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솔라리스, Solaris, 1972, 2002

napigonae 2025. 4. 11. 02:56

 

   2002년 솔라리스(Solaris)는 1972년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의 동명 영화와 같은 원작에서 출발하지만, 영화적 태도는 전혀 다르다. 철학적 질문을 내면의 기도처럼 천천히 끌어올리던 1972년작과 달리, 2002년작은 보다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 감정은 비극을 향하지 않고, 애도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우주 공간은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니며, 기억은 처벌이 아닌 회복의 도구가 된다.

감정을 통한 실재의 재구성

   타르콥스키는 인간 존재의 깊은 죄의식, 실체 없는 것의 실재성, 그리고 절대적인 타자와의 소통 불가능성에 관심이 있었다. 반면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의 솔라리스는 사랑과 기억의 역학을 실존적 질문이 아닌 정서적 동요로 치환했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타르콥스키는 질문을 계속 유예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면, 소더버그는 질문 자체를 던지기보다 감정의 응답을 먼저 보여준다.

 

   이 방식의 핵심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를 감정으로 판단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크리스(Kris)는 눈앞의 존재가 복제되었는지, 환영인지, 혹은 우주적 지성이 투사한 상인지조차 확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뿐이다. 이 판단 기준은 실재론의 문제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이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simulacre) 이론과 맞닿는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에서 복제는 원본보다 더 강한 현실감을 띠며, 종국에는 원본 자체의 필요를 지워버린다고 보았다. 소더버그는 바로 이 논리를 받아들이고, 복제된 존재가 원본의 감정 구조를 재현한다면, 그것은 감정적 실재로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스터들이 안 이뻐.

정체성의 경계가 무화되는 순간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다시 ‘나와 내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보통 타인을 분리된 주체로 전제한다. 그러나 솔라리스의 존재는 그 경계를 무화시킨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타인의 잔상이며, 결국 나 자신의 마음이 만든 이미지다. 이에 대해 현대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는 자아(self)를 '이차적인 환영(a secondary hallucination)'으로 본다. 즉 자아란 외부의 반복된 반영 속에서 구축되는 구조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솔라리스의 환영은 오히려 인간 자아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나보다 더 나를 많이 알고 있으며, 나의 판단은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국 '내가 아닌 것'은 나의 외부가 아니라 나의 심연이라는 역설이 발생한다.

스타 시스템과 미니멀한 내면 연출의 충돌

   그렇다면, 왜 2002년의 솔라리스는 흥행에 실패했는가. 가장 흔히 언급되는 이유는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의 스타성과 영화의 철학적 정적 사이의 불일치다. 클루니는 그 자체로 캐릭터 이상의 상징이 되었지만, 이 영화는 그 상징이 작동할 수 없을 만큼 과묵하고 추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관객은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기대하지만, 영화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머물게 만든다. 또한 당대 관객은 철학적 질문보다 논리적 플롯과 시각적 설계를 우선하는 시기에 익숙해 있었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처럼 배경은 철학적이지만, 외형은 액션과 미스터리를 갖춘 구조가 아니었기에, 2002년작 솔라리스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영화가 되었다.

감정이 실재를 구성하는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붙든다. 감정은 실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이는 현대 인지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인간의 의사결정은 합리적 사고보다 감정의 피드백을 기반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크리스의 선택은 비이성적이거나 멜로드라마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감정이 실재를 확정하는 기준이 되는 세계, 바로 그것이 소더버그의 솔라리스가 실험한 구조다. 결국, 2002년작 솔라리스는 실패한 리메이크가 아니라, 실패를 감수하고서라도 감정이 실재를 규정하는 가능성을 밀어붙인 실험에 가깝다. 그것은 철학의 언어보다 시각의 리듬, 논증의 구성보다 감정의 잔류로 말한다. 그리고 그 침묵은, 수많은 화려한 우주 영화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오래 남는다.

 

   2002년 솔라리스(Solaris)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과학적 탐사보다는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자아의 구조를 탐색하는 영화다. 외형상으로는 탐사선, 행성, 외계 지성체와의 접촉이라는 전형적인 SF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영화는 과학적 상상보다는 심리적 모호성과 존재론적 긴장을 밀고 나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복제와 원본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자리 잡고 있다.

카피면 어때?

복제는 언제 실재로 전환되는가

   영화에서 등장하는 복제 인간들은 단순한 기억의 반영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고, 스스로 고통받으며,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때 복제의 위상은 단순한 시뮬레이션을 넘어서며, 생명체와 유사한 감정적 자율성을 획득한다. 문제는 복제된 존재가 스스로 원본이 아님을 인지하는 시점부터 발생한다. 그 순간부터 정체성은 해체되며, 관객 역시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기준을 상실하게 된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에서 복제가 원본보다 더 현실적인 감각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시뮬라크르(simulacre)라 불렀고, 원본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모방 자체가 새로운 실재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영화 속 복제된 레아는 원본의 기억과 감정을 갖고 있지만, 그녀의 행동과 선택은 독립적으로 진화한다. 이는 보드리야르의 이론처럼, 더 이상 '원래의 존재'를 기준으로 복제의 진위를 따질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다.

복제된 나, 나는 아닌가

   영화 솔라리스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복제된 존재라면, 그것이 정말 중요한가? 주인공 크리스는 솔라리스라는 신비한 행성의 바다에 흡수되듯 사라지고, 이후 등장하는 그는 아내와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현실, 즉 복제된 세계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원본이 아니며, 그의 기억과 감정은 바다가 재구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크리스가 느끼는 행복과 사랑이 전혀 거짓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복제된 존재라 해도, 아내를 향한 애정, 집 안의 따뜻한 빛, 그리고 삶의 안정감은 원본 크리스가 느꼈을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원본’이라는 개념은 점점 의미를 잃는다. 만약 내가 나를 나로 느끼고, 내 기억과 감정이 나를 정의한다면, 내가 원본인지 복제인지가 정말 중요한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는 자아란 우리의 감정과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솔라리스는 이 생각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크리스는 복제된 자신일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크리스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도 복제된 너와 다르지 않다면, 그 차이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중요한 건 우리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살아가는가일 것이다.

탐사가 아닌 감정의 순환 구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리스는 과학 소설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외계 지성을 탐사하고자 하지만, 정작 외계 존재와의 소통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탐사의 주체인 인간은 과학적 탐구의 태도를 포기한 채, 개인적인 상실과 감정의 복제에 몰입한다. 이는 영화가 명백히 과학적 논리보다는 정서적 인식을 중심으로 설계되었음을 보여준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생명을 유전 정보의 전달과 생존 전략으로 설명한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정보를 어떻게 전달하는가보다 감정이 어떻게 보존되는가에 더 큰 관심을 둔다.

 

   결국 솔라리스는 우주로 나아간 인간이 타자와 조우하는 영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반복적으로 충돌하는 심리적 미로다. 솔라리스 바다는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반영이다. 복제된 존재는 외계의 침입자가 아니라, 망각할 수 없었던 감정의 귀환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탐구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된다. 이 모든 설정은 결국 솔라리스가 SF의 탈을 쓴 미스터리라는 것을 드러낸다.

지구로 귀환? 통 속의 뇌?

원본이 무의미해진 자리에서 남는 것

   우주는 이 영화에서 더 이상 낯선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친숙해서 불쾌한 반복을 만들어내는 내면의 기계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떠나지 못한 과거를 재구성하는 장소로 향한 것이다. 탐사라는 명목은 존재하되, 그 궤적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외계의 지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간은 스스로 만든 감정의 잔상과 대화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도, 과학도, 우주도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만들어낸, 복제된 현실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본과 복제의 문제는 더 이상 기술적이거나 윤리적인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구조가 복제를 실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혹은 받아들이는 순간 무엇이 사라지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솔라리스는 그 질문을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한 가지 사실만을 남긴다.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한, 그것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그 경험은 현실이 된다. 원본이라는 개념은 그 순간 무의미해진다.

 

바다 행성이니까..뭐.. 그렇다치자.

그래서.. 

   1972년 타르콥스키의 솔라리스는 깊은 철학을 영상으로 풀어낸 야심 찬 작품으로,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꼽힌다. 인간의 자아와 존재를 탐구하는 장면들은 당시엔 획기적이었고, 지금 봐도 그 무게감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2025년의 관객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좀 따분하고 지루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지 장면, 대사 없이 흐르는 긴 침묵, 그리고 명확한 답 없이 반복되는 상징들은 현대의 빠른 감각엔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솔라리스 바다를 바라보며 캐릭터가 멍하니 서 있는 장면은 예술적이긴 해도, 요즘 관객에겐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타르콥스키의 세계는 분명 대단하지만, 그걸 즐기려면 느린 호흡에 익숙해질 인내심이 필요하다.

 

   2002년 소더버그의 솔라리스는 타르콥스키의 원작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더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려 한 시도였다. 감정을 더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영상은 훨씬 깔끔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우주선과 솔라리스 행성의 모습은 최신 기술 덕분에 눈이 즐거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몰입감 있게 펼쳐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별로 재미가 없다. 원작이 품었던 자아, 죄책감, 상실 같은 복잡한 주제는 너무 감정 위주로 단순화되면서 깊이를 잃어버렸다. 크리스와 그의 아내 사이의 드라마는 감동을 주려 했지만, 철학적 고민을 얕게 스치며 쉽게 풀려버린다. 기술적으로는 발전했어도 이야기가 관객의 마음을 붙잡지 못해, 결국 세련된 화면 속에 허무함만 남는 느낌이다.

 

   1972년작은 당시 소련 과학계에서도 논쟁이 많았다. 당시 영화는 '과학을 배경으로 한 종교적 명상'이라 비판받기도 했고, 일부 과학자들은 “우주과학과 인류학의 혼합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며 영화가 실제 과학 연구에 대한 대중 인식을 왜곡시킨다고 우려했다.
   타르콥스키는 솔라리스 행성의 표면을 특수 효과 없이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해파리처럼 꿈틀대는 액체 표면은 수조에 페인트를 풀고, 펌프와 압력으로 조절하며 직접 촬영한 장면이다. 이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교과서로 회자된다.
  타르콥스키의 개인 노트에 ‘이건 반(反) 소련 영화’라는 메모가 있었다 그는 검열을 의식해 외부적으로는 “철학적 SF”라 했지만, 실제로는 이 영화를 “국가가 인간의 기억과 감정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 내 주요 영화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무시하거나 “비정치적”이라고 깎아내렸다고 한다.
  2002년판은 원래 ‘하드 SF’ 버전으로 먼저 각본이 완성돼 있었다 소더버그가 참여하기 전, 제임스 카메론(실제로 프로듀서)이 처음 기획한 버전은 “의식의 복제 가능성에 대한 공학적 설명”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클루니와 소더버그가 “로맨스를 통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재구성하면서 거의 모든 각본이 폐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