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노아, 2014, 노아의 침묵; 아이들은 무슨죄

napigonae 2025. 5. 15. 03:34

 

이순신 장군 영화는 황인 구원 서사인가?

   영화 '노아'는 백인 배우만으로 모든 인물을 구성했다. 주요 인물은 물론이고, 배경 인물과 엑스트라까지 모두 백인이다. 이 선택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백인 중심 구원 서사(White Savior)'라는 비판을 불러왔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오히려 이것이 더 조심스럽고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홍수 설화의 시기는 인류가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한 때이며, 인종이나 민족 구분이 생기기 전이다. 이를 반영한다면, 모든 인물이 하나의 동일한 인종으로 그려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백인만 등장하는 구성도 유대인의 시각에 부합하는 연출일 것이다. 다양한 인종을 넣는다고 해서 공정하거나 포용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모든 등장인물을 한국인으로 캐스팅하여 노아 영화를 만든다고 황인 구원 서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단군 설화에 백인이나 흑인이 없다고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백설 공주나, 신데렐라도 원작을 지킨다면 아무 문제없는 것과 마찬가지.

 

   성서에서는 둘째 아들 함(Ham)이 저주를 받지만, 이는 후대의 신학적 해석이고 피부색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서구 역사 속에서는 홍수 설화를 비틀어 함을 흑인의 조상으로 만들고, 그의 저주를 흑인 차별의 근거로 삼았다. 영화에서 함을 흑인 배우가 연기했다면, 의도와 상관없이 이 부분을 다시 자극할 수 있었다. 저주와 흑인을 연결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과거의 억압적 기억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백인 배우들 만으로 구성하고, 어떤 인종도 캐스팅 하지 않는 방식이 감독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백인 배우들만 등장하는 구성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공정성의 문제로 보일 수 있고 비판의 여지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인종을 공정의 문제로 억지로 끼워 넣다가 생길 수 있는 역사 왜곡이나 인종 차별 문제보다는, '백인 구원 서사' 하나로 방어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감독은 인종 문제를 그나마 덜 위험한 방식으로 피한 것이다. 다양성의 부재라는 비판은 받겠지만,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치명상을 입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독은 유대교 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연출하면서 최소한의 선택적 방어를 택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백인 구원 서사라는 식의 비판이 붙는다면, 과한 비판으로 보일 수 있다. 물론 홍수 이전 인종 문제에 대해 상식적 캐스팅이 가능하다면 그 비판은 당연하게 받아야 할 것이다. 상식적 캐스팅이 가능하다면..

노아의 의로움, 1인 구원 티켓이 패밀리 패스로?

   노아의 의로움이 패밀리 패스 구원으로 적용되는 설정은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 포로기 이후 예언자들은 이런 가족 무임승차 구조를 비판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는 조상의 죄가 자식에게 전가되지 않으며, 사람은 각자 자기 죄로 죽는다고 말한다(겔 18:20; 렘 31:30). 예수는 철저히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 구원의 요인이라 말한다(막 10:21). 예수의 구원 티켓 설명은 포로기 이후 예언자들과 같은 방향을 향한다. 바울은 개인의 믿음이 패밀리패스(행 16:31)가 된다고 말한다. 바울의 개인 윤리와 구원 문제는 결국 다시 노아 시대로 회귀한 셈이다.

 

예수: 믿어. 그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어?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예수: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어?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구원의 '친인척 특혜' 의혹: 근동 문학의 지적 홍수 설화는 성서의 창세기 6장부터 9장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문헌, 특히 아트라하시스(Atraha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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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칼로리 채식 너머의 육식 혐오; 과장된 영화적 표현

   영화 속 노아는 육식에 대한 강한 부정적 인식이 드러낸다. 고기를 먹는 행위를 인간 타락과 연결짓는다. 특히 고기를 먹는 장면은 어둡고 뭔가 악하게 그려진다. 흥미롭게도 고대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난 육식 자제의 전통과 연결해볼 수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가축은 노동력, 제물, 공동체 자산으로 여겨졌고, 사냥은 필요한 만큼만 잡도록 하여 생태계를 유지하도록 어느 정도 강제성을 띄었다. 육식은 대부분 특정한 의례나 상황에서만 허용됐고, 과도한 사냥은 금기시되기도 했다.

 

   인도 힌두교에서 소를 먹지 않는 이유는 소가 농업과 운송에 더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에 잡지 않는 것이다. 육식에 대한 자제는 환경적, 경제적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유대교의 식문화 규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징 체계로 볼 수 있다. 고기를 먹는 행위가 혼란이나 경계 위반과 관련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동물 도살과 육식은 항상 윤리적 책임과 절제의 틀 안에서 이뤄졌다. 육식이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규율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고대 시대부터 많은 지역에서 사냥은 일정한 시기, 방식, 대상에 따라 제한됐다. 사람들은 짐승을 너무 많이 잡으면 다음 해에 사냥할 게 줄어든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냥은 늘 조절되고 계획됐다. 사냥터를 순환시키고, 번식 시키는 사냥을 피했다. 또 사냥 전에 의식을 치르거나, 잡은 수를 기록하는 문화도 있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육식과 사냥은 통제되는 행위이며, 공동체 자원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이해됐다. 감독의 육식 혐오 표현은 영화로만 봐야지 채식주의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하다.

(Harris, 1974; Douglas, 1966; Foltz, 2006; Harris, 1985; Meadow, 1989)

두발가인 철기시대, 고기는 못 익혀 먹어

용서의 한계에 도달한 신; 마르시온의 시선

   홍수 설화는 구약의 신이 보여준 사랑은 어딘가 삐딱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보여준다. 신은 인간을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출 4:22, 신 14:1). 하지만 이 자식 사랑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삐뚤어진 사랑에 가깝다. 이에 여러 변증을 시도하는데 사랑하는 자식 죽이는걸 타당하게 설명하는게 정말 가능한지는 의문이 든다.

 

   일라는 노아의 친자식이 아니지만, 노아는 그녀를 자식이자 선물이라 여긴다. 그녀를 통해 손주가 생겼을 때, 노아는 신의 의지를 따른다며 아이들를 죽이려 하지만, 결국 사랑의 감정 때문에 멈춘다. 신의 의지를 수행하려는 노아의 의지는 끝내 자식 사랑 앞에서 멈춘다.

 

   신은 인간의 죄와 악함에 용서를 베풀기보다는, 홍수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신약의 용서 개념, 즉 무제한적 자비와 사랑이라는 메시지와 충돌한다 (마 18:22, 골 3:13). 7*70의 용서는 490번 용서하라는 의미가 무제한 용서를 의미할 것이다. 용서의 수가 제한적이라 본다면 반박하지 하지 않겠다. 

 

    이 모순된 신의 사랑은 결국 초기 기독교의 큰 논쟁으로 이어졌고, 그 인물이 인물로 마르시온(Marcion)이다. 마르시온은 신약의 신과 구약의 신이 다르다고 보았고, 이러한 시각은 그가 이단으로 규정되도록 만들었다. 

 

예수를 따라 야훼를 버린 자: 마르시온

 

예수를 따라 야훼를 버린 자: 마르시온

두 神 사이에서: 마르시온의 붕괴와 선택 마르시온(Marcion)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를 단지 이단의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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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묻지 않는 노아; 대홍수에 휩쓸려간 아이들 

   알터(Robert Alter)는 노아가 신의 인간 멸절 의지에 답하지 하는 방식을 '윤리적 판단의 결여', 즉 '도덕적 공백'으로 보았다. 이 '윤리 결여와 공백'은 노아 개인의 침묵을 넘어서, 독자에게 신의 결정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질문을 유도하는 이야기 의문으로 작동한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멸망 앞에서 신에게 되물었지만(창 18:24-32), 노아는 묵묵히 명령을 따른다. 이 침묵은 복종 뿐만 아니라, 윤리적 판단을 독자에게 떠넘기기는 의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홍수 설화에서 어린아이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죽어야 했는지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는 훗날 '천국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말했는데(마 19:14), 이 부분이 충돌한다. 과연 이 홍수 심판은 정당했는지, 궁금한 생각이 분명 들게 된다. 이 질문은 홍수 설화의 기자가 비판 대신 이야기의 일부를 생략을 해서 독자 스스로 품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노아는 자신의 손자들까지 이 범위에 포함시켜 해치려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기 보다는 나름 감독이 고충한 흔적이 보이는 장면이다(Alter, 1996).

 

   대홍수 이후에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바벨탑의 붕괴 같은 연속적 징벌이 이어진다.  과연 홍수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리셋이 안 된단다고 방치한 것인지 의문을 일으킨다. 창세기 기자는 이에 대해 딱히 적절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의 판단이 틀린것인지, 실패했는지, 혹은 의도적으로 인간 타락을 방치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홍수 설화는 신의 권위, 윤리적 정당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수있는 문학적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s) 1년 가까이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https://wildernessclassroom.org/stromatolites-ancient-form-life/

과학을 가장한 기만; 스트로마톨라이트와 대홍수설의 충돌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s)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이자 동시에 가장 오래된 활동의 흔적의 증거를 보여준다. 주로 시아노박테리아(cyanobacteria, 남세균) 같은 미생물이 얕은 바다에서 퇴적물과 작용하며 생성한 층상 구조물로, 생물 기원 암석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들은 수십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관측되며, 고대 지질학적 기록에서 생명체 존재의 직접적인 증거로 간주된다. 현재도 호주 샤크 베이(Shark Bay), 푸엔테 데 라 페드라(Punta de la Piedra), 벨리즈의 리프 라군(Belize Barrier Reef) 등 일부 지역에서 관찰된다.

 

   현대 스트로마톨라이트의 생장 속도는 매우 느리다. 환경 조건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연간 수 mm 이하이며, 어떤 경우에는 수십 년에 걸쳐 단 몇 cm 자랄 수도 있다. 이러한 성장률로 수 미터 두께의 스트로마톨라이트가 형성되려면 수천 년에서 수십만 년 이상이 필요하다. 게다가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자라는 데 필요한 조건은 햇빛이 잘 드는 얕은 수역, 완만한 퇴적 속도, 안정된 수질과 염도 등이다. 대홍수와 같은 격변의 환경에서는 형성될 수 없다. 최적의 환경 조건에서 1cm 이상의 연간 성장이 보고되기도 하지만, 실제 자연에서는 수천 년 동안 이런 조건이 지속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성장률이 꾸준히 유지되었다면, 현재 십 미터가 넘는 두께의 스트로마톨라이트 구조물이 관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 수 미터 이하에 불과하다.

 

   지질학적으로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지구의 가장 오래된 퇴적층, 특히 약 35억 년 전의 선캄브리아대에서부터 발견된다.  고대 해양 환경에서 광합성 생물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생명의 진화 역사와 환경 조건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대륙 지괴 위 퇴적지, 얕은 해양 환경, 그리고 간혹 고지대 암석에서도 발견된다. 판구조 운동에 의해 융기된 지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스트로마톨라이트의 존재는 창조과학 진영의 '젊은 지구 모델'과 '대홍수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창조과학은 대홍수를 통해 대부분의 지층이 단기간에 형성되었고, 스트로마톨라이트와 같은 구조물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관측되는 스트로마톨라이트는 그러한 격변적 퇴적 조건에서는 생존 및 형성이 불가능하다. 빠르게 쌓이는 퇴적물은 생물군을 매몰되거나 질식 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스트로마톨라이트는 광합성이 가능한 얕은 물 환경을 요구하는데, '대홍수'처럼 물이 혼탁하고 깊은 환경에서는 광합성이 불가능하다. 짧게 잡아도 6개월은 혼탁한 바다였을 것이다.

 

   창조과학 진영은 이에 대해 “스트로마톨라이트는 홍수 직후 빠르게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거나 “신이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있는 지층을 먼저 쌓으셨다”는 식의 설명을 시도한다. 또 한편으로는 스트로마톨라이트 형성 속도를 과장하거나, 실험실 환경에서 특정 조건 하에 생장이 빨랐다는 일부 사례를 일반화하는 식이다. 이 모든 주장은 현대 자연에서의 관측과 장기간 축적된 지질학적 데이터를 무시하거나 자기들 편한대로 해석하는 방식일 뿐이다. 현재 살아 있는 스트로마톨라이트조차 안정된 환경에서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성장하며, 그 구조는 빠른 퇴적 환경에서 생성될 수 없다.

 

   창조과학 진영의 주장 방식에는 과학적 태도와 거리가 먼 점들이 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부 자료만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체리피킹(cherry-picking)’이 자주 나타나며, 불리한 반례가 제시되면 “하나님의 섭리”나 “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식으로 설명을 회피한다. 그러나 과학은 반복 가능한 관측, 검증 가능한 원리, 반증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만약 정말로 신이 지질학적 증거를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면, 과학적 검증이 가능한 방식으로 설계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수많은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결국 '신이 과학의 시대에,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리를 숨겼다'는 역설을 낳는다.

 

   스트로마톨라이트 외에도 대홍수설을 반박하는 증거는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수천 년 이상 살아온 브리슬콘 소나무(Bristlecone pine)의 나이테 연대, 수십만 년 이상 누적된 산호초(coral reef)의 성장 기록(Great Barrier Reef), 고립된 섬에서 관찰되는 고유종의 진화, 그리고 빙핵 코어(ice core)를 통한 기후 연대 측정 등이 있다. 이 모든 증거가 대홍수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시간적, 생태적, 지질학적 데이터를 마구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