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맨, 2022: ‘바이킹’은 직업이 아니야, 알바 뛰다 나라 세운 녀석들!
영화 노스맨은...
'노스맨(The Northman, 2022)은 잔인하고 처절하다. 영화 속 폭력은 동기가 충분하다고 끊임없이 설명한다. 주인공의 분노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고, 관객은 그의 복수를 따라가게 된다. 영화 속 바이킹의 문화와 종교는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복수' 라는 각설이 레파토리는 여전히 누가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따라 접근법도 시선의 방향도 달라진다. 무슨 게임 속에서나 보던 ‘버서커’는 눈이 돌아간 전사, ‘블러드 이글’은 복수의 바이킹식 표현이지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 선상 장례 역시 바이킹만의 의례라기보다는, 유사한 전통이 여러 문화에 존재하여 감흥이 떨어졌다.
영화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원형이 된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의 '덴마크인의 사적(Gesta Danorum)'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이를 몽환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색감으로 재현했다. 화면은 거칠고 더럽고 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한다. 다만 이는 주로 평론가들이 높게 평가하는 지점이고, 일반 관객에게 이 영화는 더럽게 불친절하다. 오딘이나 발할라, 운명(Wyrd) 같은 표현은 설명 없이 던져지고, 그 상징이 느껴지지 않은 관객에겐 거리감인지 괴리감인지 애매함으로 남게 된다. 바이킹의 서사가 등장하지만 바이킹의 그 많은 이야기 중 복수를 선택하여, 탐험, 해적질과 같은 활동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그래서 영화 이야기는 접어두고 바이킹 이야기나 잔뜩 해보자.
덴마크인의 사적(Gesta Danorum)
중세 덴마크의 역사가 삭소(Saxo Grammaticus)가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사이에 라틴어로 집필한 역사서를 표방한 본격 전설, 설화, 영웅담을 담아낸 책이다. 총 1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음 몇 권은 신화와 전설, 민속 영웅담에 가깝고, 후반부로 갈수록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 중심의 기록으로 넘어간다. 시작은 설화적으로 북유럽 신화의 흔적, 신의 개입, 불멸의 전사들이 등장하고, 이교적 세계관이 주요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바뀐다. 왕들의 전쟁, 정복, 배신과 정치적 야망이 등장하며 거대한 이야기 형식으로 바뀐다. 왕위 계승과 형제 간의 투쟁, 연맹과 파괴, 기독교적 통치 이념까지 결합되면서 서사는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국가 서사의 골격으로 자리 잡는다. 『덴마크인의 사적』은 오늘날 북유럽 영웅전승의 보고로 간주되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영향을 준 '암레트(Amleth)' 서사 역시 이 기록 속에서 등장한다. 시작은 『삼국유사』에 가깝고 그 형식과 서사는 『니벨룽겐의 반지』 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재미 없다.
탐험가? 해적? 약탈자?
바이킹이 정착한 북유렵의 땅은 생존에 그다지 유리한 점은 없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의 해안과 피오르드는 멋지긴 한데 척박했다. 긴겨울과 짧은 여름, 농사에 적합한 토지는 너무나 작고 수확은 부족했다. 바이킹의 초기 공동체는 씨족(kin group)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냥과 어획, 방목과 제한적 농경이 결합된 자급자족 방식을 기반으로 생존의 균형을 이어갔다. 하지만 생존 균형은 인구증가로 금방 깨졌다. 장남에게 상속이 집중되는 구조에서 차남 이하의 남성들은 씨족 내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공동체는 그들을 더는 품을 수 없었고, 쓸모 없어진 젊은 열정과 패기를 가진 젊은이들은 외부로 밀려났다. 배제된 이 젊은이들은 외부로 나가 새로운 터전과 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이 때, 롱십(longship)이 등장한다. 이 배는 넓은 바다, 얕은 강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 배는 사회 외곽으로 밀려난 젊은이들에게 출구와 동시에 신세계를 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세계에 대한 갈망, 젊은 열정과 패기만 가진 이들에게는 마지막 한 수가 선택된 것이다.
정예 전사 집단인 드렝거(drengir)들이 이 배에 올랐다. 그들은 단지 해적도, 단지 정착민도 아니었다. 탐험, 약탈, 정착은 개별적이지 않고 언제나 동시에 작용했다. 어떤 항구는 교역 대상이었고, 어떤 해안가 마을은 습격 대상이었으며, 어떤 땅은 정착지였다. 그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고, 그것이 바이킹의 움직임을 더욱 유연하게 만들었다. 해안선 너머의 세계는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원 그 자체였다. 필요성와 요구는 침략의 정당성이 되었고, 무력은 새로운 질서가 되었다. 해안에서 불을 피우고, 땅을 갈고, 철을 제련하며, 드렝거들은 짧은 시간 안에 항구적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이동이 정착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돌아왔고, 어떤 이들은 사라졌으며, 어떤 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복잡하고 연속적 흐름 속에서 바이킹은 단순한 약탈자도, 순수한 개척자도 아니었다.
부족국가 단계의 족장(jarl)과 하위 지배자(hersir)들은 이들을 조직화했다. 전사 집단을 이끌고 롱십을 띄우는 자는 명예를 얻었고, 무사히 돌아오는 자는 출세와 재원을 주었다. Home & Away 전략, 즉 고향(Home)을 지키고 침략과 약탈을 병행(Away)하는 방식은 바이킹의 기본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동(Away)은 물리적 충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문화적 침투 패스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문화적, 환경적 특수성이 바이킹의 Away 전략을 유도했지만 여기에 북유럽 신화가 종교의 형태로 함께 깔려 있었다. 전사로 죽은 자는 발할라(Valhalla)에서 오딘(Odin)의 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라그나로크(Ragnarok), 신들의 황혼이 오기 전까지, 그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전사의 삶을 반복한다. 삶은 훈련이고, 전투는 통과의례였다. 싸우다 죽는 것은 종교적 명예를 주었고, 롱십을 타는 것은 가장 실천적 종교 행위였다. 무기를 드는 순간, 그들은 단지 생존자가 아니라 신화적 질서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Roesdahl 1998; Wallace 2003; Logan 1991; Eiríks saga rauða)
바이킹의 롱쉽
롱쉽 이전의 배는 강과 연안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실용적인 소형 선박들이었다.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에는 통나무를 파내 만든 통나무배(dugout canoe)가 쓰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가죽을 씌운 스킨보트 형태도 있었다. 이후 북유럽 해안에서 발견되는 배들은 점차 널빤지를 이어 만든 구조로 발전한다. 특히 기원전후로 시작된 클링커(clinker-built) 방식, 널빤지를 위아래로 겹쳐 못질하고 틈새에 타르나 양모를 채워 방수하는 조립 방식은 북유럽 배 제작의 핵심 구조로 자리를 잡았다. 이 방식은 강한 파도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도 선체 전체를 가볍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의 조립식 배들은 처음엔 어업이나 연안 교역에 적합했지만,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이동과 수송, 약탈을 목적으로 한 원정이 빈번해지면서 더 크고 빠른 배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8세기 무렵 롱쉽(longship)이 등장한다. 클링커 구조를 기반으로 중심에는 킬(keel)을 넣어 선체의 직진성과 강성을 확보했고, 좌우 대칭의 긴 선체는 전후방 전환이 자유로웠다. 흘수가 얕아 연안은 물론 수심이 낮은 하천 진입이 가능했고, 필요시 육로로 포티지(portage)도 할 수 있었다.
돛은 마름모형이며 울이나 리넨으로 짜서 동물성 기름을 발랐고, 수십 개의 노는 동시 운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노를 위한 구멍(oar holes)은 일정한 간격으로 배 좌우에 나란히 뚫려 있었으며, 클렌치 못(clinch nails)으로 철제 리벳을 고정해 접합부의 내구성을 높였다. 배에 따라 20~30명의 무장 전사를 태울 수 있었고, 교역품이나 약탈물을 싣기에도 충분한 적재 공간이 있었다. 롱쉽은 전투, 수송까지 가능한 이동기지이자 장시간 거주도 가능했다. 구크스타드(Gokstad)와 오세베르그(Oseberg) 등에서 발견된 유물은 이 기술이 실제로 고도로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Roesdahl 1998; Bill 2008; Crumlin-Pedersen 1997; Wallace 2003).
바이킹 롱쉽의 구분
종류 | 용도 | 길이 (m) | 폭 (m) | 노 개수 | 승선 인원 | 배수량 (톤) |
스네카 Snekkja |
기동형 전투함 약탈 및 기습에 적합 |
17~23 | 2.5~3 | 20~30 | 40~60명 | 20~30 |
스케이드 Skeid |
대형 군사함 국가적 원정에 사용 |
25~30+ | 3~4 | 40+ | 최대 100명+ | 40~60 |
드라카르 Drakkar |
왕실 의전과 규모 전투용 대장선 | 35+ | 4~5 | 40~60 | 최대 120명 | 80+ |
크나르 Knarr |
무역 및 탐험용 대서양 항해에 사용 |
16~22 | 5~6 | 보조용 노 돛으로 기동 |
20~30명 | 30~50 |
바이킹 사회에서 롱쉽들 가운데 이름 있는 배는 사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그 자체로 인물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했다. 노르웨이 왕 올라프의 ‘오르멘 랑게(Ormen Lange)’처럼, 왕의 함선은 대형 드라카르(Drakkar)급이었다. 족장은 스케이드(Skeid)나 스네카(Snekkja) 같은 중형급을 썼고, 상인이나 개척민은 주로 크나르(Knarr)를 이용했다. 크나르는 노를 중심으로 한 롱쉽들과 달리, 돛 항해를 주력으로 설계된 장거리 무역선이었으며, 대서양을 건너는 데 적합한 배였다. 현대식으로 보면, 배의 종류는 곧 배수량과 역할에 따라 나뉘는 ‘클래스’였고, 그 위계는 사회적 위치를 암시하는 지표였다.
포티지가 뭐에요?
포티지(portage)는 배를 육로로 옮기는 이동 방식이다. 말 그대로 어깨에 올리고 걷거나 줄로 끌어 당겨 육지로 배를 이동 시키는 방식이다. 강 사이의 육지 구간이나 폭포, 급류, 얕은 여울 등이 포티지를 요구했고, 바이킹은 이를 통해 내륙 진입과 우회 이동을 시도했다. 수상 경로를 하나의 연속된 체계로 묶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방식이었고, 롱쉽의 가벼운 구조는 이러한 이동을 현실화시킨 핵심 조건이었다.
드네프르(Dnieper) 강과 부그(Bug) 강을 잇는 경로는 가장 대표적인 포티지 구간이다. 약 10km에 이르는 이 구간은 습지와 언덕이 얽힌 지형이었다. 배는 통나무 위를 굴리거나 가죽 끈으로 끌며 이동했다. 포티지 시도중 가장 길었던 구간은 볼가(Volga) 강 상류와 오카(Oka) 강 수계를 연결하려는 경로로 약 15km 이상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은 일주일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포티지는 우회, 회피 방식이 아니라 전략적 기습 수단이기도 했다. 상대는 강줄기를 따라 오는 적을 상정했지만, 바이킹은 배를 끌고와 엉뚱한 곳에서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 911년경, 바이킹은 센 강(Seine River)을 타고 올라와 내륙 깊숙한 루앙(Rouen)을 급습했는데, 중간 구간의 얕은 여울과 급류를 우회하기 위해 배를 끌어 넘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방어 측은 해안이 아닌 강 하류에서나 경계를 세운 상태였다. 연대기에서 “그들은 예고 없이 나타났다”는 식의 표현은 수차례 등장하며, 이는 기존 방어 체계가 포티지 공격 전술에 대응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방심한 도시나 마을은 우회 침투에 대응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바이킹의 등장은 충격과 공포로 기록되었다.
롱십(longship)은 이러한 작전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물이다. 구크스타드형(Gokstad) 롱십의 경우 길이는 약 23미터, 공선 무게는 2~3톤 내외로, 수십 명의 장정이 협력하면 끌거나 옮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구조적으로 킬(keel)이 얕고 평평하여 통나무 위를 굴리기에 적합했고, 선체 하중이 고르게 분산되었다. 이동 중에는 무기나 보급품을 분리해 따로 운반했으며, 포티지에 앞서 배를 최대한 가볍게 만드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이는 단순한 체력 문제가 아니라 생존 확률을 조절하는 기술이었다(Ibn Fadlan 922; Logan 1991; Roesdahl 1998)
바이킹 민족 기반 국가와 정착지
국가 이름 | 건국, 정착 시기 | 소멸, 전환 시기 | 비고 |
노르웨이 왕국 | 9세기 말 Harald Fairhair |
13세기 중엽 기독교 국가로 완전 전환 |
바이킹 중심 왕국의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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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국 | 10세기 중반 Harald Bluetooth |
12세기경 봉건국가화 |
기독교와 왕권 강화의 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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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왕국 | 11세기 초 Olof Skötkonung |
12세기경 중앙집권화와 기독교화 |
동방 바이킹의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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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공동체 | 874년경 | 13세기 말 ,노르웨이 통치 하 편입 |
가장 순수한 바이킹 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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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정착지 | 985년경 | 15세기 초, 기후 악화와고립으로 소멸 |
극지 탐험과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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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란드 정착지 | 1000년경 | 약 1015년경 철수 |
북미 도착, 정착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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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로 | 865년경 대규모 침공 시작 |
954년 잉글랜드 왕국 통합 완료 |
잉글랜드 내 자치적 법령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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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국 | 911년 롤로와 프랑스 왕의 조약 |
13세기 이후 프랑스 귀족화 |
바이킹 정착과 귀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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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 9세기 중엽 바랑기아인 이주 시작 |
1240년경, 몽골 침입 후 슬라브화 완료 |
슬라브 문화와 혼합된 동방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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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가봤니?
모스크바 방면(북동쪽), 스웨덴계 바이킹, 이른바 동방 루스(Rus)는 발트해에서 라도가 호수, 볼호프 강, 일멘 호수, 드네프르와 볼가 수계를 타고 내륙 깊숙이 진입했다. 모스크바(Moscow)는 지리적으로 볼가강–오카강–모스크바강으로 연결되는 내륙 수로에 위치하며, 통과 가능성 충분히 있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9~11세기)에 해당 지역은 아직 작은 슬라브계 삼림 촌락이었고, 연대기나 사가(Saga)에도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스크바가 역사에 등장하는 시점은 12세기 중반으로, 바이킹 활동 시기와는 거리가 있다. 정착이나 교욕 흔적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Franklin & Shepard 1996; Duczko 2004).
볼가강 방면(동쪽), 바이킹은 볼가 수계를 따라 남하하며 상업과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루스인(Rus)으로 불린 이들은 불가르족(Volga Bulgars)과의 접점인 현재 러시아 중남부에서 활동했다. 10세기 아랍 사절 이븐 파들란(Ibn Fadlān)은 그들의 외모, 무기, 장례 방식(선박 화장 포함)을 기록했고, 이 지역에서는 노르드계 무기와 장신구, 주거 흔적도 출토된다. 루스인들은 단순 교역자를 넘어 현지 정치에 간섭하거나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종종 이슬람권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Ibn Fadlan 922; Noonan 1992; Montgomery 2000).
943년경, 동방 루스는 볼가강을 따라 남하해 카스피해를 건넜고, 이란 북부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에 걸친 지역을 급습했다. 페르시아와 아랍 사료는 이들을 명확히 "루스(Rūs)"로 지칭하며, 해상에서 강하하여 도시 약탈, 주민 납치, 포티지를 시도하여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했다. 당시 루스인들은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교역권을 잠시 지배하기도 했고, 상당한 전리품과 포로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킹이 단순 수로 탐험을 넘어, 내륙 침공까지 전개한 보기 드문 사례다(Noonan 1992; Logan 1991).
859년에서 861년 사이, 바이킹 함대 약 60척이 프랑스와 이베리아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지중해로 진입했다. 이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돌파해 북아프리카 해안에 도달했고, 세우타(Ceuta), 탄제르(Tangier) 등지에서 약탈을 시도했다. 당시 아랍 사료는 이들을 ‘알마주스(al-Majus, 불의 숭배자들)’라 불렀으며, 북부 해안 지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후, 일부는 이베리아로 복귀, 정착한 일부는 지역에 흡수되었다. 이 원정은 지리적으로 북아프리카에 도달한 유일한 사례이며, 기독교 세계 너머까지 침투한 가장 남방 기록이다(Christys 2015; Coupland 2003).
그리고, 신대륙을 발견한 바이킹
바이킹들이 북미에 도달한 지역은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북단의 랜스 오 메도우즈(L’Anse aux Meadows)였다. 이곳은 북대서양 항해 경로상 북미 본토에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위치였으며, 바이킹들이 그린란드를 거쳐 도달할 수 있는 최서단 거점으로 평가된다. 도착한 바이킹들은 피오르드 지역에서 사용되던 목조 구조를 기반으로 임시 주거지를 조성했으며, 이는 뼈대 목재와 잔디 덮개로 구성된 비장기 체류형 구조였다. 유적 분석 결과, 해당 거주지는 장기간 정착을 위한 도시적 구조가 아닌 소규모 항해 기지 혹은 정찰 캠프로 보인다.
도착 이후, 바이킹들은 지역 자원에 의존하여 식량을 우선 확보하려 했다. 유적지 주변에서는 어류, 조개류, 해양 포유류 뼈 등 식량 소비 흔적이 다수 확인되며, 자급을 위한 수렵 및 채집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린란드에서 출발한 바이킹들이 대량의 식량을 휴대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현지에서의 생존이 탐험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지었다. 초기에는 자연 채취 중심의 활동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현지 원주민과의 간접적 조우 가능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들은 도착 직후 현지인과 접촉했고 교역을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그린란드인의 사가』에는 철기 도구, 붉은 직물, 가죽류를 교환 물품으로 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원주민은 모피나 동물 뼈 등으로 응답했다. 교환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지속적 교역에는 실패했다. 그 원인은 언어 소통의 실패, 교환 가치 불일치와 인식 차이, 상호 신뢰 부족으로 해석된다. 굴러온 돌 바이킹이 제시한 물품은 박힌돌 원주민에게 상징적이거나 낯선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가치의 해석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양측의 긴장감은 점차 증가했다. 원주민과의 충돌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는 묘사가 나타나며, 기습 공격과 반격, 도주와 방어의 반복이 확인된다. 이는 단순한 교역 실패를 넘어서 서로를 밉상으로 보던 시각이 위험요소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철기 도구를 무기로 사용하는 바이킹과, 석기 기반의 무기를 사용하는 원주민 사이의 기술 격차는 갈등을 급격하고 빠르게 증가시켰다. 실제 충돌의 규모와 인명 피해 여부는 사료상 명확하지 않으나, 거주지 철수 결정은 단순 자원 부족보다는 위협 대응의 한계로 해석된다.
충돌 이후, 바이킹은 항해 복귀를 위한 선박 보수에 착수했으며, 이에 따라 철기가 필요해졌다. 현지에서 수급 가능한 철 원료는 늪철(bog iron)이며, 이는 습지에서 직접 채굴해야 하는 자원이다. 제련을 위해 목탄이 필요했고, 목탄 생산을 위해서는 대량의 목재가 요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거주지 인근 삼림 자원이 집중적으로 베어져 나갔다. 고고학적으로도 철 제련로, 슬래그 잔해, 철공 도구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인위적 연소 흔적도 일부 확인된다. 이는 자급 목적의 소규모 제련 활동이 실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대규모 삼림 훼손과 연기, 불 사용은 원주민에게 뜨내기들에 대한 인식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북미 원주민 사회는 숲을 단순한 자원으로 보지 않고, 사냥 공간, 이동 경로, 영적인 영역으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삼림 파괴는 곧 경계 침범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원주민의 경계 반응은 심화되었고, 바이킹에 대한 위협 인식 역시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수용은 일시적이었고, 갈등이 반복되자 지속적 공존의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졌다.
최종적으로 바이킹은 철수를 결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철수는 일방적 패배라기보다는 지속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 대한 최후의 판단으로 보이며, 그 배경에는 잦은 충돌, 보급망 단절, 충원 불가, 자원 갈등, 외교 실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거주지와 제련 시설은 방치되었고, 이후 바이킹의 방문은 이후로 없던 걸로 보인다.
(Roesdahl 1998; Wallace 2003; Eiríks saga rauða; Logan 1991; Marshall 1996)
여긴 어디? 난 누구?
바이킹의 항해술은 지도나 나침반 없이 이루어졌지만, 당시로서는 나름 정교한 기술이었다. 항해 지식은 구술 전승을 통해 전해졌고, 선장은 별자리, 태양의 고도, 바람 방향, 바다의 색과 파도 결, 바다새의 비행 방향, 조류 흐름 등 다양한 자연 징후를 종합해 항로를 결정했다. 야간에는 북극성을 기준으로 북쪽을 가늠했고, 낮에는 태양의 위치를 참조했다. 흐린 날씨에는 지형이나 조류, 파도의 방향이 최고의 정보였다. 육지를 따라 항해하며 해안선을 눈으로 익히는 것도 중요했다. 여기에는 간단한 도구도 일부 사용되었는데, 사가에는 흐린 날 태양의 방향을 알아냈다는 구절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를 태양석(sólarsteinn)이라는 편광 광물의 사용 가능성으로 해석한다. 스파르 석영이나 칼사이트(calcite) 같은 광물이 흐린 날에도 태양광의 편광을 이용해 태양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태양석의 사용은 확정된 기술이라기보다는 전설과 과학적 가능성 사이에 있는 해석에 가깝다.
하지만 이 모든 항해술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바이킹의 항해는 성공 신화로 기억되지만, 사료 곳곳에는 실패의 흔적도 남아 있다. 『그린란드인의 사가』에는 북미를 향하던 항해자가 길을 잘못 들어 남쪽으로 항해했고, 차가운 바다에서 좌초 위기를 겪었다는 대목이 있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다른 해안에 정박했던 상황도 있었으며, 출발기록만 있고 이후 기록 없이 사라진 바이킹 무리도 있고, 항해 도중 실종된 드렝거(drengir)들도 많이 있었다(Roesdahl 1998; Wallace 2003; Logan 1991; Eiríks saga rauða; Marshall 1996).
그래서...
새로운 종교가 또 다른 종교관이 충돌할 때, 그것은 단지 신만 톡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신앙 체계를 덧입혀야 하는 일이 된다. 기독교는 유일신(Monotheism) 신앙관이지만 이미 여러 신을 섬기던 신앙사회(만신주의)에서 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로마 제국에서도 초기 기독교의 신은 ‘이물질 같은 신’이었다. 수많은 신들이 각자의 역할을 맡는 만신전 시스템 안에서 '유일신'신앙은 근본적인 충돌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힘든 교리였다.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설명은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으로는 명확하게 납득되지 않았고, 아리우스(Arius)처럼 예수는 창조된 존재라거나 위격의 순위를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는 초기 기독교의 내부 논쟁을 불러왔고, 이단과 정통의 경계를 촉발 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동시에 문화적 혼합을 낳았다. 기존의 신을 대체하지 않고 흡수하거나 유사하게 재해석하는 방식이다. 로마에서는 수호신 자리를 성인이 대체했고, 이교 신전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축제일은 기독교 절기로 변경되었다. 바이킹의 세계도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오딘과 토르의 위치에 하나님과 예수, 성인들이 들어왔고, 어떤 전사들은 토르 망치와 십자가를 동시에 지니며 납득하기 어렵지만 나름대로 전환기적 상징을 만들어냈다. 기독교적 신은 절대자의 개념이기 보다는, 오딘과 같거나 그 이상의 강력한 신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는 일방적 교체가 아닌 점진적 흡수였고,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신보다 익숙한 개념 안에서 신을 해석하려는 당연하고 필연적 반응이었다.
(Roesdahl 1998; Wallace 2003; Logan 1991; Winroth 2014)
기독교라는 종교의 위협적 선교와 침투가 이뤄졌다. 최후 저항은 스웨덴의 웁살라(Uppsala)에서 벌어졌다. 이 도시는 오딘, 토르, 프레이를 모시는 북유럽 전통 신앙(Paganism)의 중심지로, 거대한 신전과 주기적인 제사, 종교적 권위를 가진 제사장 계급이 존재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왕권 강화를 시작했지만, 웁살라는 기독교 개종을 완강히 거부하며 수십 년간 독자적인 종교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스웨덴 왕권은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웁살라 신전은 결국 12세기 초에 부서졌고, 그 자리에 지금의 웁살라 대성당이 세워졌다. 파가니즘(Paganism) 상징물의 철거는 스웨덴 내 마지막 거점이었던 이교도 신앙의 소멸을 의미했다. 신화 속 신들이 살던 자리는 이제 성자들의 무덤으로 바뀌었고, 제단에는 제물 대신 성체가 놓이게 되었다.
한편, 노르웨이에서는 올라프 하랄드손(Olaf Haraldsson)왕이 이 변화를 무력으로 밀어붙였다. 올라프는 기독교화를 왕권 강화의 도구로 삼았다. 부족들에게 세례를 강요했고, 거부할 경우 벌금과 추방, 처형까지 불사했다. 그가 신앙을 전파한 방식은 선교라기보다는 칼을 든 협박이있고 이어 많은 반발을 낳게 된다. 결국 그는 외세의 압력과 국내 반발로 망명했고, 다시 귀국 한 후에 신의 이름으로 스틱클레스타드 전투(Battle of Stiklestad, 1030)에 참전했지만 전사했다. 이후 상황은 역설적으로 흐른다. 죽은 올라프는 곧 성 올라프(Saint Olaf)로 시성(諡聖)되었다. 그의 무덤은 순례지가 되고 축일은 기념일이 되었다. 칼을 휘두르며 기독교적 믿음을 강요했던 인물이, 죽은 뒤엔 기독교의 수호자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Roesdahl 1998; Logan 1991; Winroth 2014; Eiríks saga rauða)
바이킹은 민족이 아니다. 농부, 어부, 목수처럼 원래 다른 일을 하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약탈과 원정을 나설 때 ‘바이킹’이 된다. 그래서 바이킹은 고정된 집단이 아니라, 특정 행동을 할 때만 붙는 이름이다 (Brink 2008).
바이킹이 뿔 달린 투구를 썼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 이미지는 19세기 독일 오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실제 유적에서는 뿔이 달린 투구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바이킹 헬멧은 대부분 철제 반구 형태에 가깝다 (Jones 2001).
리프 에릭손(Leifr Eiríksson)은 북미 대륙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져 있다. ‘랜스 오 메도우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에릭 더 레드(Eiríkr Þorvaldsson)의 아들로, 아이슬란드 출신이다. 유럽인의 미대륙 첫 상륙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섰다 (Wallace 2003).
덴마크 바이킹은 특히 영국을 반복적으로 침입했다. 영국 왕은 이들에게 돈을 주고 평화를 사는 데인겔드(Danegeld)를 지불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오히려 침략을 더 부추기기도 했다. 코브라 효과의 원조 (Sawyer 1971).
바이킹은 의외로 위생에 신경을 많이 썼다. 빗, 귀이개, 손톱칼 같은 도구가 무덤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웃 유럽인들보다 목욕을 더 자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부 연대기에서는 그들의 단정함 때문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적고 있다. 거칠기만 했다는 이미지는 편견이다 (Clarke 1911).
무기를 든 여성 유골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일부 여성은 전사로 활동했고, 실제 전투에 참여했다. 단순히 남성 옆의 부속물이 아니고, 성평등을 실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Hedenstierna-Jonson et al. 2017).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세운 국가다. 초기 정착민들은 목축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930년에는 세계 최초의 의회 중 하나인 알싱(Althing)을 세웠다 (Karlsson 2000).
바이킹은 글자를 썼다. ‘룬 문자’라 불리는 독자적인 문자체계를 사용했다. 나무, 돌, 금속 위에 새겨 넣었다. 내용은 간단한 기념문이나 짧은 기도였다. 지식인만의 문자가 아니었다 (Barnes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