황에서 콜럼버스가 도달한 신대륙은, 낯선 현실이었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작다는 잘못된 계산과 성경적 예언에 근거해 항해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전혀 새로운 대륙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끝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주장했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탐험을 계기로 이 땅이 아시아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결국 신대륙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이후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실증적으로 제공했고, 유럽은 지도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사고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Pagden 1993). 콜럼버스는 스스로 기존 질서 안에서 역할을 다했다고 믿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 질서를 파괴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대륙을 성경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 했지만, 도달한 현실은 그 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충격은 유럽 내에서 세계관을 다시 정비해야 한다는 필요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전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세계가 넓어지자, 기존의 정리된 진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과 신학 모두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 넘어간 지 40여 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났고, 유럽은 종교적 정체성과 질서의 위기 속에 있었다. 그의 항해는 그런 상황에 새로운 외부 현실을 더했고, 그로 인해 기존 세계 이해 체계는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격변은 결국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지구 중심 우주관을 부정하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는 주장은, 콜럼버스가 불러온 인식의 확대가 과학적 사고의 구조까지 흔들기 시작한 결과였다 (Todorov 1999). 결국 콜럼버스의 의미는 정복자나 탐험가라는 개인의 모습에 있지 않다. 그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존의 세계 인식을 흔들었다는 점이다. 그는 세계를 넓히려 한 것이 아니라, 넓어진 세계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열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영토가 아니라, 세계를 다시 그리게 만든 인식의 전환 그 자체다. 콜럼버스는 뜻하지 않게 근대의 문을 두드린 사람이었다.
콜럼버스는 자기 편차(magnetic declination)를 관찰했지만 최초 기록자는 아니다. 1492년 9월 13일, 콜럼버스는 대서양 항해 중 나침반 바늘이 북극성을 정확히 가리키지 않는 것을 기록했다. 당시 선원들은 불안해했으나 콜럼버스는 항해를 계속했다. 자기 편차는 이미 13세기 유럽과 중국 항해자들에게 알려졌던 개념이지만, 콜럼버스는 이를 신대륙 항해 중 남긴 대표적인 기록자로 남았다.
니냐(Niña), 핀타(Pinta), 산타 마리아(Santa María)는 별명이었다. 세 척의 배 중 공식 선박명은 산타 마리아였고, 나머지 둘은 별칭이다. 니냐는 원래 산타 클라라(Santa Clara)였으며, 소유주 후안 니뇨(Juan Niño)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핀타는 실제 공식 명칭이 불확실하며, 당대 스페인어 속어로 '칠한 배' 또는 '여자를 뜻하는 비속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산타 마리아는 갈리시아에서 건조되어 라 갈례가(La Gallega)라는 지역 명칭으로도 불렸다.
원주민을 납치했지만 대부분 사망했다. 콜럼버스는 첫 항해에서 아라와크족(Arawak) 원주민 10~25명을 납치해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그는 이들을 왕과 왕비에게 신대륙의 증거로 제시하고 개종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 질병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생존자는 8명에 불과했다.
산타 마리아는 실수로 좌초되었다. 1492년 12월 25일, 산타 마리아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인근 해역에서 좌초된다. 당시 선박을 조종하던 견습생 또는 선실 소년의 실수로 배는 산호초에 충돌했고, 회복되지 못했다. 콜럼버스는 배의 목재를 사용해 라 나비다드(La Navidad)라는 소규모 정착지를 건설하고, 39명의 선원을 남겨두었다. 귀환 후 돌아왔을 때 그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콜럼버스는 천문 지식으로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첫 항해 도중 선원들이 지루함과 불안으로 항해 중단을 요구하자, 콜럼버스는 바닷새 떼의 이동 방향을 근거로 항로를 변경했고, 이는 실제로 육지를 발견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항해에서 그는 알마낙에 기록된 일식과 달의 궤도를 활용해 원주민이나 선원들의 심리를 통제하는 데 천문학 지식을 이용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고등 수준의 항법 활용이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션(The Mission, 1986), 한 사람의 참회와 사라진 과라니 (0) | 2025.05.03 |
---|---|
노스맨, 2022: ‘바이킹’은 직업이 아니야, 알바 뛰다 나라 세운 녀석들! (0) | 2025.04.20 |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 1985 (0) | 2025.04.12 |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0) | 2025.04.11 |
솔라리스, Solaris, 1972, 2002 (0) | 2025.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