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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은하영웅전설, Legend of the Galactic Heroes, 1982

by napigonae 2025. 4. 10.

   은하영웅전설(銀河英雄伝説)은 다나카 요시키(田中芳樹)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집필한 대우주 SF 정치 드라마로, 수세기에 걸친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우주 전쟁물을 넘어 정치 체제, 리더십, 역사의 순환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모순 덩어리 정치 체제

   은하영웅전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적 딜레마 중 하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문제이다. 이 작품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를 다양한 상황을 통해 탐구한다. 양 진영의 지도자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Reinhard von Lohengramm)과 양 웬리(Yang Wen-li)는 모두 이 딜레마에 직면한다. 라인하르트는 제국의 부패한 귀족들을 타도하기 위해 전쟁을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과 군인들의 희생을 초래한다. 반면 양 웬리는 전쟁을 빨리 종결시켜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때로는 부하들을 위험한 상황에 보내야 하는 결정을 내린다. 특히 "이제르론 회랑(Iserlohn Corridor) 전투"에서 양 웬리가 적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 함대를 미끼로 사용하는 전략은 다수를 살리기 위한 소수 희생의 전형적인 예시이다. 이러한 결정이 전략적으로는 옳더라도, 그것이 가져오는 도덕적 부담과 지휘관의 심리적 고뇌를 작품은 깊이 있게 묘사한다.

 

   은하영웅전설의 또 다른 핵심 주제는 어떤 정치 체제도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인물의 능력과 덕성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라인하르트의 신 제국이나 트리글라프(Job Trunicht)의 자유행성동맹 모두 유능한 지도자 아래에서는 번영하지만, 그 계승자들에게는 같은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라인하르트가 구축한 황금시대의 제국은 그의 사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 알렉산더(Alexander)라는 어린 후계자와 힐다(Hildegard von Mariendorf)라는 섭정이 있지만, 이 체제가 라인하르트의 카리스마와 능력 없이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의 오현제(Five Good Emperors) 시대나 중국의 태평성대들도 결국 무능한 후계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반면 민주주의 체제인 자유행성동맹은 트리글라프 같은 부패한 정치인들에 의해 내부적으로 붕괴되었다. 이는 아무리 이상적인 체제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인물들의 부패와 무능에 의해 훼손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은 특히 자유행성동맹의 관료제가 가진 비효율성과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복잡한 행정 절차, 책임 회피, 정실 인사가 만연한 동맹의 모습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직면한 문제를 반영한다. 양 웬리가 직접적인 군사 작전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 것이 바로 이 관료제와의 싸움이다. 그가 이상적인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경직성과 부패 때문에 좌절하는 모습은, 좋은 의도와 능력을 가진 개인도 구조적 문제 앞에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은하영웅전설은 전쟁이 가져오는 참혹한 대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수십억 명이 죽는 거대한 우주 전투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상실과 트라우마도 섬세하게 묘사된다.특히 작품은 숫자로만 표현되는 전사자들이 각각 하나의 삶과 꿈을 가진 개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제국과 동맹 간의 이념적 대립이 실제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무수한 희생 위에 세워진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대의나 이념도 그러한 희생을 완전히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SF라는 미약한 설정. 하지만 괜찮아.

   은하영웅전설이 수천 개의 항성계(stellar systems)와 수조 명의 인구를 다루는 거대한 SF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내에서 외계 생명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작품의 SF적 상상력에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인류가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고 수많은 행성(planets)을 식민지화했음에도 단 하나의 외계 문명도 만나지 못했다는 설정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작품이 순수한 SF보다는 인류의 정치와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기 때문일 수 있으나, 외계 문명과의 만남이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문화적, 철학적 질문들을 탐구할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있다.

미인박명, 단명천재.

 

   작품에서는 워프 항법을 통해 항성 간 이동이 가능하지만, 전투 시에는 특정 지점(이세를란트 회랑 등)에서 정체된 요새 전투를 벌인다. 이러한 설정은 역사적인 지상 전투를 우주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주며, 워프 기술의 전술적 활용 가능성을 충분히 탐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순간 이동이 가능한 기술이 있다면, 적의 방어선을 우회하거나 후방을 기습하는 전술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해협이나 산악 통로와 같은 지리적 요충지의 개념을 우주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SF적 상상력보다는 역사적 전투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작품 내에서 무인 미사일이나 자동화된 전투 시스템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주요 전투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승무원을 태운 거대 함선들에 의해 수행된다. 이는 미래 전쟁의 자동화 및 무인화 추세와는 배치되는 설정이다. 오늘날 현실에서도 드론과 자율 무기 시스템이 전장의 모습을 바꾸고 있는데, 훨씬 발전된 미래 사회에서 인명의 직접적인 희생을 감수하는 전투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전쟁의 인간적 비용과 지휘관의 결단력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수 있지만, SF적 리얼리티를 일정 부분 희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천 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묘사되는 문화와 기술은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 의복, 사회 구조, 심지어 음식까지도 20세기의 그것과 유사하며, 이는 수천 년에 걸친 문화적 진화의 가능성을 충분히 탐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인공지능, 유전자 조작, 뇌-기계 인터페이스(Brain-Machine Interface) 등 현대에도 발전하고 있는 기술들이 미래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상상이 부족하다. 이는 작품이 정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SF 작품으로서의 미래학적 상상력은 다소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디스켓.

 

   작품에서 가장 도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SF적 설정 중 하나는 은하계 내 양 진영이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단 두 곳 이제르론 회랑과 페잔 회랑(Fezzan Corridor))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수천 광년에 달하는 은하계 규모를 고려할 때, 이러한 제한된 접근로 설정은 우주의 3차원적 특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우주에서는 무수히 많은 접근 경로가 존재할 것이며, 특히 워프 기술이 발달한 문명이라면 더욱 다양한 경로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역사적인 지상 전쟁의 지리적 제약을 우주 규모로 단순 확장한 것으로, SF적 상상력보다는 전통적인 전략 게임의 논리에 더 가깝다. 이 설정은 서사의 단순화와 극적 긴장감 조성에는 효과적이지만, 과학적 개연성 측면에서는 작품의 SF적 완성도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은하영웅전설은 SF 작품으로서 분명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주 함대전의 웅장한 스케일과 치밀한 전략 묘사, 다양한 행성 환경과 문명의 특성을 반영한 세계관, 그리고 이제르론 요새(Iserlohn Fortress)와 같은 독창적인 우주 구조물의 설정은 SF 장르의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한 요소들이다. 특히 작품이 군사 기술과 우주 함대 전투를 통해 미래의 전쟁 양상을 그려내는 방식은, 비록 현대적 관점에서 일부 비현실적일지라도,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거대한 우주적 배경을 통해 인간 사회의 보편적 문제를 조명하는 방식은 SF 문학의 본질적 가치인 '인류의 미래에 대한 성찰'을 충실히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은하영웅전설은 기술적 미래상보다 인간 사회의 정치적, 철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사회과학 SF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 체제의 양면성

   은하영웅전설은 민주주의(Democracy)와 전제정치(Autocracy) 어느 쪽도 이상화하지 않고, 두 체제의 장단점을 냉정하게 분석한다. 특히 자유행성동맹이라는 민주주의 체제가 실제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모습을 통해, 이상적인 민주주의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양 웬리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 형태가 아니라 최악의 정치 형태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완벽한 체제가 아니라 인간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제어하기 위한 차선책이라는 현실적 관점을 반영한다.

 

   라인하르트의 제국은 능력 있는 전제군주가 이끄는 체제의 효율성과 장점을 보여준다. 그는 부패한 귀족들을 몰아내고 실력자들을 등용하여 제국을 개혁한다. 이는 때때로 비효율적이고 타협적인 민주주의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작품은 동시에 그러한 체제의 위험성도 경고한다. 라인하르트처럼 유능하고 선의를 가진 독재자는 드물며, 권력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남용과 부패의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라인하르트 사후의 체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체제의 근본적 취약점을 드러낸다.

 

   은하영웅전설은 루돌프 폰 골덴바움(Rudolf von Goldenbaum)이 건설한 은하제국이 500년 후에 다시 유능한 독재자(라인하르트)에 의해 재건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역사가 단선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순환적 패턴을 따른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민주주의가 부패하면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게 되고, 독재가 오래 지속되면 자유를 향한 열망이 커진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작품은 포착한다. 이런 관점은 어떤 정치 체제도 영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각 체제는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결국 변화를 겪게 된다는 비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그래서..

   은하영웅전설은 SF 설정의 일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치 체제와 리더십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민주주의와 전제정치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개인의 능력과 시스템의 상호작용, 역사의 순환적 본질에 대한 통찰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이다.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어떤 정치 체제도 완벽하지 않으며, 모든 체제는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의 덕성과 지혜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역사를 바꿀 수 있지만, 진정한 변화는 제도와 문화에 뿌리내릴 때 지속될 수 있다. 은하영웅전설은 우리에게 정치적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균형을 찾도록 도전하며, 이는 오늘날의 정치 담론에도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베르슈타인(Oberstein)은 무정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으나,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그가 유일하게 정을 붙인 존재로 ‘개’가 등장하였다. 이 개는 원래 아이제나흐(Eisenach)의 실수로 죽는 설정이었고, 이로 인해 오베르슈타인과 아이제나흐 사이의 긴장이 발생하는 서브플롯이 기획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과 캐릭터의 일관성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최종 각본에서 삭제되었다. 
   작가는 양 웬리(Yang Wen-li)의 기본 성격 설정에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라는 실존 인물의 철학과 태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정치적 냉소주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 대중 속에서의 고독함 등의 특징은 료마의 일화들에서 착안한 것이다. 양 웬리가 정치에는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갖는 이중적인 태도는 이러한 영향의 직접적 반영으로 보인다.
   애니메이션 제작 당시 은하제국의 전함 디자인은 19세기 오스트리아의 비더마이어(Biedermeier) 예술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획되었다. 이는 전체주의적 질서, 귀족 사회의 절제된 미학, 과거 회귀적인 이상주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장치였다. 실제 완성된 디자인에서는 SF적 요소가 강조되면서도 해당 양식의 흔적이 명확히 드러나는 디테일이 남아 있다.
   작가는 원작 소설 각 권에서 라인하르트(Reinhard von Lohengramm)가 양 웬리라는 인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점진적으로 바뀌는 구조를 의도적으로 삽입했다고 밝혔다. 초반에는 단순한 군사적 장애물로 보았으나, 점차 정치적 위협으로, 이후에는 존재론적 거울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 문체와 시점 표현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라인하르트의 내면 변화에 몰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서술 전략이었다.
작중 언어 설정은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세계관 내부 설정에서 은하제국은 독일어(German), 자유행성동맹은 영어(English)를 기반 언어로 삼고 있다는 설정이 있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정치적 해석을 피하기 위해 언어 설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실존 정치 체계나 국가를 연상시키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작가의 중립주의적 입장에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