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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침묵 속에 사라진 이름, 자크 까르티에(Jacques Cartier)

napigonae 2025. 4. 27. 03:13

 

영화, 드라마 한 편 없는 자크 까르티에

   자크 까르티에는 프랑스 대항해 시대의 주요 탐험가였지만, 실패한 인물로 기록되며 역사 속에서 잊혔다. 프랑스는 까르티에의 실패를 국가적 수치로 받아들였고, 그의 업적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까르티에가 실패한 진짜 이유는 개인 능력의 한계보다 구조적 문제에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대항해 경쟁에 뛰어들면서 충분한 지원 없이 과도한 기대만을 걸었고, 까르티에는 부족한 인력과 자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대륙 개척을 강요당했다. 실패는 구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탐험의 결과를 개인 책임으로만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까르티에는 미지의 환경, 극심한 기후, 원주민과의 충돌, 식량 부족 등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 고립되었고, 이는 500년 전 북미에 진출했다 실패한 바이킹의 사례와도 닮아 있다. 이 글은 까르티에의 실패를 개인적 무능이 아닌, 국가적 준비 부족과 구조적 한계의 결과로 재해석한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 줌

자크 까르티에를 향한 기억 

   자크 까르티에(Jacques Cartier)는 프랑스가 대항해시대에 늦게 뛰어들면서 최초로 북미에 정착을 시도한 인물이었다. 1534년 첫 번째 항해를 시작으로 세 차례에 걸쳐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세인트로렌스 만(Gulf of Saint Lawrence), 강 상류 지역까지 항로를 개척하려 했다. 그는 초기 정착지를 세우고 북미 내륙 진출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대규모 식민지 건설이나 황금 발견 같은 즉각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까르티에의 이름이 역사와 대중 문화 양쪽 모두에서 거의 사라졌다.

 

   역사가들은 그의 항해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지만, 그의 탐험이 만들어낸 지리적, 전략적 가치를 해석하거나 확장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국내 종교 갈등과 왕권 불안정으로 해외 사업에 장기적 투자를 이어갈 수 없었다. 까르티에는 과도한 기대 속에서 출항했으며, 왕실은 신대륙에서 곧장 금과 은, 식민지를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 사가들 역시 결과 중심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탐험의 과정 자체를 평가절하했다. 까르티에가 이룬 발견과 경험은 시대가 요구한 '즉각적 가시 성과'에 부합하지 못했을 뿐이며, 이로 인해 그의 진정한 의미는 체계적으로 지워졌다(Park, 2023; Martin, 2018).

https://www.luminarium.org/encyclopedia/francis1.htm

낭만과 허세, 프랑수아 1세의 착각

   프랑수아 1세(François I)는 프랑스가 유럽의 문화, 정치, 군사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세계가 프랑스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대항해 경쟁에서도 마땅히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오만한 신념은 현실을 냉정히 파악하는 대신, 신대륙에서도 별다른 투자 없이 곧바로 부와 영토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낳았다. 까르티에는 이 환상의 희생자였다.

 

   프랑수아 1세는 콜롬보, 베스푸치 같은 선례를 모방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에스파냐나 포르투갈과 비교할 수 없는 소규모 자원만을 제공했다. 까르티에가 받은 지원은 프랑스 국가 재정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며, 이는 지속적 식민 사업을 위한 최소 기준에도 못 미쳤다. 탐험 성공은 본질적으로 자본과 인력의 규모에 비례하는데, 프랑스는 적은 비용으로 대박을 노렸다. 결과적으로 실패는 구조적 필연이었고, 까르티에는 이를 온전히 뒤집어썼다(Taylor, 2015; Trudel, 1995).

 

주요 국가 예산과 탐험 투자 비용 비교

구분 1년 국가예산(대략) 탐험에 투입한 예산 투자 기간 주요 탐험 함대 구성
연간 투자 비율(%)
프랑스 12~15백만 리브르 까르티에 항해 1회당 7~10만 리브르 1534~1542 (약 8년) 주력선 2~3척, 보조선 1척 수준 약 0.5~0.7%
에스파냐(스페인) 25~30백만 레알 콜롬버스 1차 항해 6만 마라베디스, 이후 대규모 투자 1492~1560 (70년 이상 지속) 초기 3척, 이후 식민 원정대 수십 척 단위
초기에 약 1%, 이후 아메리카 정복기에는 5% 이상
포르투갈 8~10백만 크루자두 인도항로 개척에 국가예산 2~3% 집중 투입 1497~1550 (50년 지속) 바스쿠 다 가마 시기 4척, 이후 인도 원정대 10척 이상 약 2~3%
영국 5~7백만 파운드 존 캐벗 초기 탐험 극소액, 본격적 투자는 17세기 1497 단발성, 1600년대부터 지속 초기 1척, 이후 동인도회사 중심 대규모 탐험
초기에 무시할 수준, 이후 2% 이상(17세기)

 

불운의 연속

   까르티에가 북미 뉴펀들랜드에 도착했을 때, 아무런 지도도 없이 항로를 개척해야 했다. 그는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미지의 해안을 탐색했고, 세인트로렌스강은 그에게 명백한 서쪽 진출로처럼 보였다. 강의 규모와 방향은 새로운 항로를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까르티에는 이 가능성을 붙잡았지만, 강 너머로는 수천 킬로미터에 걸친 광대한 대륙이 이어져 있었다. 마젤란(Fernando Magellan)이 남미 대륙의 끝자락에서 해협을 찾아 태평양으로 나아간 것과는 전혀 다른 조건이었다. 까르티에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출발선에 있었고, 탐험을 지속할 자금과 인력조차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항해 기술은 뛰어났지만, 정착지를 유지하고 확장할 상업적 경영 능력이나 외교적 설득력은 약했다. 이는 개인적 무능이 아니라, 애초에 제한된 인재풀과 부실한 준비로 출항했기 때문이었다. 북미의 혹독한 겨울과 낮은 농업 생산성, 높은 강수량은 탐험대를 점차 약화시켰고, 초기에 수립한 원주민과의 교류도 물자 부족과 문화적 오해로 빠르게 악화되었다. 까르티에는 환경적, 구조적 악조건 속에서 성과를 내야 했으나, 이 모든 요인이 그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Taylor, 2015; Trudel, 1995).

 

https://stampaday.wordpress.com/2018/05/10/jacques-cartiers-voyages-to-canada/

바이킹의 실패와 판박이

   까르티에 이후 프랑스는 북미 대륙에 지속 가능한 거점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초기 정착 시도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반복되는 식량 부족으로 곧 붕괴했고, 원주민과의 관계 역시 긴장과 갈등 속에서 악화되었다. 까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진출하며 기대했던 부의 원천은 무가치한 광물 덩어리에 불과했다. 금과 다이아몬드를 기대했던 프랑스 왕실의 바람은 허물어졌고, 탐험은 명분과 성과를 동시에 잃었다. 하지만 이 실패는 까르티에 개인의 무능을 넘어서는 구조적 문제였다.

 

   500년 전 바이킹들이 뉴펀들랜드에 도착했을 때 직면했던 환경, 기후, 문화 충돌은 까르티에와 완전히 똑같았다. 지도 없이 닥치는 대로 항해했고, 정착지를 유지할 농업과 교역 기반이 없었으며, 원주민과의 충돌로 고립되었다. 바이킹이 실패한 이유가 개인의 항해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준비 부족과 환경 적응 실패였던 것처럼, 까르티에도 같은 길을 걸었다. 프랑스는 북미를 자원의 보고로만 보고, 장기적 거주와 사회 건설을 계획하지 않았다. 북미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단기적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 국가 전체가 바이킹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까르티에의 실패는 한 항해사의 좌절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국가와 사회 전체의 실패였다 (Eccles, 1990; Trudel, 1995).

 

바이킹과 까르티에의 실패 비교

항목 바이킹 (약 1000년경) 까르티에 (1534~1542)
탐험 지역 뉴펀들랜드(L'Anse aux Meadows) 뉴펀들랜드, 세인트로렌스강 지역
지도 정보 없음 없음
정착지 유지 조건 농업 기반 미약, 혹독한 기후 농업 기반 미약, 혹독한 기후
원주민과 관계 빈번한 충돌, 교역 실패 초기 교류 실패, 갈등 격화
식량 자급 수준 부족, 외부 지원 없음
부족, 외부 지원 미약
귀환 원인 생존 한계, 적대적 환경
생존 한계, 적대적 환경
국가 지원 없음(독자적 항해)
국가 지원 있었으나 매우 부족
결과 정착 포기, 귀환 정착 포기, 귀환

 

   까르티에는 바이킹보다 500년 뒤에 북미 대륙에 도착했지만, 처한 조건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지도 없는 항해, 준비 부족, 생존 기반 부재, 원주민과의 긴장이라는 결정적 요소들이 바이킹과 똑같이 반복되었다. 더구나 바이킹은 정착을 원했으나 실패했고, 프랑스는 그보다 훨씬 과도한 기대(금, 은, 제국 건설)를 품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오히려 바이킹보다도 초라했다. 까르티에의 실패를 개인 능력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그의 실패는 국가적 준비 부족과 구조적 무능, 그리고 500년의 시간을 허비하고도 아무런 학습을 하지 못한 프랑스 왕실 전체의 책임이었다.

 

세 번의 실패와 괴혈병

   까르티에의 항해는 초기부터 준비 부족이 명백했다. 1534년 첫 번째 항해에서 그는 가스페(Gaspé) 지역에 도착해 미크마크(Mi'kmaq)와 베오트루크(Beothuk) 부족과 접촉했으나, 문화적 차이와 언어 장벽으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프랑스의 영유권 주장이 불신을 키웠다. 1535-1536년 두 번째 항해에서는 스타다코나(Sta-da-cona)에서 이로쿼이족과 교류했지만, 겨울 동안 식량 부족과 질병으로 탐험대가 몰락했고, 까르티에가 수장을 납치하면서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1541-1542년 세 번째 항해는 호첼라가(Hochelaga) 인근에서 시작되었으나, 원주민들과의 신뢰는 이미 무너져 있었고, 정착지 건설은 실패로 끝났다. 까르티에 개인은 항해 기술은 있었지만, 정착지 관리나 외교적 협상에 필요한 전문 역량은 부족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프랑스가 1차 실패 이후에도 전문가를 보강하지 않은 채 동일한 방향으로 2차, 3차 항해를 강행했다는 점이다. 인재풀을 확충하지 않고 지원조차 강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공을 기대한 것은 무모했다. 까르티에의 실패는 개인 능력만이 아니라, 체계적 준비와 구조적 대응 부재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였다 (Eccles, 1990; Taylor, 2015).

 

까르티에의 1-3차 탐험과 접촉 부족

탐험 차수 접촉 부족 (한글/원어) 지역 과정 결과
1차 항해
1534
미크마크(Mi'kmaq)
베오트루크(Beothuk)
가스페(Gaspé) 반도
세인트로렌스 만 입구
선물 교환 시도, 프랑스 영유권 선언으로 긴장 발생
교류 실패, 불신 확산
2차 항해
1535-1536
스타다코나족(Sta-da-konans, 이로쿼이 계열) 스타다코나(Sta-da-cona, 현재 퀘벡시 인근) 초기 식량 지원 교류, 겨울철 생존 위기, 수장 납치
신뢰 붕괴, 관계 악화
3차 항해
1541-1542
호첼라가족(Hochelagans, 이로쿼이 계열) 호첼라가(Hochelaga, 현재 몬트리올 인근) 교류 시도 실패, 원주민 경계 강화
정착 시도 실패, 무력 충돌 위기, 철수

 

   까르티에는 젊은 시절 남미 항해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괴혈병에 대한 대비로 이어지지 않았다. 남미를 향한 항해는 대서양을 건너는 시간이 짧았고,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괴혈병 같은 질병을 본격적으로 겪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까르티에가 북미 뉴펀들랜드와 세인트로렌스강 지역으로 진출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특히 1535년 두 번째 항해에서 스타다코나(Sta-da-cona) 지역에 머무르면서, 그는 혹독한 겨울을 맞아 오랫동안 신선한 식재료를 공급받지 못했다. 게다가 원주민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식량 교환도 끊겼고, 이로 인해 괴혈병 환자가 대규모로 발생했다. 까르티에는 장거리 항해 중 괴혈병을 경험한 마젤란(Fernando Magellan)과는 다른 경로를 밟았지만, 결과적으로 북미 내륙 정착 과정에서 괴혈병이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첫 사례를 직접 겪은 셈이었다 (Trudel, 1995; Eccles, 1990).

https://www.nzgeo.com/stories/a-scurvy-business/

바이킹은 괴혈병에 안 걸렸는데?

   바이킹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다양한 식습관을 유지한 집단이었다. 육류, 어류, 해산물, 유제품, 야생 식물 등을 섭취하며, 필요하면 생식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생존 중심의 식문화는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비타민 C 섭취 경로를 제공했고, 괴혈병과 같은 질병을 겪지 않게 했다. 반면, 대항해시대 초기 프랑스인은 문명화된 식도락 문화에 사로잡혀 식단이 곡물과 저장 식품 중심으로 경직되어 있었고, 신선한 식재료 섭취 비율은 현저히 낮았다.

 

   빈란드 사가(Vinland Sagas)에서는 바이킹이 북미 대륙 원주민, 스크랄링(Skrælingjar)과 접촉한 기록이 등장하지만, 이 관계는 평화적이라기보다는 긴장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교류를 시도했지만, 문화적 충돌과 물자 쟁탈 문제로 충돌이 빠르게 격화되었고, 결국 바이킹은 빈란드 정착지를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스크랄링으로부터 생존 기술이나 식문화를 배웠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바이킹이 실질적으로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은 대상은 그린란드 서부와 북극권에 거주한 이누이트(툴레 문화권)였다. 그린란드에 정착해 있던 바이킹은 극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이누이트와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물자 교환과 생존 기술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누이트는 생고기 섭취와 발효 식품을 통해 비타민 C를 섭취하는 식문화를 유지했으며, 괴혈병 발병이 극히 드물었다. 바이킹이 이들의 생식 습관이나 해양 수렵 기술을 일부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결과적으로 바이킹은 북대서양과 북극권의 혹독한 환경에서도 괴혈병 대규모 발생을 피할 수 있었고, 이는 항해술이나 무력 의존이 아니라, 환경에 맞춘 실용적 생존 적응 덕분이었다 (Wallace, 2003; Gulløv, 2008).

 

3차 탐험까지 실패 후

   까르티에의 실패 이후 재출항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국가 이성(Raison d'État) 이 작동했다고 본다. 프랑스는 신대륙에서 기대했던 즉각적 수익을 얻지 못했고, 국내 정치 불안과 재정 악화가 겹치면서 국가적 이익 차원에서 대규모 재투자를 포기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까르티에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벌어진 실제 균열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까르티에의 실패는 계산 실패가 아니라, 프랑수아 1세 개인의 체면과 왕권 상징에 입힌 심각한 타격이었다. 프랑수아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까르티에를 조용히 외면했고, 이는 사실상 왕실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적극적 묵살이었다.

 

   까르티에는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명망 있는 귀족 가문과 혼인한 만큼, 궁정의 권력 흐름과 왕실의 감정선을 읽을 수 있었다. 출항 전의 기대와 실패 이후 침묵의 의미를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했다. 까르티에는 실패를 둘러싼 권력의 민감성을 간파하고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논란을 피하며 조용히 물러났고, 별다른 추문 없이 생을 마감했다.  (Machiavelli, 1532; Richelieu, 1638).

 

그래서...

   자크 까르티에의 실패는 한 항해자의 좌절이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은 국가, 과도한 기대에 사로잡힌 왕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사회 전체의 실패였다. 까르티에의 실패 이후 프랑스는 약 50년 동안 원양 탐험을 사실상 중단했다. 국내 정치 혼란과 재정 파탄이 발목을 잡았고, 그 사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대륙을 장악하며 세계 패권을 다투었다. 프랑스가 다시 대서양으로 나섰을 때, 이미 강대국들과의 격차는 뚜렷하게 벌어진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캐나다 지역에 식민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세인트로렌스강 유역과 오대호 지역을 중심으로 뉴프랑스를 세웠고, 이는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결과물이 되었다. 까르티에는 개인의 명예를 주장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의 흐름을 읽었고, 조용히 사라지는 쪽을 선택했다. 그의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까르티에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희미해졌지만, 그가 겪었던 실패는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시대 전체의 무능을 드러낸 기록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