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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가 증명한 것: 유럽의 보편 인류애는 새빨간 거짓말

napigonae 2025. 5. 27. 01:53

슈바이처 생애, 활동 나무위키

 

알베르트 슈바이처

"Mein Leben trägt seinen Sinn in sich selber. Er liegt darin, da

namu.wiki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에 생애는 몰라도 이름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드물다. 그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는 부분이 상당히 놀라웠고, 왜 유럽에서 잊혀졌는지도 궁금해졌다. 인종차별, 또는 편견이 있었는가? 잔인한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함구 했는가? 자기만족 백인구원서사인가? 는 가장 뒤로 미루고 다른 문제들부터 짚어 보고 왜 역사에서 서서히 잊혀졌는지 알아보자.

병원 시설이 열악했다.

  가봉의 랑바레네(Lambaréné)는  2025년 현재도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지역이다. 슈바이처가 1913년 병원 가건물을 처음 세웠을 시기는 1차세계대전 직전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에서 그를 도와준 이는 부인 헬렌 슈바이처(Helene Schweitzer) 뿐이었다. 이후로 기부금을 받고 여러 단기 의료인, 선교사들이 도와주었지만 환자들에게 제공할 식사도 항상 넉넉치 않았고, 슈바이처와 부인도 같은 환자식을 먹었다. 기부금 사용이 투명하지 않다는건 현지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오지 활동에서 비용 대부분은 운송비, 식비, 인건비로 지출되기 마련이다. 슈바이처는 건물이나 환경 조성보다 한 사람의 환자를 더 돌보기 원했다.

 

   이런 비판은 테레사 수녀도 받았다. 병원 시설이 열약하고 의료 서비스가 형편없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의 병원은 치료 목적의 병원이라기 보다는 '임종'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 장소에 가까운 병원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슈바이처의 병원 역시 그 목적이 종합병원이 아니라 현지인 접근성을 염두에 둔 병원이다. 재정 상황도 안 좋았지만 당시 현대식 병원건물은 현지인들에게 '비싼 비용'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상이라는 점도 반영 해야한다.

병원 운영이 너무 권위주의적이었다.

   원래 병원은 권위적이다. 환자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으면 치료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슈바이처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을 염려하여, 병원 운영, 자금 조달, 의약품 관리, 식자재 관리, 건물 유지 보수, 현지 문제 중재까지 맡아서 해결해야 했다. 현지 고용인은 통제가 되지 않았고, 숙달될 정도로 훈련이 되면 이탈하기 일쑤였다. 혼자서 진단, 처방, 간호까지 해결해야되는 상황에서는 효율성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가 권위적이었다면 병원 기강을 유지하는데 권위적 자세를 보이기 보다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웠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다. 예배 공간은 있었지만 자율적이었고, 종교가 다르다 하여 차별하거나 치료 거부도 하지 않았다. 슈바이처의 권위적인 모습은 통제하기 위한 권위가 아니라 최선의 치료를 하기 위한 현실적 방침이었다.

https://www.history.com/this-day-in-history/january-14/albert-schweitzer-born

후학 양성을 하지 않았다.

   슈바이처는 의사로 활동하는 의료인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슈바이처는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다. 실제 그는 현지인을 간호사로서 교육하고 상당 수준까지 끌어올려 자신이 모두 하던 일 중 일부를 덜어내기도 했다. 통역사가 있었는지 여부, 당시 독어, 불어를 사용하며 교육했어야 하는 상황, 이런 저런 이유로 이탈하는 교육 대상자까지 슈바이처에겐 고통이었다.

 

   또한 그는 교육자가 아니다.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제대로된 교육과 의사, 간호사 양성까지 제대로 해내라 요구하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의 무의미한 요구다. 후학 양성을 위해서 갔다면 병원이 아니라 학교를 지었어야 한다. 일부 현지인들을 교육하여 실무 간호사로 육성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https://abc-climont.eu/spes/

더 많은 조력자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다.

   슈바이처의 병원은 파리 선교회(Mission de Paris)의 지원으로 시작되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 식민지 가봉에서 활동하던 슈바이처는 적성국 사람으로 억류되었고 선교회의 지원도 끊겼다. 이 상황에서 오지 병원에서 무급으로 일할 사람을 구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슈바이처는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강연과 연주를 하며 모금활동을 벌였다. 물론 자신의 조력자를 찾는데도 열심이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딸에게도 가봉 현지에서 활동하라고 권유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과 연관없는 이들에게 알지도 못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어디간에서 무급으로 일해주길 바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로 자발적으로 몇몇 의료인들과 선교사들이 슈바이처의 병원을 찾기도 했지만 단기적이었고, 대부분은 건강이나 커리어의 이유를 들어 떠났다.

의학자로서 연구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신학, 철학을 공부하고 선교사로 파견 나가기 위해 의학 공부를 했다. 즉, 선교사로서 의료 면허를 취득한 것이다. 그의 개인 목적은 종교적 이유에 가깝지만 선교회의 목적에 따라 병원을 개설한 것이다. 그는 '예수에 대한 정신의학적 평가: 서술과 비판(Die psychiatrische Beurteilung Jesu: Darstellung und Kritik)'이라는 논문으로 의학 박사를 취득했다. 내용은 당시 예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학계의 접근이 있었는데, 이를 비판한 내용이다. 그의 신학적, 철학적, 종교적, 신앙적 견해가 의학 논문에 반영된 셈이다. 슈바이처는 의학적 성과 의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혹시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적 어려움이 그 욕구를 차단했을 것이다.

 

   슈바이처를 비판함에 있어서 의학적 성과를 말하는 것은 그의 목적을 오도했기 때문에 발생한 무분불별한 비판일 뿐이다. 의학적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가봉 현지의 문화인류학적 접근, WHO와 국경 없는 의사회의 오지 병원 운영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가장 중요한 윤적 의료 실천을 했다는 사실이다.  

https://www.dw.com/en/albert-schweitzer-and-his-controversial-legacy/a-71292959

인종차별, 또는 편견이 있었나?

"The African is indeed my brother, but my junior brother."

아프리카인은 내 형제가 확실하고, 나의 어린 형제다.
"With regard to the Negroes, I have coined the formula: ‘I am your brother, it is true, but your elder brother.'"

나는 흑인에 대해 이런 공식을 만들었다. '나는 너희들의 형제다. 진실이다. 하지만 난 너희의 형이다'

- Albert Schweitzer, On the Edge of the Primeval Forest(1922)

 

   슈바이처는 19c-20c 지식인으로 당시 유럽은 식민주의, 제국주의, 사회진화론이 진실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보편 인류애를 언급하는 것은 급진적이고, 학문적-정치적으로도 용인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너의 형제지만, 형님이다"라는 표현은 당시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진보적 인류애 표현이다. 반대로 동생된 입장에서 평생을 오지 의료 봉사를 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슈바이처를 비판해도 된다.

 

   슈바이처에게만 유독 당시 유럽인이 가지고 있지 않던 보편 인류애를 가지고 완전 평등한 시각으로 원주민을 바라보라고 주장하는건 타당성이 없다. 이런 관점은 사후 해석에 불과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리더로서 책임자로서 병원장으로서 책임자였다는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키플링(Rudyard Kipling)의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이란 맥락에서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슈바이처가 계몽주의 관점에서 인종적 우월함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당시 시대적 산물로서 본다면 그다지 문제될게 없다. 유난히 슈바이처에게만 돌출된 평등사상이 없었다고 비판하는게 도리어 평등주의에 어긋난다.

 

"The African staff were rarely given positions of significant responsibility."

"아프리카인 직원들은 중요 책임자로 임명되지 않았다."

- George N. Appell, Albert Schweitzer's Legacy for Africa(1975)

 

   이미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로 대응이 된다. 슈바이처는 병원장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었고, 초기에는 언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후 실질적 업무를 분담할 수 있는 수준의 간호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그는 병원을 개설한 것이지 학교를 개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육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다. 중요 직책, 책임자라는건 어떤걸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비판만 한다.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도 그저 간호사였다. 현지인 조력자 음퐁그웨(Mpongwe)의 조셉(Joseph)는 병원의 많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엠마 하우스네히트(Emma Haussknecht), 마리안 슈토커(Marianne Stocker), 헤드비히 슈네(Hedwig Schnee), 헬렌 로젠브루크(Hélène Rosenberg)은 간호사, 약제사, 물류 담당 등의 일을 했다. 병원에서 현지인에게 중요 직책을 맡가지 않았다는건 비판 받을 일이 아니다. 상황 고려를 하지 않은 쓸데없는 평등주의가 발동한 것일 뿐이다.

 

"Many African workers were kept in subservient roles, tasked with manual labor rather than trained for medical or administrative positions, reflecting a lack of trust or interest in their advancement."

많은 아프리카 노동자들은 복종적인 역할에 머물렀고, 의료나 행정 업무로 훈련되기보다는 단순 노동을 맡았다. 이는 그들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신뢰나 관심이 부족했음을 반영한다.

- Richard West, River of Tears: The Rise of the Third World(1972)

 

   위의 주장과 반복되는 비판이다. 복종적 역할에 머무르는 현지인도 소수다. 대부분은 통제 밖에 있었다. 마을에서 일어난 대소사도 슈바이처가 중재를 해야할 지경이었다. 의료는 현지인 간호사 미팽부 소피(Mipimbou Sophie)가 행정업무는 조셉(Joseph)이 대부분 맡았다. 이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언급이 전혀 없다?

   슈바이처는 의사로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굳이 해야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언급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가봉의 프랑스 식민 정부로부터 어떠한 간섭이나 보호를 받지 않고 독립적 병원 유지를 위해 거리를 두고 있었다.

 

"Ich habe mit Schmerz gesehen, wie die Verwaltung die Eingeborenen behandelt - mit Gleichgültigkeit und oft mit offenem Verachtung.“

나는 고통을 느끼며 보았다, 행정(공무원)이 무관심과 경멸로 원주민들 대하는 것을 보았다.

- Albert Schweitzer, Zwischen Wasser und Urwald(1921)

 

"Für viele Beamte sind die Afrikaner bloß Werkzeuge, keine Menschen. Die Verwendung der Peitsche im öffentlichen Dienst ist untragbar"

공무원들에게 아프리카인들은 도구다, 인간이 아니다. 행정 업무에서 채찍의 사용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 Albert Schweitzer, Briefe aus Lambarene(1923)

 

"Die Verwaltung versteht nicht, was das Volk braucht. Es ist leichter für sie, Befehle zu geben, als zuzuhören. Es ist eine Tragödie, dass wir ein Volk regieren und doch so wenig über es wissen."

행정은 그 원주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원주민들에게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쉽다. 우리(유럽인들)가 한 원주민을 통치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비극이다.

- Albert Schweitzer, Aus meinem Leben und Denken(1931)

 

   이 저작물들을 보면 그가 체제에 대해 깊은 고민과 통탄을 했던 흔적이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현지의 잔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에 처우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일개 독일 의사가 프랑스 식민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Ehrfurcht vor dem Leben)' 사상을 '문명과 윤리(Die Kulturphilosophie)'에서 '내 생애와 사상에서(Aus meinem Leben und Denken' 등의 저서에 등장시킨다. '생명에 대한 경외'의 핵심은 '생명 앞에서 인간은 우위에 있지 않고, 하나의 생명으로서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서 이미 당시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 인류애를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고 방식을 제국주의 비판으로 보지 않겠다는건 슈바이처의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태도가 된다.

 

   슈바이처가 당시 식민주의, 제국주의를 비판했다면 사회적으로 매장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이 끊어졌을 것이다. 오지 병원장이 자신의 병원 유지도 바쁜데 이런 사상적, 정치적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전혀 없다.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는 인종차별에 대해 함구하면서 슈바이처에게 현대식 윤리기준을 들이미는 것은 과도한 자기 과시적 비판일 뿐이다.

https://www.truebookaddict.com/2019/01/catthursday-authors-and-cats-80-albert.html

백인 구원 서사(White Savior)이라는 비판

   슈바이처가 종종 유럽으로 돌아와 강연과 연주회를 하며 자기 과시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병원 재정이 악화될 경우에 소위 '돈벌기'를 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자기 과시나 서사 소비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는 자신의 수익을 모두 병원 재정에 쏟아 부었다.

 

   그는 인종적 편견이나 우월감이 아예 없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인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한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생명에 대한 경외'를 비춰봐도 모든 생명에 대해 수평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일생에서 자신의 행동을 내세우고 자랑했던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백인 구원 서사를 들먹이며 슈바이처를 공격하는 것은 백인 전체가 아무런 윤리적 구호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모순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백인들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테두리에 가두는 위험한 가정을 하는 셈이 된다. 백인 구원 서사는 슈바이처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시각에서 발생한 후천적 사후 평가다.

 

   가봉의 오지에서 그는 원주민들에게 혜택을 주거나 나누는 입장이 아니라 함께 살고 고통을 나누는 삶을 선택했다. 그가 노벨상을 받기까지 40년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인 구원 서사를 입에 담는 것은 큰 실례다. 그가 종교적 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분신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해서 어떤 기독교적 메시지 전파에 힘쓴 적도 없고, 자신이 백인으로서 어떤 우월성을 내세운적도 없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이후로 20세까지 발전하지 않은 유럽의 보편 인류애

   카사스 이후의 유럽 철학과 사상들은 항상 '보편'을 추구했지만, 이 보편은 극히 협소한 유럽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이니 자유를 떠들었지만 非유럽인은 예외였다. 非유럽인은 미개한 인간, 문명화가 필요한 인간으로 지배나 착취를 합리화시켰다. 유럽 사상가들에게 인류애는 우월함을 기반으로 한다.

 

   유럽이 신대륙과 아프리카, 아시아로 자신의 힘을 뻗치면서 동시에 '인류애' 개념을 도덕적 상품이나 아름다운 이상처럼 포장했다. 지배, 정복, 착취하면서 문명화는 유럽인들의 사명,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으로 자기 위안을 삼았다. 면죄부 좋아하던 이들답게 자신들의 정복과 착취 역시 '보편'이란 말로 포장한 '인류애'를 들먹이며 자기 만족으로 삼았을 뿐이다.

 

   중세에서 20세기까지 과연 그 많은 학자들이 보편 인류애를 몰랐을리 없다. 그들은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외면해야만 했다. '非유럽인도 인간인가' 라는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는 순간 유럽의 문명이 저지른 약탈, 착취, 강제 노동, 인권 유린, 납치, 살인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라스 카사스의 바야돌리드 논쟁 포스트

 

바야돌리드 논쟁; 인간 존엄성을 묻는 최초의 윤리 논쟁

바야돌리드 논쟁(Valladolid Debate)의 원인인터 카테라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까지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직후, 스페인 왕실은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에게 새 땅의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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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상가들의 보편 인류애 주장의 한계

사상가 보편 인류애 언급 여부 보편 인류애 언급 방식 (요약)
결함 또는 비판 포인트
몽테뉴
(Montaigne)
부분적 인간 조건에 대한 공감과 관용을 주장,
문화적 편견 시각
非유럽권에 대한 무지,
제한적 관용
루소
(Rousseau)
자연상태의 평등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평등,
여성·非유럽인은 제외
여성 배제,
非유럽인 무시
볼테르
(Voltaire)
자유 옹호,
인권 언급
종교 관용과 자유를 옹호,
아프리카 노예제에 대해선 모순된 입장.
노예제 옹호,
인종 차별적 언급
몽테스키외
(Montesquieu)
법의 지배와 자유 법과 제도에 보편 원리를 적용,
식민지 문제는 논외
식민지 문제에 침묵,
유럽 질서 강조
칸트
(Immanuel Kant)
보편적 인간 존엄 인간은 목적 그 자체라며 존엄 강조,
인종 위계론 주장.
백인 중심 이성주의,
인종 위계 존재
헤겔
(Friedrich Hegel)
세계정신,
인류사 강조
세계사 발전은 유럽 중심 보편성을 전제,
非유럽은 미성숙 단계
아프리카는 역사 없는 대륙
니체
(Friedrich Nietzsche)
보편 거부,
인간 불신
보편적 인간을 부정,
위계와 강자의 윤리 주장
비관주의, 위계주의 인간관,
차별 정당화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자유주의적 평등 개인 자유와 평등을 강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정당화 발언
인도 식민지 옹호,
영국 제국주의 정당화 발언
디드로
(Denis Diderot)
백과전서파로 보편 지식 추구 지식의 보편화를 추구,
非유럽는 논외
유럽 문명만이 보편,
식민주의 상황 외면

학자들은 모두 시대적 산물로 한계를 가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카사스와 존 브라운(John Brown)이라는 보편 인류애를 주장한 인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한계 설정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대 기준 운운하는 것은 책임 회피 주장이 될 뿐이다. 사실상 중세에서 20c 까지 이어지는 철학적 보편 인류애는 허상이다

 

   학자들이기에 현실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반영이 되기 어려웠다는 주장은 스스로 모든 철학 사조가 무의미 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는 많은 철학자, 신학자들의 주장이 정치와 정책에 반영이 되었다. 당시 철학자들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 끊임없이 고위 관리, 황실과 접촉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네임드 철학자의 주장은 충분히 반영 됐다.

 

   미성숙 보편 인류애는 후대에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는 주장 역시 카사스라는 인물에서 반박이 된다. 카사스 이후로 3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한 치도 발전하지 않았다. 미성숙이 아니라 성숙이란 말이 아예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카사스의 보편 인류애 주장 이후 노예제가 사라지는데 300년이 걸렸다. 미성숙일까? 외면일까?

 

    실천 정치, 이데올로기를 다룬게 아니라 학문적 접근이었는 주장에 대해서, 19세기 후반 '철학의 황금기', '절정에 도달한 과학', '우생학', '인종학'이라는 자기 맹신에 빠지기도 했다. 즉 학문적 주장이 아니라 현실에서 반영되고 직접 투영되었다. 이 주장 역시 책임회피 일 뿐이다.

슈바이처는 왜 유럽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나?

   시대 흐름에 잊혀진 것이 아니다. 슈바이처는 '전통 유럽 문명인'이었다. 그는 그 능력을 아프리카 오지에서 원주민에게 썼다. 이 방식은 그 동안 유럽이 내세운 성공 모델과 부합하지 않았다. 非유럽에서 무언가 가져와 유럽을 부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로 유럽이 자랑하는 문명은 겉만 번지르르 했지 사실상 인류애를 무시하는 폭력과 억압을 투사해왔다. 슈바이처는 유럽이 행해온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조용히 비판했다. 중요한 것은 그는 백인으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유럽 문명과 다른 정의를 행했던 것이다.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개종시키지도 않았고, 정복하지도 않았다.

 

   현대 유럽은 백인 구원 서사, 비위생적 환경의 병원, 제국주의 비판이 없었고, 인종적 편견을 가졌다는 여러 말도 안되는 이유로 슈바이처를 비판한다. 유럽이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자신들위 위대함과 자기자랑을 해야하는데 슈바이처는 걸림돌이다. 슈바이처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근대 철학자들과 한통속이다.

자기 정당화만 하는 유럽 철학과 역사를 비판하다

  프란츠 파농 (Frantz Fanon)은 유럽 철학과 역사를 식민 권력의 산물로 보았다. 식민주의는 인간을 파괴하고, 언어와 문화도 식민지화 한다는 것이다. 유럽 문명은 보편 인류애는 말하면서 非유럽권의 식민주의를 체계화하고 정치화한 폭력의 산물이라 정의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는 유럽 문명이 아시아에 대한 표현 방식이 자기들 언어로 쓰여진 정당화 언어라 말한다. 유럽의 아시아 지배와 정복은 당연한 것이고 역사와 철학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이미 작동시키고 있었다. 아시아는 유럽문명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한 비교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엔리케 두셀 (Enrique Dussel)은 유럽 역사에서 근대의 출발은 신대륙 발견 이후 벌어진 폭력과 수탈의 시작과 일치한다고 본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본질과 이성을 말하지만 동시에 식민지 정복과 수탈을 해야했기 때문에 원주민을 철저하게 배제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식민지는 영원한 미성숙으로 남아야만 유럽 문명이 정당화 된다.

 

   알베르 멤미 (Albert Memmi)는 유럽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이성이 식민 지배와 모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위선자라고 지적한다. 동시에 자신들의 윤리적 존재여야 하기 때문에 거짓이나 편협한 보편주의, 축소된 윤리관을 끊임없이 탄생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1930년대부터 바흐의 곡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실제 교회 현장 녹음을 통해 음의 잔향과 음향효과를 녹음하려고 하였다.
설치한 마이크의 거리를 다르게 하여 고음과 저음의 균형을 맞추려는 오디오 엔지니어링을 시도했다.

 

The Organ Music of J.S. Bach played by Albert Schweitzer 전곡을 들어볼 수 있다.

 

슈바이처는 랑바레네 병원 근처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해골들을 연구 목적으로 보관했다.
이것이 외부인에게 노출되며 한때 ‘아프리카인 해골 수집’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조사 결과, 이는 의학 연구 목적의 해부학적 표본이었고, 그 중 일부는 유럽에서 가져온 비교 표본이었다.

 

간디가 1931년 런던 라운드 테이블 회의 직후, 슈바이처에게 인도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정치 나의 분야가 아니며, 인간 생명의 고통과 존엄만이 나의 관심사”라고 답변.
슈바이처는 정치적 개입을 거절했다.

 

1930년대 중반, 슈바이처는 나치 독일의 감시 대상 인물 중 하나였다.
독일 국내에서는 그가 反민족주의자라는 혐의로 비난을 받았고, 그가 독일 내 강연을 중단한 것도 이 시기.

https://www.truebookaddict.com/2019/01/catthursday-authors-and-cats-80-albert.html

슈바이처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 방법은 음악과 고양이다." 란 말을 남겼다.
고양이 이름은 시지(Sizi)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