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벤 시라의 알파벳' 릴리트 설화; 나쁜 여자로 릴리트를 보는게 맞나?
2부 Lilith; 팬데믹으로 유아 살해 악령이 된 릴리트
3부 Lilith; 나쁜 여자로 릴리트를 보는게 맞나?
벤 시라의 알파벳 (Alphabet of Ben Sira)의 릴리트 전승
벤 시라의 알파벳 (Alphabet of Ben Sira)의 릴리트 전승
느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의 아들인 느부자르단(Nebuzaradan)와 벤 시라의 질답.
왕의 아들이 병이 들자, 느부갓네살 왕은 벤 시라에게 말했다.
"내 아들을 치유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벤 시라는 앉아서 부적을 만들었고,
그 위에 거룩한 이름과 의술을 담당하는 천사들의 이름, 형상, 이미지, 날개, 손, 발을 새겼다.
왕이 그 부적을 보고 물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벤 시라가 대답했다.
"이들은 의학을 담당하는 천사들입니다.
세노이(Senoy), 산세노이(Sansenoy), 세만겔로프(Semangelof)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녀를 릴리트라 부르셨다.
아담과 릴리트는 즉시 다투기 시작했다.
릴리트가 말했다. "나는 아래에 눕지 않겠다. 네가 내 아래 누워라."
아담이 말했다.
" 나도 아래에 눕지 않겠다. 오직 위에 있을 것이다. 너는 아래에 있는 것이 적합하고, 나는 위에 있어야 한다."
릴리트가 대답했다.
"우리는 둘 다 흙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서로 동등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릴리트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발음하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아담은 창조주 앞에 서서 기도하며 말했다. "신이시여! 당신이 주신 여자가 나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세 명의 천사, 세노이, 산세노이, 세만겔로프를 보내 그녀를 데려오게 하셨다.
"그녀가 돌아오기만 하면 괜찮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매일 그녀의 자식 중 백 명이 죽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떠나 릴리트를 쫓아갔다.
이집트인들이 거센 홍해 한가운데에서 익사할 운명 일 상황에서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릴리트는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천사들이 말했다."우리는 너를 바다에 빠뜨릴 것이다."
릴리트가 말했다. "나를 내버려 둬라! 나는 오직 유아들에게 질병을 일으키기 위해 창조되었다.
남자아이는 태어난 후 세번째 날까지, 여자아이는 일곱번째 날까지 내가 지배한다."
천사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그녀는 살아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내가 너희나 너희의 이름이나 형상의 부적에서 보면, 그 아이를 해치지 않겠다."
그녀는 또한 매일 그녀의 자식 중 백 명이 죽는 것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매일 백 명의 악마들이 죽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어린 아이들의 부적에 이 세 천사의 이름을 쓴다. 릴리트가 그들의 이름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맹세를 기억하고 아이는 보호(회복)된다.
누가 우위에 있는 거래인가?
신은 릴리트를 회수하라고 명령하지만, 그 명령에는 "만약 그녀가 응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이는 애초에 릴리트를 강제로 되돌릴 수 없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천사들은 그녀를 제압하거나 설득하지 못한다. 천사들은 아무런 대화나 협상 없이 살해 협박을 꺼내든다. 세 명의 천사조차 릴리트 앞에서 딱히 우위에 있지 못함을 드러낸다. 세 천사와 릴리트의 대결이었지만 릴리트는 굴하지 않았다.
릴리트가 “너희 이름이나 형상이 부적에 있으면 아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언뜻 보면 거래처럼 보인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것은 단편적 거래라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אם אראה את שמותיכם או דמותכם על קמיע איני שולטת בילד ההוא |
내가 너희의 이름이나 형상을 부적에서 본다면, 나는 그 아이를 지배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 동사는 “שולטת (sholelet)”, 즉 "지배하다", "통제하다", 또는 "권한을 행사하다"는 뜻이다. 중요한 점은 이 문장이 명령에 복종하는 방식이 아니라, 릴리트가 스스로 규칙을 설정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도 “אם ~ איני ~” 는 조건이 결과로 이어지는 서술이며, 다른 사람의 지시에 반응하는 반응해야 하는 구조가 아니라, 자기 규칙을 밝히는 발언이다. 즉, “내가 본다면, 나는 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시의 따른다거나 거래를 동등한 의미로 승낙한다는 의미보다는 거래의 우위, 또는 일종의 선언 처럼 보인다.
이후 전개는 이 해석을 더욱 뒷받침한다. 릴리트의 말이 끝난 뒤, 세 천사들은 그녀를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아이를 지키는 부적의 수호자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 장면은 릴리트의 조건이 수용된 것을 넘어서서 , 세 천사의 정체성을 바꾼 셈이 된다. 거래란 이해관계가 유지된 채 상호 교환이 이루어지는 구조다. 릴리트는 자신의 조건을 통해 천사들의 기능, 정체성 자체를 다시 재정의했다. 릴리트는 거래를 통해 주체적으로 끌고 갔다.
이 장면은 애초에 '거래'라는 구조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조건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거래란 기본적으로 거래 양측이 비슷한 권한, 선택지, 조건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 천사들은 릴리트를 제압하지 못하고, 결국 설득하고 협상하는 입장에 선다. 만약 그들이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였다면, 릴리트를 강제로 되돌리거나 제거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릴리트의 자식들
릴린(lilin)/린림(lilim)은 릴리트 이야기의 후속 보완물로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릴리트가 '유아 살해 악령'으로 고정된다. 설화 속에는 그녀가 매일 자식 백 명을 잃는다는 설정이 있지만, 그 자식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빠져 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릴리트의 자식으로 릴린/린림이 추가 되었으며, 이들은 릴리트가 받는 형벌의 대상이자 결과가 된다.
릴린/린림은 바빌로니아의 릴리투(Lilītu), 릴루(Lilu), 아르달 릴리(Ardat Lili) 등 고대 메소포타미아 악령 전승이 유대 문학, 민속 전통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뒤늦은 창작물이다. 바빌론 유수 이후, 여러 유대 문학들, 아람어 주술 항아리(Aramaic Incantation Bowls), 라짐의 책(Sefer ha-Razim), 조하르(Zohar)에 등장한다. '벤 시라의 알파벳'의 릴리트 설화에 릴린/릴림은 등장하지는 않는다. 릴린/릴림의 등장은 릴리트 이야기의 모순, 벌받는 릴리트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릴리트 설화 모순이 해결이 된게 아니라 더 많은 의문만 만들어냈다. '벤 시라의 알파벳'에 직접 언급이 없으니 생략한다.
릴리트는 나쁜 여자? 릴리트 입장도 좀 들어보자.
릴리트는 보통 '나쁜 여자'로 해석되어 왔다. 종교, 민속학 전통뿐 아니라 페미니즘에서도 반복되어 왔으며, 릴리트를 남성 중심 사회에 저항한 상징적 여성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 접근은 또렷한 방향과 틀이 있어야 했다. 릴리트가 어떤 것을 상징하는지 답을 정해 놓고, 그에 맞는 이미지와 언어를 끌어다 붙이는 방식이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는 답정너. 해방, 주체성, 억압에 대한 반발이라는 틀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결국 릴리트를 또 하나의 ‘역할’ 속에 가두게 된다.
이 이야기를 특정한 정체성이나 이념으로 같이 함몰되어 보기 보다는 그저 같은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릴리트는 자신 외부의 시선과 언어에 의해 규정당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 인물이다. 이는 여성의 주체성 이전에, 인간은 자신을 정의할 권리와 불평등을 거부할 자유에 끌린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자유의지 개념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에덴 동산의 이야기에서도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부였다. 선악과를 먹으면 에덴에서 추방된다는 경고 즉, 자유의지가 언제든 회수될 수 있다는 조건이 달려있다. 그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통제 속에서만 허용된 자유다. 릴리트는 이를 먼저 인식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릴리트는 아담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로부터 벗어났다. 이탈이라기보다 불평등한 자유에 대해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탈출이나 저항'만'으로 보는게 더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대부분의 릴리트는 이야기의 출발부터 부정적으로 시작한다. ‘사회적 부적격자’로 설정되고, 신의 명령을 거부한 자로 낙인찍힌다. 낙인은 서서히 릴리트의 인격을 소멸시키기 시작한다. 이런 이야기의 전개는 릴리트를 악령화하며 ‘나쁜 여자’라는 굴레를 씌운다. 주체적인 선택조차 도덕적 판단 아래 부정당한다. 이 결과는 고정된 시선이 만들어낸 것이다. 릴리트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가 보다, 릴리트를 어떻게 보고 싶은지에 따라 삐딱하게 완성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릴리트 설화를 내 마음대로 보겠다면..
왜 항상 릴리트는 '나쁜 여자'로 이야기의 해석이 시작되는가? 릴리트의 이야기는 늘 '출발점의 문제'가 있다. 릴리트가 말 안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해치는 악령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해석은 설화의 원래 의미보다 훨씬 나중에 덧붙여진 설화 + 해석의 결과다. 처음 릴리트는 단순히 떠난 존재였다. 도망이 죄가 되기 시작한 것은, 도망이 규범을 깨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릴리트는 '나쁜 여자'가 아니라, 질서가 이름 붙인 '불편한 존재'정도 였을 뿐이다.
릴리트는 질서를 깨버린 것이 아니라, "왜?"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 뿐이다. 릴리트는 신의 질서 그 자체를 파괴하려 든 것이 아니었다. 그 질서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깨달았고, 그 질서와 규범에 의문을 품었다. 질서 안에 있는 자유가 진짜 자유인가? 그 물음이 릴리트 서사의 출발점이다. 릴리트는 규범이 정해진 상황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품고 다시 물었던 것이다. 릴리트가 질문했기 때문에 ‘악’으로 낙인찍혔다면, 왜 똑같이 질문한 아브라함은 ‘의인’인지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창 18:23–33). 질문의 내용 때문인지, 여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프레임 때문인지 되돌아 봐야 한다.
릴리트는 제한된 자유, 조건부 자유를 거부했다. 창조 설화에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유는 조건이 붙어 있다. 선택은 자유지만, 잘못 선택하면 에덴에서 추방된다. 이건 자유라기보다 부분적이고 제한된 자유다. 릴리트는 이 '다소 불완전한 자유'를 가장 먼저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아담과 다르게 적용되는 평등의 문제도 있었다. 릴리트는 출발선이 이미 다르다는 것을 '자유'의 문제와 함께 깨달았을 것이다. 릴리트는 진정한 자유, 완전한 평등을 원했다.
릴리트는 시간이 흐르며 악령으로 변모한다. 떠난 여자에서, 아이를 죽이는 악령으로 변질된다. 이 변화는 그녀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떠났다’는 사실이 ‘위험하다’는 이미지로 확장되고, 결국 그녀는 금기이자 공포의 상징이 된다. 릴리트는 스스로 악령이 된 적이 없다. 릴리트의 악령화는 후대에 만연한 인식과 창작자 인식이 만들어낸 것이다. 규범이 릴리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서히 괴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아무 문제가 없나? 아담은 이 서사에 어떤 자격으로 인류의 조상으로 남았는가? 아담은 릴리트와의 불화로 그녀를 잃었고, 하와는 함께 추방당했다. 두 여성을 에덴 동산에서 지켜내지 못했지만 아담은 끝내 ‘죄인’이라 불리지 않았다. 성서는 노아(창 6:9), 아브라함(롬 4:2), 욥(욥 1:1)을 ‘의인’이라 불렀지만 아담은 ‘의롭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자, 기억의 중심으로 남았다. 이 불균형이야말로 릴리트를 되돌아 보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2부 Lilith; 팬데믹으로 유아 살해 악령이 된 릴리트
3부 Lilith; 나쁜 여자로 릴리트를 보는게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