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내 개 같이, 가나안 여인에게 욕한 예수?
‘쿠나리온’이라는 단어의 특이성
‘쿠나리온(κυνάριον)’이라는 단어는 신약 성서 전체에서 단 두 번, 그것도 동일한 일화를 공유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등장한다. 하지만 맥락상 이 두 번 사용된 이 단어는 사실상 한 번의 전승에 등장한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는 병든 딸을 고쳐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요청에 응답하며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개’가 바로 ‘쿠나리온’이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개를 뜻하는 일반적인 표현은 ‘쿠온(κύων)’이며, 이는 야생적이고 부정한 동물을 가리킨다. 반면 ‘쿠나리온’은 그 축소형으로, 집에서 기르는 작은 개, 즉 반려동물을 의미한다고 해석되곤 한다.
신학계나 교회는 이 차이를 근거로 예수의 발언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예수가 이방인을 모욕하려 한 것이 아니라 시험하려 한 것이다” 혹은 “작은 개라 함은 가족 안에서 먹을 것을 기다리는 존재이므로, 배제보다는 포함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 문화권에서 ‘개’라는 존재가 가지는 상징성과, 이 단어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어떤 뉘앙스로 사용되어왔는지를 간과하거나 축소해버리는 측면이 있다.

구약에서 ‘개’는 일관되게 부정적 이미지로 등장한다. 신명기 23장에서는 창녀의 삯과 함께 개의 삯, 곧 남창(남자 창기)의 돈을 하나님의 성전에 바치는 것을 금하며, 개는 타락과 정결하지 못함의 대명사로 취급된다. 시편과 이사야서에서도 개는 야비하고 더러운 존재, 인간의 적, 혹은 시체를 파먹는 동물로 등장한다. 신약에서도 개는 성물과 대비되며, 진주를 던질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은 그 자체로 경멸을 담고 있다. 즉, '작은 죄인', '작은 도둑놈', '작은 강도'로서 은유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무리다. 이미 이전의 대화에서 제자들은 여인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은유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작은 어떤 것'을 붙여서 타일렀을 가능성이 없다. 그것도 직접 예수에게 돌려 보내 달라 부탁을 했다는건 이미 좋은 의미에서 은유는 성립하지 않고, 도리어 말 장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쿠나리온’이 단순히 축소형이란 이유만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될 수는 없다. ‘작은 개’는 ‘덜 더럽다’는 것이지, ‘깨끗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향한 말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가나안 여인을 포함한 이방인은 이미 유대적 정결법 바깥의 존재였고, 개라는 비유는 이러한 타자화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더 나아가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도 사람에게 ‘개’라는 표현을 써서 친근함을 나타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 근동 지역 모두에서 개는 충직함과는 별개로 혐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쓰였다. 반려동물로 키우는 전통이 있었다 해도, 사람에게 ‘너는 나의 개 같다’는 식의 표현은 예외 없이 무례한 말로 간주되었다. 유일하게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자신을 ‘개 철학자’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자기를 사회 규범 밖에 놓는 조롱과 저항의 선언이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당시 ‘개’라는 단어는 절대로 긍정적이거나 포용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유대인 신약학자인 에이미-질 레빈(Amy-Jill Levine)은 『Short Stories by Jesus』에서 이 발언을 “‘이방인 여성’에게 던진 모욕적 언사”로 분명히 규정한다. 그녀는 ‘쿠나리온’이 축소형이라 할지라도, 개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인간 사회에서 가장 낮고 부정한 존재를 지칭해온 역사를 지녔으며, 예수가 그것을 썼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 사회의 혐오 구도를 되짚게 만든다고 본다. 예수가 시험하려 했다는 식의 해석은 그 맥락을 흐리는 방식이라는 것이 그녀의 지적이다.
엘리자베스 셰플리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는 페미니스트 성서학의 관점에서 이 본문을 분석하면서, 이 장면에서 예수는 단순히 여인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예수가 의도했든 아니든, ‘쿠나리온’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여성을, 그것도 이방인 여성을 하위 계층에 고정하는 언어이며, 이 여인이 이를 받아치며 반전을 이루는 장면은 오히려 여성 주체의 말하기가 위계 구조를 뚫는 상징이라고 해석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탈식민 신학자 무사 드루리(Musa Dube)도 이 구절을 예수의 발언이 “제국적 권력과 민족주의적 경계 설정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전환점”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장면에서 예수는 명백히 경멸의 언어를 썼으며, 가나안 여인의 응답은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탈식민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즉, 그녀는 억압 구조 안에서 반응하는 객체가 아니라, 그 구조를 말로 흔드는 능동적 행위자라는 것이다.
목회자이자 성서학자인 마크 D. 데이비스(Mark D. Davis)도 자신의 공개 설교에서 이 장면을 분석하며, 예수의 말은 “정중하지 않았고, 그 어떤 문화적 완곡어로도 희석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 발언이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 특히 문화적으로 형성된 편견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으며, 바로 이 대화 속에서 예수가 자신의 선민 중심적 사역을 넘어서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완곡한 표현으로서의 한계, 역사적 배경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단어의 어형만을 근거로 삼아 본문에 깔린 권력 구조와 사회적 낙인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측면이 있다. 예수가 한 말이 ‘쿠온’이 아닌 ‘쿠나리온’이었다 해도, 이방인을 개로 비유한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덜 거칠고 약간은 완곡한 표현일 뿐, 명백한 경멸의 뉘앙스를 내포한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사용된 대상이 ‘가나안 여인’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이 여인은 단순한 외지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적, 민족적 금기를 상징적으로 건드리는 존재였다.
가나안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지리적 호칭이 아니다. 구약 전통에서 가나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이자, 동시에 정복되어야 할 타자의 땅이었다. 여호수아 시대의 가나안 정복은 군사적 승리를 넘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정결 전쟁’(Holy War)으로 간주되었고, 가나안 사람들은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타락한 성의례를 행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단지 다른 신을 믿는 이방인이 아니라, 윤리적 타락과 신앙적 혼란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포로기 이후 더욱 강화된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대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혼합’을 철저히 금기시했다. 그 기초가 된 것이 바로 레위기 19장 19절이다. “두 종류의 짐승을 교합시키지 말며, 두 종자의 씨를 너희 밭에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짠 옷을 입지 말라.” 이는 단순한 농업 규범이 아니라, 모든 ‘섞임’에 대한 상징적 거부 선언이었다. 여기서 ‘피를 섞지 말라’는 규정은 명시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제사장 계열에 대해서는 레위기 21장 14절에서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아내로 삼으라”고 하며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금지했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를 민족 전체에 적용해 외국 여성과의 결혼을 단죄했다.
결국 ‘혼혈’과 ‘혼합’은 단지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적 배반과 정체성의 타락으로 간주되었다. 가나안 여인은 이 모든 금기를 내포한 존재였다. 그녀는 이방인이며, 정결법 밖의 존재이고, 유대 공동체 안에 흡수되어선 안 될 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가 그녀를 향해 ‘쿠나리온’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축소형 표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율법 전통과 사회적 경계의 언어를 반복한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말 한마디에는, 레위기의 율법적 금기, 포로기 이후 공동체 재건의 배타적 기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정결’ 담론이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가나안 여인은 어느 누구의 이웃도 아니었다. 율법이 금지한 혼합의 구체적인 실체이자, 유대인이면 반드시 배척해야 할 존재였고, ‘쿠나리온’이라는 표현은 그 낙인을 그대로 드러낸 단어였다. 예수가 그녀의 말을 듣고 기적을 베풀기까지, 이 표현이 그녀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어떤 무게로 작동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이 일화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데 중요하다.
여인의 응답, 무뎌진 감각과 절박한 목적
가나안 여인은 경멸적 표현을 직접 듣는다. 예수는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했고, 이때 ‘개’라는 단어는 단순한 동물 비유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장 아래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에 대해 즉각적인 반발이나 감정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대화를 이끄는 위치로 전환해간다. 이 반응은 매우 계산된 태도이자, 철저히 감정을 절제한 언어 선택이며, 단순한 겸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장면은 자주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나 ‘겸손한 지혜’로 해석되지만, 그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그녀가 그러한 말들을 이전에도 충분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들어왔다는 전제다. ‘쿠나리온’이라는 말에 상처받기보다 오히려 그것에 덧붙여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말이 그녀에게 새로운 모욕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이미 ‘개’로 불리는 일에 익숙했고, 그러한 멸시와 비하가 일상처럼 반복되어 온 사람이다. 그 말은 그녀의 귀에 더 이상 낯선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언제든 되받아칠 수 있는 말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그녀가 이미 그와 같은 언어를 무수히 겪었고, 거기에 대응하는 감정과 말의 패턴까지 내면화했음을 뜻한다.
이 점에서 그녀의 대답은 임기응변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 위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배운 결과다. 그녀는 단순히 겸손해서가 아니라, 오랜 모욕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상황에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오히려 자녀를 위한 목적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욕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배경 소음처럼 흘러갔고, 그 안에서도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말과 전략만을 선별하여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 장면의 정서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여인은 지금 자신이 개로 불리는 것에 대한 수치를 감추거나 억누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삼지 않을 만큼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모욕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자신의 딸이 살아나는 일이다. 자녀의 건강, 회복, 생존을 위한 목적 앞에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불리든, 어떤 위치로 취급되든 그것은 잠시 무시해도 될 사소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어머니로서의 본능, 생명을 위한 직관은 경멸의 언어를 넘어서기 위한 이성적 판단보다 더 앞서 작동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강인함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구조적인 멸시 속에서 길러진 생존의 기술이자, 사회적 위치에 내재된 언어적 감내의 한 형태다. 그녀가 말한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표현은 구걸이 아니라 현실 인식이고, 어떤 것도 허투루 거절하지 않겠다는 생의 의지다.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법을 아는 자의 응답이다. 경멸이 그녀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나안 여인의 이 짧은 한마디는, 단순한 신앙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경멸받아온 이방인 여성이 자신과 자신의 자식을 위해 축적해 온 ‘말의 기술’이고, 동시에 '상처에 무뎌진 감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조차도 잠시 멈추게 만든 응답이었다. 이 장면에서 예수가 감탄한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이 어떤 사회적 조건을 뚫고 나온 것인지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여인은 혐오를 무릅쓰고, 자기 존재의 경계 바깥에서 끝내 중심에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 말은, 부스러기처럼 보였지만 그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가나안 여인 이야기의 재해석: 믿음이 아닌 어미의 사랑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에서 전통적으로 강조되는 주제는 그녀의 믿음이다. 예수가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응답하며 딸을 고쳐주는 장면은 신앙의 모범처럼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 구절을 둘러싼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믿음’만으로 이 장면을 축소하는 것은 오히려 본문이 담고 있는 인간적, 사회적 긴장을 흐릿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신앙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교훈이 아니라, 유대 공동체가 안고 있던 위선과 모순, 그리고 어미의 절박함이 어떻게 신앙과 권위를 넘어서는지를 드러낸 장면이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다양한 종파가 서로 율법 해석과 정결 규례, 메시아 대망 등을 두고 충돌했고, 각 집단은 ‘순수성’을 주장하며 타인을 배제하고 낙인찍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나안 여인’은 가장 바깥,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존재였다. 이방인이며, 혼혈의 상징이고, 율법을 따르지 않는 여인이며, 여성이라는 이유로도 이중의 사회적 제약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예수에게 다가왔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노골적인 귀찮음이었다. 그들은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니 보내버리십시오”라고 말하며, 그녀의 존재를 방해물로 취급한다. 이는 그들이 그녀의 요청에 어떤 동정이나 관심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첫 반응 역시 배타적이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그녀를 대상으로 기적이나 긍휼을 베풀 의향이 없다는 분명한 선 긋기였다. 그 뒤이어 ‘개’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면서, 그녀는 말 그대로 공동체가 규정한 가장 바깥의 타자가 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여인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응수한다. 이 응답은 그저 겸손하거나 영리한 언어의 사용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어미로서 딸을 살리려는 본능이 자리잡고 있으며, 수많은 멸시와 거절을 견뎌낸 인내와 생존의 언어가 들어 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종교적 교리에 입각한 믿음이라기보다, 자식을 위한 모든 모욕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모성의 감각이다.
이 가나안 여인은 한 마디의 언어와 침묵 속 인내로 예수로부터 직접 기적을 이끌어낸 유일한 외부인이다. 제자들은 예수와 가까이 있었지만, 여인은 그 모든 경계를 넘고 들어왔다. 그들이 귀찮다고 느꼈던 여인은, 바로 그 집단이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한 셈이다. 예수가 “너의 믿음이 크다”고 말했을 때, 그 믿음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이나 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인간으로서의 근원적 관계, 즉 어미와 자식 사이의 절박한 연결에서 나오는 본능적 확신에 가까웠다. 자식이 고통받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감정, 어떤 수치와 모욕도 감내하겠다는 각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배제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매달리는 어미의 직감이 그 말 한마디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의 핵심은 결국 예수도 그 감정을 외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신앙의 위대함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사랑의 절박함이, 정의롭고 선하다고 여겨졌던 제자들의 태도보다도 더 깊이 예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어떤 신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고,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유대 공동체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그 모든 경계를 통과했고, 모욕을 견뎠으며, 끝내 기적을 얻어냈다.
권력의 언어와 그 의미
예수가 사용한 '쿠나리온'은 축소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완곡어법이 될 수 없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개'는 가장 부정한 존재의 상징이었으며,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틀어 일관되게 경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 표현이 '가나안 여인'을 향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가나안인은 유대 전통에서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타자'로 간주되었다. 유대인들에게 가나안은 정복해야 할 땅이자, 유대 정체성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혼합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발언은 당대 사회가 가진 인종적·종교적 위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신학자 에이미-질 레빈이 지적하듯, 이는 "'이방인 여성'에게 던진 모욕적 언사"였으며, 피오렌자의 분석처럼 "권력의 언어"였다. 예수의 태도는 제자들이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니 보내버리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침묵으로 동조한 점, 그리고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직접적으로 거절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예수조차도 초기에는 자신의 사역을 유대적 경계 안에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나안 여인의 응답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는 단순한 겸손이나 신앙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오랜 시간 사회적 모욕에 노출되어 그것에 대응하는 방식을 체화한 사람의 말이다. 그녀는 '개'라는 표현에 새롭게 상처받지 않았다. 그 호칭은 이미 그녀가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것이기에, 그것을 되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사회적 주변인으로서 축적해온 '생존의 언어'였으며, 동시에 딸을 살리려는 어미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전략적 응답이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신학적 교리에 기반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자식을 위해 어떤 모욕도 견딜 수 있는 모성의 강인함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존엄성의 회복이 아니라 딸의 치유였다.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표현은 구걸이 아닌 생존을 위한 현실적 인식이며,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겠다는 생의 의지였다. 하지만 이게 핵심이 아니다.
진정한 체다카의 회복
당대 유대 사회의 분열과 위선, 율법적 순수성의 강조 속에서, 가장 바깥에 위치한 이방 여인이 오히려 예수의 사역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제자들조차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 여인은 자신의 절실함과 지혜로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의 인식적 한계를 돌아보고 넘어서는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이 이야기는 종교적 경계, 민족적 편견, 성별의 위계가 얽힌 복합적인 상황에서, 한 인간의 절박한 외침이 어떻게 권위자의 인식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결국 진정한 신앙은 교리적 순수성이나 공동체의 경계 유지가 아닌, 모든 인간적 장벽을 넘어서는 사랑과 포용의 확장에 있음을 이 일화는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라" 이 모든 가르침은 예수가 산상수훈과 여러 가르침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한 윤리적 핵심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기존 율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급진적 포용과 사랑을 설파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 앞에서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쿠나리온(κυνάριο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했을 때, 예수는 스스로 가르친 보편적 사랑과 이웃 개념의 확장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시험이나 전략적 발언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내면화된 유대 중심주의가 순간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체다카(צדקה)'는 그 순간 유대 공동체 내부로 축소되어 있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예수의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자신의 모순을 깨닫는 순간의 표현이었다. 이는 자신이 가르친 바와 행동한 바 사이의 불일치를 인식하는 자기 성찰의 순간이었다. 예수는 가나안 여인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이 유대 공동체라는 제한된 원 안에 갇혀 있었음을 직면하게 되었다. 이 장면은 예수가 자신의 민족적 한계를 넘어서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초기 발언에서, 여인의 딸을 치유하는 행동으로의 변화는 그의 사역이 진정한 보편성을 향해 확장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체다카는 유대 공동체의 좁은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 자비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인 이웃 사랑, 원수 사랑, 보편적 자비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역설적으로 한 이방 여인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예수에게 진정한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질문했고, 예수는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보편적인 것인지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이 만남 이후 예수의 사역은 더욱 명확하게 민족적,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백부장의 종 치유, 로마 병사들을 위한 기도 등은 이 전환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에게 그가 스스로 세운 윤리적 기준을 다시 상기시켜 준 인물이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종교적 지도자도 문화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인간적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모순을 직면하고 넘어설 수 있는 자기 성찰의 용기다. 예수는 가나안 여인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진정한 혁명성—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무조건적 사랑과 포용—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체다카'는 민족적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적 정의와 자비의 원칙으로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