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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 자유주, 프리 스테이트, Free State of Jones, 2016

napigonae 2025. 4. 10. 14:26

   존스 자유주는 2016년 개봉한 미국 영화로,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실제 인물 뉴턴 나이트(Newton Knight)의 활동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전장에서의 영웅담이나 감성적 해방 서사보다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최소한의 정의와 공동체의 윤리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독자적 위치를 가진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지속된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남부의 가난한 백인 농민들, 특히 자영농들은 노예 소유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동원되었다. 뉴턴 나이트는 미시시피 출신으로, 이러한 모순에 저항하여 남군을 탈영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농민, 탈출한 노예들과 함께 독립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는 미시시피 존스 카운티(Jones County)의 실재 사건에 기반하며, 미국 내에서 독립적인 정치적 저항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실제 나이트의 눈빛이 살아있네.

휴머니즘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서..

   흑인 해방을 단순한 피해자의 구제나 백인의 시혜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예제에 기반한 구조적 폭력과 그것에 반대하는 개인의 윤리적 판단을 부각시킨다. 주인공 나이트는 흑인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동화되기보다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차별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고를 중심에 둔다. 해방 운동의 본질을 감성적 위로가 아닌 윤리적 책임, 시민적 의무로 재구성한다. 프리 스테이트 공동체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대안적 모형으로 기능한다. 이 공동체는 인종, 출신, 과거에 따라 구성원을 구분하지 않으며, 노동과 식량을 공유하고 상호 보호 체계를 마련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인 평등한 시민권의 원형적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 후반부는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흑인들에 대한 제도적 억압이 지속되었음을 묘사한다. 해방령(Emancipation Proclamation)이 발표되고 헌법상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실질적인 평등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흑인 유권자에 대한 탄압, KKK의 폭력, 그리고 현장 투표 방해 등의 장면은 전쟁의 끝이 곧 정의 실현은 아님을 강조한다. 당시 미국 사회가 법적으로는 자유를 선언했지만, 현실에서는 윤리를 저버렸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흑인 남성 모지스(Moses)가 투표권을 행사하려다 살해당하는 장면은, 법과 현실의 거리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감정을 자극하는 몇몇 신피적 장면들이 나오지만, 감독 게리 로스(Gary Ross)는 이를 영화적 뻔한 클리셰로 소비하지는 않았다. 음악, 편집, 카메라 워크 모두가 절제되어 있으며, 등장인물의 고통도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는다. 관객은 감정적 카타르시스 대신, 사건의 구조와 인간의 윤리에 주목하게 된다전통적 서사에서는 흑인의 해방이 백인의 자비나 감정적 동정심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방식에서 나름 철저히 거리를 둔다. 정비되지 않은 연약한 국가 시스템을 고발하고 인간이라는 상황을 불평등하게 보게 한다.

 

   나이트가 이끄는 공동체의 등장은 이상주의적 환상이 아닌, 생존과 자율의 구체적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유를 위한 저항은 말로만 하는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 자치와 방어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총을 들고 자신들을 지키는 그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저항의 주체다. 나이트와 흑인 여성 레이첼(Rachel)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이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당시 남부 백인 사회의 인종 규범을 정면으로 거스른 결정이었다. 두 사람의 후손은 1948, 미시시피 법원에서 인종 차별적 판결을 받았다. 나이트의 증손자가 백인 여성과 결혼하려 했을 때, 그가 1/8 흑인이라는 이유로 법적으로 결혼이 금지된 사례다. 이 일은 나이트 가문의 행보가 단지 전쟁기 저항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그 흔적이 수십 년 후까지 제도적 차별의 기준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존스 자유주의 국

현실과 정치

   영화는 나이트와 공동체만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의 정치적 현실을 스쳐 간다. 특히 남부 각지에서 등장했던 흑인 유권자들, 그리고 그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한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의 움직임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후퇴할 수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1877년 타협(Compromise of 1877) 이후 연방 정부가 남부에서 철수하자, 많은 흑인 유권자들은 사실상 무권리 상태로 전락했고, 이 영화는 그러한 구조적 배신을 암시적으로 끌어안고 있다텍사스와 루이지애나 국경 지역에서는 나이트와 비슷한 저항 사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역사 속에서 지워졌거나 지역적 전설로 남았다. 존스 자유주가 특이한 점은, 그것이 단순한 생존의 기록이 아니라, 연대와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총을 들고 저항한 농민과 노예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나이트는 미국적 이상을 되묻는 존재로 남았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이어진 재건시대는 단순한 물리적 복구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정치적 실험이었다. 흑인에게 시민권과 투표권을 부여하려는 연방 정부의 시도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평등’이라는 개념이 법과 제도 속에 진입하려 했던 시점이었다. 남부에서는 흑인이 주 의원으로 선출되고, 학교와 교회 등 자율적 공동체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체제 위협으로 여겨졌고, 폭력과 법제적 방해가 일상화되었다. ‘자유’의 선언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이 시기에 더욱 깊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1877년 타협'은 결정적인 변곡점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 용어는, 사실상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를 바꿔놓은 사건이다. 이 타협은 대선에서 승리를 확정받기 위해, 공화당 후보 러더퍼드 헤이즈(Rutherford Hayes)가 남부에서 연방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성립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정권 이양이 평화롭게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연방정부의 보호 아래 겨우 싹트던 흑인의 정치적 권리가, 이 타협으로 한순간에 무력화된 것이다.

 

   1877년 타협 이후, 남부는 다시 지역 엘리트들의 손에 넘어갔고, 흑인을 향한 제도적 폭력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유권자 등록을 방해하고, 투표소에서의 테러를 일삼았으며, 학교나 공공시설은 다시 분리되었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모지스(Moses)의 죽음은 이 구조적 배신의 집약적 장면이다. 그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행사하려 했을 뿐인데, 지역 사회는 그를 보호하지 않았고, 법은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이것이 ‘컴프로마이즈’가 단순한 정치적 거래가 아닌, 정의의 철수를 공식화한 역사적 순간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다.

 

끝나지 않은 나이트의 싸움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논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 영화는 재건시대를 그런 시기로 바라본다. 흑인에게 자유를 부여한 것은 북군의 승리가 아니라, 지속된 저항과 연대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제도와 권력의 협상 속에서 언제든 철회될 수 있었다. 나이트와 그가 이끈 공동체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들이 선언된 자유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자유를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이유, 공동체를 해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평등은 법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할 약속이라는 점에서.

 

   미시시피주의 반오류 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은 단순히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한 조항이 아니라, 남부 백인 사회가 인종적 위계를 법적으로 고착화하려 했던 대표적 장치였다. 사랑과 결혼 같은 사적 관계조차 백인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고, 법은 그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규범은 남북전쟁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도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영화에서 그려진 나이트와 흑인 여성 레이첼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 당시 사회 질서에 대한 급진적 도전이었다. 그런데 그 도전의 결과는 단지 개인의 일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48년, 나이트의 증손자인 데이비스 나이트(Davis Knight)는 백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된다. 검찰은 그가 1/8 흑인의 혈통을 가졌다는 점을 문제 삼았고, 이는 미시시피 반오류 금지법을 근거로 결혼 무효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남북전쟁이 끝난 지 80년이 지난 시점에서조차, 인종의 경계를 법이 어떻게 유지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도적 차별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가족의 역사까지도 법적 판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데이비스 나이트는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뒤집혔지만, 그 과정 자체가 인종 규범이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처럼 ‘해방’은 선언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법이 평등을 말할 때조차, 현실은 과거의 그림자를 쉽게 지우지 못했다. 데이비스 나이트의 재판은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되돌려준다. 과거를 극복했다고 믿는 지금,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이 물음 앞에서, 역사는 여전히 불편한 답을 내놓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윌리엄 폴 존슨, 조셉 호시, 브랜든 휴즈, 카일 보먼 영화 속 엑스트라들의 재연사진.

미국 역사, 하지만 잘 몰라요.

   존스 자유주는 미국 주류 역사교육에서 거의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으며, 대부분의 교과서나 교육과정에서는 남북전쟁을 노예제 폐지, 링컨, 북군과 남군의 대립, 게티즈버그 전투, 해방 선언 등으로 압축하여 서술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실상 주요 서사 바깥의 사건으로 취급된다. 일반적으로는 지역적 특이 사례, 주류에서 벗어난 반란, 혹은 주목받지 않는 내부 분열 정도로 간주되며, 중등 교육이나 SAT, AP 미국사 시험 등 표준화된 교육 범위에는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일부 지역 중심의 상세 교재나 대학 수준의 ‘미국 내전과 재건’ 수업에서는 간단히 언급되며, 뉴턴 나이트라는 인물 자체도 1990년대 이전까지는 학계에서조차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 해방사, 재건 시대, 남부 저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거치게 되는 사례이며, 특히 현대 역사학이 노예 해방을 단순한 제도의 종결이 아니라 해방 이후의 권력구조 재편까지 포괄하는 흐름으로 서사를 재구성하면서, 존스 자유주는 오히려 과거보다 현재 더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오랫동안 주류 역사에서 밀려났던 이유는, 남북전쟁을 북군의 도덕적 승리라는 단순한 구도로 정리하는 내러티브가 교육과정에 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며, 그 안에 남부 내부에서 남군에 반대한 백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서사에 균열을 만들기 때문에 쉽게 수용되지 않았다.

 

   존스 자유주 사건이 미국의 대중 역사 서술과 교육, 그리고 미디어 재현에서 지속적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단순한 지역적 특이 사례가 아니라, 미국 역사 서사의 구조적 구도를 위협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남북전쟁 서사는 오랜 기간 동안 ‘Lost Cause Narrative’라는 이름의 역사적 신화 구조를 통해 재생산되어 왔는데, 이 내러티브는 남군을 명예롭고 용감하지만 패배한 존재로 묘사하며, 남부 백인 사회의 도덕적 정당성과 문화적 자부심을 복원하려는 서술 전략이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는 남군이 남부 백인의 의지를 대표해야 하고, 북군은 외부로부터의 해방자로 기능해야 한다. 하지만 존스 자유주는 이 이분법을 근본부터 붕괴시킨다. 남부 백인이면서 남군에 반대했고, 흑인과 협력해 자치 공동체를 꾸렸으며, 심지어 무장 저항을 조직했다는 사실은 북과 남, 도덕과 타락, 해방자와 피해자라는 구도를 모두 무력화시킨다. 이처럼 서사의 안정성을 교란하는 사건은 국가 정체성 형성의 도구로 작동하는 교육과정에서는 쉽게 수용되지 않는다. 교육이 단지 사실 전달이 아니라 정체성 형성의 장치라면, 존스 자유주는 ‘기억되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 ‘불편해서 잊혀져야 할 이야기’로 밀려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건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실질적 대안 체계를 실험한 사례라는 점에서 그 위협 수준이 더 높다. 국가 권력의 틀 바깥에서 조직된 공동체가 인종, 계층, 출신을 넘어선 자치와 방어를 실현했다는 점은, 미국 민주주의가 제도 내부에서만 진화해왔다는 전통적 역사 서술을 뒤흔든다. 이 시각은 역사학자 마이클 로건(Michael W. Logue)의 분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존스 자유주를 “단지 남군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국가 서사 전체에 던지는 윤리적 반문”으로 해석한다. 결국 이 사건은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적 기억을 재정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만큼, 교육과 미디어 모두에서 통제되거나 안전하게 중립화된 방식으로만 다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요약하자면, 존스 자유주는 작아서 잊힌 사건이 아니라, 서사의 경계를 흔드는 존재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온 것이다.

Free State of Jones의 영역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백인 주인공이 흑인들을 구원하는 서사 구조, 이른바 '화이트 세이비어' 서사를 재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흑인 인물들의 시선이나 주체성보다 백인의 선택과 윤리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한계를 드러낸다는 평가다.

    영화가 다룬 뉴턴 나이트와 존스 카운티의 저항은 실제로 존재했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영화가 나이트를 지나치게 영웅화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 루디 H. 레버렛은 존스 카운티가 남부연합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영화적 연출이 역사적 사실을 과장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