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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어?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napigonae 2025. 5. 12. 19:32

 

구원의 '친인척 특혜' 의혹: 근동 문학의 지적

   홍수 설화는 성서의 창세기 6장부터 9장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문헌, 특히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서사와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의 홍수 전승과 아주 흡사하다. 하지만 이 가족들은 별도의 판단 기준이나 도덕적 행동 없이 생존하며, 이야기 안에서 따로 책임을 묻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노아 이외의 인물들은 단지 노아와의 관계로 인해 구원된 것으로 읽히며, 도덕적 책임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창세기는 노아에 대해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서술하며 그의 도덕적 자격을 분명히 강조한다 (창 6:9). 그러나 그의 아내, 세 아들, 그리고 며느리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들 가족 구성원은 어떤 행위도, 태도도, 판단도 묘사되지 않으며 단지 ‘노아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다. 하나님이 "내가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보았음이라”고 말한다 (창 7:1).

 

   '노아의 의로움에 무임승차' 문제는 유대 랍비 전통과 탈무드 문헌 안에서도 언급된다. 당시 유대 지식인들은 이 설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산헤드린 108a에서는 “노아는 의로웠으나, 그 세대에 한정된 것이다”라고 해석하며, 그의 의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צַדִּיק הָיָה בְּדוֹרֹתָיו). 즉, 노아가 타 세대에 있었다면 의인으로 불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드라쉬(Midrash)는 노아가 동시대인들을 회개로 이끌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 앞에서 신과 협상하며 타인을 위해 간청했지만, 노아는 자기 가족 외의 생존을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BerR 30:10). 이 비판은 랍비들의 반감을 반영한다. 

 

   아트라하시스 서사에서 신은 인간의 소란 때문에 대홍수를 일으키지만, 지혜로운 아트라하시스가 신의 경고를 듣고 생존한다. 이 서사에서도 생존자는 오직 경고를 듣고 행동한 한 사람이며, 가족이나 공동체 전체가 자동으로 구원되는 구조는 없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이야기에서 생존자인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도 신의 뜻을 이해하고 배를 만든다. 홍수 설화와 비슷하지만 설정이 다르다.

캄브리아기 이후로 비가 많이 내리네

노아의 '가족 패키지' vs 성경의 '각자도생' 의 충돌

   구원과 책임이 가족과 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행위에 따라 판단된다는 원칙은 성서 곳곳에서 분명하게 쓰여있다. 이 구절들은 홍수 이야기에서 노아의 가족이 '노아의 의로움'만으로 함께 생존한 부분과 상충된다.

 

   첫째,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 목숨만 구할 수 있을 뿐,” (겔 14:14). 이 구절은 의로운 인물의 공로나 보상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부분을 명확히 한다. 노아가 실제로 의인이라 하더라도, 그 의는 노아 가족의 생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창 7:1의 이야기와과 반대 된다.

 

   둘째, “ 죽을 사람은 죄지은 바로 그 사람뿐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짊어지는 일은 없다. 착한 사람은 자기가 착했던 대로 갚음을 받고 악한 사람은 자기가 저질렀던 악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 (겔 18:20). 책임과 구원이 속하는 단위를 개인으로 한정하며, 다른 사람의 죄나 공로가 전가되지 않음을 명시한다.

 

   셋째, “아버지를 자식의 죄 때문에 사형에 처할 수 없고 자식을 아버지의 죄 때문에 사형에 처할 수 없다.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자기 죄 때문이다” (신 24:16). 이 조항은 당시 사회적 질서 안에서 형벌과 책임이 세대 간에 이어지는 나쁜 악습 멈추고, 도덕적 결과를 오직 행위자의 몫으로 포함 시킨다. 반대로 '구원의 구조'도 마찬가지.

 

   넷째, “죽는 자는 모두 제 죄 때문에 죽으리라. 신 포도를 먹은 사람만이 이가 시릴 것이다” (렘 31:30). 집단적 죄책이나 세대 간 연좌제 방식을 부정하며, 결과는 각자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분리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약에서 '의로움' 적용 범위

구절 내용 요약 의로움 대상 기준
노아 이야기와의 관계
창세기
7:1
노아의 의로움
가족 전체가 방주에 들어가 생존
의인
가족 구원
노아 가족 전체 생존 구조를 정당화
의로움의 포괄적 적용
에스겔
14:14
노아, 다니엘, 욥이라도 자기 생명만 구원 의인
개인 구원
가족 구원이 불가능,
개인 의로움과 악함의 포괄성 전면 부정
에스겔
18:20
범죄한 자만 죽는다
아버지나 아들 연좌 거부
죄, 형벌
개인 단위
행위자 외의 누구도 영향 안 받음,
개인 의로움과 악함의 포괄성 전면 부정
신명기
24:16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형벌을 받는다
부모와 자식의 연좌 거부
책임
개인 단위
형벌 책임의 분리,집단 구원 서사 거부
개인 의로움과 악함의 포괄성 전면 부정
예레미야
31:30
각자가 자기 죄로 인해 죽으며
죄의 결과는 개인 책임
형벌
개인 단위
죄와 구원의 개인화,
개인 의로움과 악함의 포괄성 전면 부정

 

학자들의 시각: 노아 가족의 '특별대우' 논란

   노아 가족의 무임승차 문제에 대한 비판은 현대 성서학자들의 분석을 통해 다시 다뤄 진다. 이들은 창세기 홍수 서사와 예언서 및 법문에서 드러나는 윤리적 원칙 사이의 모순을 해석 차이로만 보지 않고, 성서라는 문헌 집합 내에 있는 다른 관점과 시대적 윤리 기준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본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구약신학'에서 창세기의 노아 서사를 ‘구원사적 신학’으로 보면서도, 예언서가 강조하는 개인 윤리와 상충한다고 보았다. 그는 '노아의 의'가 가족 전체의 구원으로 확장되는 방식은 고대 구원관을 보여주며, 에스겔 같은 예언자 문헌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르틴 노트(Martin Noth)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창세기의 조상 이야기들이 후기의 신명기, 열왕기 편집 전통과 다른 계열의 전승이라고 보았다. 노아 이야기는 고대의 가족 중심적 신앙과 혈연기반 보호 개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후대 예언자 문헌의 윤리적 개인책임과 충돌한다. 신 24:16의 원칙이 조상 전승의 구원 개념과 동시에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클라우스 발처(Klaus Baltzer)는 '제2이사야서 주석' 포로기 이후 문헌들에서 ‘죄와 구원의 개인책임’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분석했다. 그는 렘 31:30을 그 예로 들며 도덕적 결과가 혈연이나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 개인 행위에 따라 부여된다고 보았다.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도 '미메시스'에서 창세기의 인물들은 노아 개인보다는 윤리적 흐름에 따라 '한 묶음' 으로 묘사되며, 윤리적 자기 판단이나 갈등은 제한적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반면 예언서에서는 윤리적 책임과 도덕적 선택의 주체가 개별 인간에게 부여되며, 구원 또한 그러한 윤리적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모즈스 와인펠드(Moshe Weinfeld)는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의 사회 윤리'에서 신명기 전통이 공동체 전체의 계약에서 개인 윤리 중심 계약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신 24:14-15, 16, 17-22, 겔18:4, 20, 21-23 등의 구절을 구체적 예로 들며, 후기 문헌에서 혈연적 귀속보다 윤리적 행위가 판단 기준으로 전환되었다고 설명한다.

(von Rad, 1957; Noth, 1943; Weinfeld, 1972; Greenberg, 1983; Eichrodt, 1967; Kaufmann, 1960; Barton, 2003).

 

구약의 '의로움' 적용 범위의 변화

학자 분석 초점 해석 방식 의로움 적용 범위 견해
폰 라트 구원사 구조 ‘구원사’ 개념 해석
노아의 ‘구원’은 가족 전체를 포함,
후기 윤리와 충돌
노트 전승사 구분 조상 이야기 vs 예언자 전승
전통의 계보 차이,
윤리 기준 차이로 변화
발처 문헌사+주석 포로기 이후 문헌의 윤리 의식
죄, 구원의 귀속 단위,
‘개인’으로 전환됨
아우어바흐 문체, 묘사 방식 인물 서술 방식 분석
창세기 인물의 집단성,
예언서의 개별성 비교
와인펠드 법제사, 사회윤리 계약 구조, 법률 조항 분석
구체적 법 문구 분석
윤리 책임의 변화 추적

 

신약의 가족 구원 서사: 후진 기어 넣은  신약 윤리

   탠너힐(Robert Tannehill)은 초대교회의 적극적인 선교전략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간수가 회개하여 세례를 받을 때, 가족 모두가 즉시 세례를 받은 것은 개별 구성원들의 믿음이 전혀 작용하지 않은 상태에서가 아니라, 간수의 결정이 가족들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행 16:33).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는 당시 지중해 사회에서 가족이 갖는 특징을 강조하며, 한 사람의 믿음이 가족 구성원들의 신앙으로 연결되는 현상이 문화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간수가 믿음을 선택한 순간, 그 가족도 그의 새로운 신앙 속으로 들어왔으며, 당시 사회의 공동체 의식과 가족의 의미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행 16:34). 따라서 현대의 윤리 기준으로 평가하면 오류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I. 하워드 마셜(I. Howard Marshall)은 가족 구원의 서사를 신학적 은총의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복음의 영향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구원의 보편 가능성을 강조하는 복음의 진취적 방식이라는 주장이다(행 16:31). 가족 전체가 '자동적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로서 가정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강조한 구절로 해석한다.

 

   벤 위더링턴(Ben Witherington III)은 사도행전의 가족 개종 서사가 윤리적 퇴보라는 견해에 반대하면서,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말한다. 행 16:31은 가족 전체 구원을 보장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결단이 가족 구성원의 결단의 촉매제가 된다고 말한다(Tannehill, 1990; Keener, 2012; Marshall, 1980; Witherington, 1998)

바울에게 되묻지 않는다. 해석만 하겠다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행 16:31)'에서 해석은 보통 '개인의 믿음'이 '가족 구원'으로 이어 진다고 보고, 새롭고 긍정적 구원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약 후기 문헌들이 정립한 윤리적 책임 원리와 모순된다. 전통 신학은 이 차이를 제대로 설명 못하고, 복음의 확장성과 구원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설명 하려고 했다.

 

   여기엔 분명한 전제가 있다. 예수의 말은 반박 될 수도, 비판될 수도, 비판 할 수도 없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정해져 있고 해석은 이를 뒷받침하려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포로기 이후 문서들의 윤리 체계와 다른 구절이 나왔지만, 예외로 본다. 예수의 말은 반드시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통 신학은 이에 대해 율법이 예수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마 5:17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완성’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책임과 구원', '가족 구원 서사', '은혜의 확장' 등 다양한 주장들과 합쳐지며, 개인의 윤리 문제 자체를 신적 주권의 표현, 신정론적 회피(theodical evasion) 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완성된 율법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윤리 체계를 말하는지 고려하지 않는다. 율법의 범위를 예수의 말에 포함시켜 해석함으로써, 율법이 포로기 이후 문헌에서 담아낸 윤리적 정당성 형성 과정을 모두 지워버리게 만든다.

롯! 빨리 떠나라.

노아와 롯의 '구원'과 예수가 말한 '구원'은 의미가 다르다.

   신약에서 예수가 말한 ‘구원’은 창세기 홍수 서사에서 말하는 ‘구원’과 의미의 결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구원은 공동체적 혈연에 기반한 무임승차가 아니라, 개인의 인식 전환, 신뢰 등의 심정 변화의 출발로 봐야 한다. 창세기에서 ‘구원’은 행위로 표현된다. 창 7:1에서 구원을 뜻하는 명사나 동사인 'יָשַׁע”(구원하다)'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구체적 지시와 선택의 언어, 즉 'בֹּא־אַתָּה וְכָל־בֵּיתְךָ אֶל־הַתֵּבָה, 너와 네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문장이 사용되며, 이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선택에 의한 분리'로 이뤄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구조는 생존이고, 조건은 ‘너의 의로움’ 하나이며, 신의 언어는 단순 명령이다. 신약의 헬라어 ‘σωτηρία, 구원’과는 다르다.

 

   예수가 사용하는 ‘구원’(σωτηρία, σῴζω)은 종말에 이루어질 '신의 행동' 이란 의미 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구조 요청(마 8:25), 생존의 희망(행 27:22–44), 병의 치유(막 5:34, 막 10:52), 정치적 해방(눅 1:69–71), 내세를 전제하지 않은 변화(눅 7:50, 눅 17:19)와 같은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 특히, 예수는 치유와 구원을 딱히 구분하지 않았고, 회복 자체를 구원으로 실현 시켰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진 다양한 의미

구분 본문 사용된 원어 구원의 성격 구원의 초점 종교적 방점
노아의 홍수 창 6:9-
9:17
חָיָה 살다, 생존
שָׁאַר 살다, 생존
물리적 생존
광범위 멸절
 전지구적 재난에서의 생존
높음
(선택과 심판 중심)
롯의 구출 창19:1-
29
מָלַט 구출, 도망
יָצָא 끌어내다
물리적 생존
지역적 멸절
 지역적 파괴로부터의 회피
높음
(멸망과 회피 중심)
폭풍에서 구조 마 8:25 σῶσον 구하라 물리적 생존
개인
현세적 구조
낮음
(실존적 대응)
배 난파에서 구조 행 27:22
–44
σωτηρία 구원
σῴζω 구원하다
물리적 생존
개인
현세적 구조
낮음
(현실적 구조)
병 치유 막 5:34,
10:52
σῴζω 구원하다 신체 회복
개인
치유와 회복
중간
(믿음에 반응)
사회적 회복 눅 7:50 σῴζω 구원하다 사회적 통합
공동체 존엄
관계 회복
낮음
(사회적 의미 중심)
민족 해방 눅 1:69
–71
σωτηρία 구원 정치적 
민족적 해방
공동체 구원
중간
(정치적/종교적)
존재 회복 눅 17:19 σῴζω 구원하다 존재론적 변화
개인
개인 내면 구원
낮음
(영적 변화 중심)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성서에 대한 치명적 오해

   현대 교회와 종교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거의 조건반사처럼 '내세'와 연결된다. ‘구원’의 의미는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으로 받아 들인다. 이는 신약이 보여주는 구원 어휘의 다양한 해석을 배제한 '기복신앙'적 축소로 볼 수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진 병의 치유, 위기 극복, 공동체 회복, 사고의 전환, 정치적 해방 등의 의미는 교회 안에서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σῴζω, 구원하다’나 ‘σωτηρία, 구원'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의미가 변하며, 천국 입장권이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가 훨씬 적다. 하지만 교회는 이 어휘를 천국 입장권의 메타포로 고정하고, 구원이란 곧 사후 구조라는 인식을 반복적으로 주입해왔다. 이로 인해 일반 신자와 비종교인에게 ‘구원’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종교적 약속, 또는 종말의 결과로 인식하게 된다.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가 전형적 전도 문구로 '구원'이 곧 '내세'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행 16:31은 종종 ‘믿음’이라는 개인의 선택이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구원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식으로 '천국 보증 티켓' 이란 오해를 일으킨다. 이 구절은 소위 교회 밥 좀 먹어본 사람은 다 알지만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물으면 잘 모른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감옥이 무너져 죄수들이 도망친 줄로 오해하고 목숨을 끊으려 한다. 이때 바울과 실라는 그를 말린다. 간는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행 16:30)'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영생', '내세'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 말한다. 간수의 믿음은 단지 출발점에 불과하고, 가족 역시 복음을 직접 듣고, 반응하고, 행동으로 응답했다(행 16:32–33). 여기까지가 일반적 교회의 가르침이다.

 

   이 해석은 교회 내에 깊게 자리한 ‘보증수표 신앙'의 산물이다. 구원은 더 이상 '믿음-응답-변화'의 사건이 아니라, '신앙 고백-구원 티켓'의 구조로 변형된다. “믿으면 네 가족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원래의 성서 구조 안에서는 예수의 복음이 어떻게 한 사람을 통해 공동체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지만, 현재 교회 내에서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자 약속으로 작동하며, 아무런 해석적 비판 없이 반복된다. 더욱 문제는 이 '가족 구원 티켓'을 발행한 이가 바울이라는 점이다.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족구원 티켓'이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더라.

   예수는 한 번도 '구원의 가족 티켓'을 발행한 적이 없다. 예수는 철저하게 포로기 이후의 구약 문헌과 일치하는 윤리관을 고수했다.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각 개인이 무엇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방향으로 바꾸느냐에 뒀고, 이 원칙은 포로기 이후 예언서의 ‘책임의 개인화’와 일치한다(겔 18:20).

 

   교회가 바울의 말을 확대해석하고 있으며 예수는 구원과 책임, 판단의 기준을 오직 개인의 결정, 인식, 행위에 한정했다. 예수가 남긴 말 중 어느 것도 '한 사람의 신앙이 가족 전체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항상 구원의 조건으로 '자기 자신을 부인',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버리고' 따르라는 명령을 반복했다. 누구든지 따라오려면 자신의 삶 전체를 조건으로 해야 하며, 철저하게 개인화된 구원 윤리다(마 16:24;  9:23).

 

   마태 10:34–37, 루카 14:26, 루카 12:51–53에서 예수는 가족이라는 혈연 단위를 신앙의 장애물로 봤다. 아버지와 아들을, 어머니와 딸을 갈라놓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 구원의 단위이며,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는 구원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우선권이 없다. 마태 7:21에서 행위 없는 고백, 믿음 없는 복속, 공동체적 무임승차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명백하고 밝히고, '누구든지 따라오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고 선언'했고(막 10:21), 이 부정은 '자기의 삶과 생명', '재산', '가족 관계'까지 포함한다.

 

   행 16:31은 바울과 실라의 말이다. 예수의 직접 의지도 아니고 발언자도 아니며, 그 자체로 하나의 구속력을 가지는 구약 윤리 체계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 예수는 어디에서도 '너 하나 믿으면 네 가족도 구원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상은 오히려 예수의 윤리 관념에 반대 된다. 그는 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 10:37),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라”(마 16:24),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 14:26)라고 말한다.

 

   교회는 예수의 발언과 바울의 발언이 충돌하고 있음을 무시한다. 바울이 감옥 간수에게 한 말을 일종의 구원의 보증수표처럼 해석해왔다. 행 16:31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에게 한 말이며, 복음이 공동체에 퍼지는 사회적 맥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단지 신앙이 가족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문화적 해석이지, 구원의 원리나 교리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 구원의 구조를 설정한 이는 예수가 아니며, 그 말 또한 예수의 발화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가 구약 예언서들이 정립한 윤리 구조를 벗어났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따랐고, 오히려 더 급진적인 형태로 개인의 결단을 강조했다.

 

예수의 어록에서 한 번도 '네가 믿으면 가족도 구원 받는다' 하지 않았다.

 

더보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사람을 자기 아버지와 갈라놓고 딸을 어머니와, 며느리를 시어머니와 갈라놓으러 왔다. 사람의 원수가 바로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마 10:34–36)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 19:29)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마 10:37)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과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 14:26)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말해 두는데,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 다섯 식구가 있으면 세 사람이 두 사람과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맞서 갈라질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갈라지고,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갈라지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질 것이다 (눅 12:51–53)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 7:21)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3:18)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 16:24)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눅 9:23)

 

예수께서 그를 찬찬히 바라보시고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와서 나를 따라라 (막 10:21)

 

그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눅 10:37)

 

그때 임금은 오른편에 선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마 25:34)

 

그리고 왼편에 선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 졸개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마 25:41)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 25:4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마 19:23–24)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막 10:25)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눅 18:25)

뜬금없지만 믿어볼래?

사도행전 16:26-33,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 먹어요.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죽으려 하다가 바울과 실라가 "πάντες ἐσμεν ἐνθάδε,우리 여기 있다"고 한다. πάντες를 모두라 번역했는데 전부라는 의미도 있다. 일부가 죄수가 도망갔다고 가정하면 간수가 '저 이제 어쩌나요?' 하고 문제 해결로서의 구원을 원한다. 여기서 바울은 해결책이 아니라 갑자기 '믿어라!'라고 말한다. 어색한 흐름이다.

 

   죄수가 하나도 도망가지 않았다면 간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인데 죄수인 바울에게 "구원"의 여부를 묻는다. 이 부분이 일반적 빌립보 간수의 신앙고백처럼 들리게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무너진 감옥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는 죄수들의 문제가 남았는데 갑자기 영성적 구원의 물음을 던지는 것 역시 어색한 흐름이다.

 

   에어먼(Bart Ehrman)은 '정통의 왜곡'에서 이런 '갑작스러운 회심' 장면들이 초기 기독교 확산의 묘사를 위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간수가 갑자기 영적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되는 전환이 너무 급작스럽다 보는 것이다.

 

   아우네(David E. Aune)은 '누가-사도행전의 본문 전통'에서 사도행전의 본문이 다양한 사본 전통을 통해 전승되면서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사도행전의 특정 구절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적 필요에 따라 추가되거나 수정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Ehrman, 1993; Aune, 1964).

 

   이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행 16장에 대한 서술을 편집, 첨가, 변형되었을 가능성을 본다. 이야기의 급작스러운 전환이 실제 상황에서 부자연스럽고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선교적, 교육적 목적을 위해 문학 각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