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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몰라도 샌프란시스코는 다 알더라.

by napigonae 2025. 5. 31.

독일로 되돌아간 콘라드

   아시시(Assisi)는 콘라드 폰 우르슬링겐(Konrad von Urslingen)의 아래에 있었다. 콘라드는 이전 황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가 임명한 백작으로, 이후 1183년 스폴레토(Spoleto, 움브리아의 정치적 상징 도시) 공작이 된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도시 아시시(Assisi)와 가까운 거리의 도시 페루자(Perugia)는 콘라드의 아래에 있지 않은 자치 도시였다.

 

   1197년 황제 하인리히 6세(Henry VI)가 사망하고 슈타우펜가의 필리프(Philipp von Schwaben)와 벨프가의 오토 4세(Otto IV)가 황제의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독일남부 슈바벤(Schwaben)의 귀족이었던 콘라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차기 황제에 대한 입장을 보이기 위해 귀국했다.

 

  1197-1198년 콘라드 독일 복귀 이후 아시시의 시민들은 분리 자치 독립을 위해 황제파(Ghibellini) 귀족들과 콘라드 지배의 상징 로카 요새(Rocca Maggiore)를 공격한다. 황제파 귀족들은 페루자로 도망간다. 교황파(Guelfi)가 공격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교황파+ 자치 정부이 함께 벌인 일이다. 반란 이후 이 세력은 확실한 교황파 성향을 드러낸다.

 

   1198년 신임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는 움브리아(Umbria) 지역-아시시, 페루자가 포함된-의 도시들에 일종의 행정명령을 보내 세속권력보다 교황권이 위에 있음을 밝힌다. 아시시 외에 토디(Todi), 스폴레토(Spoleto),나르니(Narni), 아멜리아(Amelia)가 교황권에 복속한다.

콜레스트라다 전투(Battaglia di Collestrada)와 이후

   페루자와 아시시는 오랜 기간 지역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토와 관할권, 무역 통행 권리 같은 문제로 충돌을 일으켰다. 아시시가 황제파 도시가 되면서 페루자와 갈등이 커졌다. 1198년 아시시의 반란, '시민 중심'의 자치 정부 수립은 '귀족 중심'의 페루자 정부에게 큰 위협으로 보이게 된다. 이후 꾸준히 아시시와 페루자는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된다.

 

   1202년 페루자 자치 정부(Commune)는 아시시 자치정부에 축출된 귀족들의 복귀 요청 했다. 아시시 측은 시민 중심의 자치 정부를 원했기 때문에 귀족을 축출 한 것이고, 페루자의 요구대로 축출된 귀족이 복귀하면 이 반란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아시시 측은 페루자의 요구를 간섭이라 여기며 거부한다. 

 

   1202년 말 페루자와 아시시는 콜레스트라다 평야에서 맞붙었다. 아시시는 노체라(Nocera), 베바냐(Bevagna), 스펠로(Spello)의 지원을 받았다. 1차 사료는 부족하지만 아시시는 이 전투에서 대참패를 겪게 된다. 많은 사망자가 생겼고, 많은 포로들이 억류된다.

 

   이후 아시시는 혼란스러웠다. 축출되었던 귀족들이 돌아와 권력을 잡게 되었고, 1204년 시민들은 행정과 치안 유지를 위해 외부의 고위 관리 질리베르토(Girardo di Giliberto) 를 새로운 포데스타(Podestà)로 임명한다. 질리베르토는 인노첸시오 3세에게 파문 당했던 인물. 교황은 아시시 포데스타로 인정하지 않고 아시시 전체를 '성사 금지(Interdict)'를 내리게 된다. 이후 아시시는 교황청과 협상, 새로운 포데스타를 임명하면서 파문에서 해제된다.

 

   이후 아시시는 약 20여년간 혼란기에 있었다. 포로로 잡혀 있던 프란치시코가 되돌아온 시점은 1203년.

 

https://spiritualdirection.com/2023/10/03/st-francis-of-assisi-and-the-fatherly-blessing

프란치스코의 회심

   프란치스코는 부잣집 아들로 본명은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다. 토마스 첼라노(Thomas de Celano), 보나벤투라(Bonaventura)의 저작에서는 그를 부잣집 아들이자 한량에 가깝게 묘사하는데 1차 사료는 없다. 프란치스코 본인의 '유언(Testamentum)'에서 '죄 가운데 있었다'는 표현 정도가 나오는데, 한량 라이프와 연관시키기는 조금 무리다.

 

   그가 참전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몇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그가 명예와 기사도를 꿈꾸며 이상과 허영이 있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그의 회심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소설적 장치라는 느낌이 강하다. 도시 국가였던 아시시는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병사로 징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많은 도시 국가들이 부족한 병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아시시 역시 페루자에 비해 병력 열세에 있었다. 소설처럼 이상과 허영이 있었다면 부유한 평민에서 공을 세운 귀족이 되길 바랬을 가능성도 있다.

 

   회심의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1년간 억류 과정 중 큰 병을 앓았다. 함께 억류된 동료들을 잃었을 것이고, 언제 끌려나가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도 지속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 삶에 대한 애뜻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사람들은 겁이 많다. 그것은 신이 주신 용기와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했던 것처럼 공포와 싸웠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부자 아버지가 몸값을 치뤘을 것이다. 하지만 1년간 억류되었다. 상당히 이례적이다. 돈으로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의 동료들도 모두 돈으로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원은 돈과 무관함을 깨달았을 때, 돈으로 해결 하던 많은 것들 한계를 절실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교황파였던 아시시는 정치적으로 굴었던 페루자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패했다. 프란치스코에게 일말의 신앙이 있었다면 '신은 어째서 아시시를 돕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욥이 느꼈던 절망감과 흡사했을 것이다. 아시시의 모든 이들과 본인에게 죄가 있었던 것인지,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포로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 아시시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마주했을 것이다 전쟁 전에 알지 못했던 잔인한 결과와 상황은 프란치스크를 혼란으로 몰아 넣었을 것이다. 어디에도 있다던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철 없던 아시시의 부잣집 도련님은 황망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회심이 극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서서히 굳건해졌다면 아시시 전체가 성사 금지(Interdict) 당했던 시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교황과 교황청이 아시시를 버렸다는 사실은 이후 미묘한 교황청과 거리감이 설명 될 수있다. 많은 의문들이 가시기도 전에 가장 굳건한 뒷배라 여겼던 교황청이 자신들을 파문했다는 사실은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패전 후 곤란한 상황의 아시시, 주변 수도원, 사제들, 교회는 이 문제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도움의 손길도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역시 많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선한 사마라인인과 참된 이웃이 없음을 현실로 깨닫게 된다. 결국 스스로 참 된 이웃의 길을 스스로가 걷고자 했을지 모른다.

https://it.wikipedia.org/wiki/Guelfi_e_ghibellini

1200년 전후 이탈리아의 상황

   지금 기준으로 이탈리아지 각 도시국가들, 피렌체(Firenze), 베네치아(Venezia), 밀라노(Milano), 제노바(Genova), 볼로냐(Bologna) 등이 난립, 동맹과 적대를 반복하고 있었다. 상업 도시들간에 무역과 항로를 두고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고 해안 도시에는 해적의 약탈도 자주 발생했다. 도시의 인구유입은 늘고 빈부격차는 점차 커졌다. 도시 빈민이 늘어나면서 치안과 위생이 취약해졌다. 도시 이외 지역은 봉건제로 억압받는 상황이었다. 

   

  각 도시국가들은 교황파(Guelfi)와 황제파(Ghibellini)로 나뉘어 도시와 도시, 시민들끼리 분열이 생겼다. 시칠리아(Sicilia)의 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는 신성로마황제까지 겸하며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서 부터 손아귀에 넣으려 시도했고, 이후 오토 4세(Otto IV)는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 이후 딴 마음을 품고 이탈리아 북부, 중부까지 점령하려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 III)는 흑심 덩어리 오토 4세를 1210년 파문하고 이듬해 하인리히 6세(Henry VI)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를 새로운 황제로 지지했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건 1220년, 아시시가 지속적으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의 북이탈리아 침략을 막기 위해 밀라노(Milano), 브레시아(Brescia), 베로나(Verona) 등 주요 도시들은 롬바르드 동맹(Lega Lombarda)을 맺는다. 1183년 콘스탄츠 조약(Concordato di Costanza)으로  충분한 자치권을 보장받게 되었지만 이후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다시 롬바르드 동맹이 강해진다.

 

삶의 난이도, 교회의 부패를 점수로 본다면?

세기 민중 (점수/특징) 교회 (점수/특징)
10세기 95
봉건제 고착, 외부 침입 지속
85
귀족 권력 다툼, 교황직 매매와 사치
11세기 95
농노제 지속, 도시 성장 미미
70
개혁 시도 시작, 시모니아 여전
12세기 80
상업 발달 시작, 도시 기회 증가
60
개혁 효과 가시화, 정치 개입 증가 조짐
13세기 85
도시국가 성장, 계급 격차 확대
75
이단 심문, 교황의 정치 권력 확대
14세기 100
흑사병, 전쟁, 기근, 봉기
95
아비뇽 유수, 교황 대분열, 교황청 사치
15세기 80
르네상스 시작, 빈부 격차 심화
100
면죄부, 성직자 세속 개입, 방탕한 교황들

12-13세기 중세 유럽의 썩은 교회와 4차 십자군

당연한 성직매매

   이전부터 성직매매(Simony)는 흔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가 11세기 말, 개혁을 시도했지만 썩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성직매매, 시모니는 행  8:9-24에 나오는 인물 시몬(Simon Magus)에서 유래, 예수의 제자 시몬과는 무관하다. 돈으로 성령으로 내리겠다는 마술사 시몬을 베드라고 나무란데서 유래한다. 돈으로 성직을 샀으니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돈을 뜯는 상황으로 변질된다. 헌금, 예배, 고해성사, 면죄부 등 교회와 관련되 모든 것은 돈돈돈으로 이어지게 된다.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와 위상은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성직매매의 문제가 커서 그렇지 관직매매도 횡행하여 백성들은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는 상황이었다.

 

유명무실 성직자 독신제

   4세기 엘비라(Elvira) 공의회 이후 성직자 독신제가 시행되었지만 유명무실했고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를 강화하려고 했지만 실패, 12-13세기 고위 성직자, 사제들까지 혼인하고 많은 자녀들 두었다. 성직자라는 자리는 토지와 수입이 보장되는 강력한 자리로, 대를 이어 세습하기도 했다. 문제가 생기면 '속죄금'이라는 형식으로 돈을 내고 무마를 시도했다. 1139년 라테(Lateran) 공의회에서 성직자 독신제를 강화하고 비독신 성직자에 대해 성직자격 박탈, 수입 금지를 못 박는다.

 

부자 수도원

   수도원 운동 이후 의미가 퇴색하여 각지의 수도원들은 기부와 헌금, 토지매매를 통하여 재산을 축적했다. 수도원 수도사들의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 수도원장에 귀족들과 그 인척들이 차지하고 귀족의 재산을 수도원 재산과 동일시 하기도 했고, 이를 이용한 토지와 재산 불리기가 흔하게 일어났다. 수도사들에게 규율은 의미 없고 방탕하게 살았다. 클뤼니(Cluny) 수도원 개혁이 잠깐 효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른 수도원들과 같아졌다.

 

심각해진 이단 파문

   카타리파(Cathari), 왈도파(Waldensians) 등 세속화된 교회에 맞선 시민들의 봉기에 대해 교황청은 격하게 반응한다. 이들을 이단으로 파문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많은 이들을 죽였다. 교황청은 이단심문소(Inquisitio)를 설치하고 순수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고문, 재산몰수, 화형에 이르는 광범위한 탄압을 자행한다.

https://warfarehistorynetwork.com/article/sack-of-constantinople/

 

최악의 뻘짓 4차 십자군 전쟁

   원정을 가기 위해 면죄부와 특별 헌금을 이용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이단 재판과 재산 몰수도 병행 하였다. 원정 자금에 재산을 쏟아부은 귀족들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농노들을 착취하기도 했고, 일부는 파산하기도 하였다. 각지에서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하급 귀족, 농노, 상인까지 징발하기도 하였다.

 

   십자군 수뇌부는 베네치아에 물자 수송을 의뢰하지만 택배 요금이 부족하였다. 베네치아는 요금을 할인해주고 대신 눈엣가시 도시 자라(Zara)를 공격해달라 요구하고 십자군은 이를 받아들여 가톨릭 도시였던 도시 자라를 공격한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자라를 공격한 이들을 파문하였지만 그다지 큰 반향은 없었다.

 

  알렉시오스 4세(Alexios IV)는 자기 아버지 이카시오 2세(Isaakios II )와 자신을 비잔틴 제국으로 복귀시켜주는 조건으로 십자군에게 막대한 자금 지원을 약속한다. 기독교의 심장이자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승리한다. 막대한 자금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자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카시오 2세와 아들 알렉시오스 4세를 살해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한다. 십자군은 군사 자금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약탈을 벌인다. 이후 라틴 제국(Empire of Romania)이 세워진다. 말이 제국이지 분할지 점령에 가까운 괴뢰정권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왜 존중 받는가

   그는 성직자가 아니다. 사제 서품도 받지 않았고, 신학 교육도 받지 않았다. 위에 잠깐 언급했듯이 非사제 신분으로 설교를 할 경우 이단으로 정죄받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설교를 했다. 자신의 개인적 해석은 최소하고 오로지 텍스트만을 전달하는데 집중하였다.

 

   왈도파(Waldensians), 카타리파(Cathars)도 프란치스코처럼 非사제 신분으로 설교를 하고 교황청과 교회에 저항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교황, 교황청, 교회, 수도원, 사제의 조직에 절대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했다. 그는 청빈과 동시에 순종의 메시지를 철저하게 지켜 눈 밖에 나지 않았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는 여러 이단 파문, 복잡한 십자군 전쟁, 말 안 듣는 교회와 수도원에서 사제들까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단과 정통적 신앙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던 프란치스코는 정치적 걸림돌이었지만 그의 오직 '텍스트'와 '순종'은 당시 교황을 우습게 알던 이들에게 큰 모범이 되었고, 교황은 프란치스코를 인정한다.

 

   프란치스코의 설교는 해석이나 판단이 아니라 '텍스트' 였다. 그는 설파했지 문제가 될 만한 해석으로 설교는 하지 않은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행동과 설교는 당시 대다수 까막눈이었던 이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출판물 같은 존재였다. 교회와 사제들과 접촉이 없다면 대다수의 시민들은 성서와 접촉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회는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형제, 자매라는 표현을 처음 썼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다. 형제회와 수녀회를 조직하고 모든 이들을 가족같이 '네 이웃'으로 돌보았다. 그가 조직한 형제회는 재산도 건물도 없었고 말이 형제회라는 조직이지 거지와 다름 없었다. 매일 구걸하고 그것 마저도 나눠주었다.

생태학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들(Fioretti di San Francesco)'프란치스코 사후 1세기나 지난 시점에 그의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책으로 우골리노 브루네포르테 (Ugolino Brunforte)가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서로 보기는 무리가 있고 설화나 우화를 담은 문학적 성격의 책이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는 프란치스코를 '생태학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한다. '태양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가 그가 직접 쓴 시로 그 내용이 남아 있다. 원문은 링크에서 볼 수 있다.

 

태양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

 

Cantico delle creature - Wikipedia

Da Wikipedia, l'enciclopedia libera. Il Cantico delle creature (Canticum o Laudes Creaturarum), anche noto come Cantico di Frate Sole, è un cantico di San Francesco d'Assisi composto intorno al 1224 fra San Damiano e il Vescovado di Assisi (le ultime due

it.wikipedia.org

 

   프란치스코 시대에는 환경, 생태, 자연은 보호나 지켜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던 시기였다. 그가 시를 통해서 태양과 달에 대해 형제, 자매라 표현한것은 대단히 독특한 시선이 확실하다. 12-13세기 이후 대항해 시대에서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창 1:28을 근거로 자연은 '정복'과 '다스림'의 대상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정복과 다스림을 우위가 아니라 수평적 입장에서 본 것으로 여겨진다.

 

   과한 확대해석으로 볼 여지도 있다. 시 자체는 태양, 달, 별, 바람, 물, 불, 땅에 대해 언급을 한다고 하지만 사후 해석이 너무 첨가된게 아닌가 되물어 볼 수 있다. 하지만 12-13세기 뿐만 아니라 미국의 조지 퍼킨스 마시(George Perkins Marsh)가 등장하기까지 자연, 상태, 환경 보존에 대한 관심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수평적 사고 방식으로 자연을 바라본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진일보한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톤수(tonsure) 머리 스타일, https://aleteia.org/2017/07/25/why-do-monks-have-strange-haircuts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만난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는 조직을 만든 프란치스코는 이 모임의 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간다. 아시시의 주교 귀도(Guido)와 사비나의 추기경 조반니 디 산 파올로(Giovanni di San Paolo)의 도움을 받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만나 구두 약속을 받게 된다. 정식 승인은 1223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받게 된다.

 

   당시 왈도파, 카타리파가 非사제 설교와 미사 문제로 이단 정죄를 받은 상황에서 프란치스코의 요청은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형제회가 철저하게 교황, 교황청, 교회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하며 왈도파와 카타리파와 선을 그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무소유, 청빈, 설교' 뿐이었다. 수도원, 재산, 위계, 머물 것도 없는 형태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교황 입장에서도 이단 파문과 정죄로 머리 아픈 상황에 교회의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았다. 여기 저기 들끓는 非사제들의 통제되지 않는 움직임을 프란치스코의 승인으로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게 되었다. 큰 문제가 아니라면 '제도 교회' 안에 있다는 선언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이후 프란치스코와 그의 모임인 형제회는 설교할 수 있는 권한, 성직자로서의 표시인 톤수(tonsure)를 받아 이단 정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교황이 꿈에서 교회를 떠받치고 있던 프란치스코를 봤다는 부분은 넘어가자. 이왕 추측을 하겠다면 다른 부분으로 접근해보자. 말 그대로 교황의 승인을 정치적 해석이 아니라 소설로 접근해보자.

  형제회와 프란치스코의 '무소유, 청빈, 설교' 행위들은 교황에게 상당히 걸리적 거렸을 것이다. '또? 왈도파냐?'하고 반응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교황파(Guelfi)로서 아시시는 이웃 페루자와 전쟁을 치뤄서 졌다. 프란치스코는 1년간 감금 당하고 크게 아파서 고통 받았다. 그리고 이미 축출한 귀족이 되돌아 와서 아시시의 정권을 다시 잡게 된다. 고위 관리직 포데스타를 잘못 뽑아서 아시시 전체가 성사 금지(Interdict) 즉 종교적 사형을 당한다.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왜 교황파와 신을 따르는 이들을 돕지 않을까?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신앙적 의문 대신 섬기는 것을 택한다. 낮은 자. 말이 쉽지 재벌급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부족함 없는 그가 낮은 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시시 패전 후에도 그 아비의 재산이 거의 보존 된 것으로 보아 프란치스코의 가문은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한 주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산과 보장된 삶을 버렸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아시시와 움브리아에서 가장 낮은 자, 교황청과 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로 살겠다. 청빈하게 '텍스트'만 전하겠다고 교황을 설득한다. 상인 집안에서 자란 부잣집 도련님의 말빨과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며 삶의 굴곡을 맛본 프란치스코의 호소는 교황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권위적이고 교회를 질서를 중시했으며, 주변인들과 신앙인들에게 관대했다는 점을 보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낮은 자'로 빈민과 병자를 돕겠다고 요청하는 프란치스코를 부정하고 내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12-13세기 파문 당한 집단

명칭 주장 요지 이단으로 간주된 이유 활동 시기 대표 인물
브뤼시안파
(Petrobrusians)
성상과 십자가 숭배 거부,
어린이 세례 거부,
교회 건물과 미사 부정
성례전 부정,
교회 제도 부정
12세기 초
페트루스 드 브뤼
(Petrus de Bruys)
앙리파
(Henricians)
사제 제도 비판,
평신도 설교,
도덕 중심 신앙
교회 권위 도전,
비사제 설교
12세기 중반
앙리
(Henricus of Lausanne)
아말리크파
(Amalricians)
범신론적 신비주의,
신과 인간의 합일 주장
교리 왜곡,
신과 인간의 동일시
12세기 말~13세기
아말리크 드 베네
(Amalricus de Bène)
카타리파
(Cathars)
이원론, 물질 부정,
성례전-성직 부정,
철저한 금욕주의
교회-성례전 전면 부정,
대체 종교 조직
12~13세기
집단 운동 
왈도파
(Waldensians)
자발적 청빈,
자국어 성경,
평신도 설교
성직 권위 부정,
평신도 설교,
교황 거부
12세기 말~
피에르 발도
(Petrus Valdus)
요하킴주의자
(Joachimites)
성령의 시대 도래,
교회 구조 종말 예언
교황 권위 해체 전망,
종말론적 열광주의
12~13세기
요하킴 드 피오레
(Joachim de Fiore)

왈도파는 실패한 종교개혁?

   왈도파의 주장은 이후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초기 주장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는 만인사제주의, 모국어-자국어 성서 읽기, 청빈한 삶, 교황과 성직 권위에 대한 저항, 신앙고백의 중요성 등 거의 일치한다. 마틴 루터가 제도의 개혁을 위해 권위에 맞섰다면 왈도파는 그런 조직적 대항보다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Lucius III)는 왈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인노첸시오 3세에 이르러 종교재판과 이단심문이 강화된다. 화형, 고문, 강제 개종, 재산 몰수로 왈도파는 처절하게 진압 당한다. 당시 카타리파 진압이 동시에 이뤄졌다. 남부 프랑스의 카타리파를 알비파로 불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무려 알비 십자군이 조직되어 군사적 행동까지 벌어졌다.

 

   왈도파가 알프스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 일부가 생존하여 종교개혁까지 이어지면서 명맥을 유지한다. 카타리파는 왈도파와 달리 사실상 가톨릭의 대체 종교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에 교황청과 주변세력에게 철저한 압박을 받았다. 카타리파는 지역적으로도 남부에 해안이 있어 도망갈 구멍하나 없이 알비 십자군과 맞서야 했다. 교황청의 집중적 공격을 받아 사실상 명맥이 끊긴다.

형제회의 분열

  형제회는 1223년 교황청의 승인으로 공식적 수도회가 된다. 이전 형제회는 교황의 인증 없는 규칙(Regula non bullata, 1221)을 기준으로 성서 텍스트를 기준으로 하는 청빈하지만 꽉 조이는 규칙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교황 인증 규칙(Regula bullata, 1223)이 적용되면서 형제회는 교황청 산하의 확고한 조직이 된다.

 

   프란치스코는 교황과 교황청에 납작하게 엎드려 질서에 순응했지만 '거리두기'도 역시 철저했다. 부유한 교회와 수도원과의 괴리, 제도화된 형제회의 변질 우려, 말과 형식보다는 텍스트 중심의 행동과 실천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1220년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형제회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226년 프란치스코 사후 형제회는 관대파(Conventuals, 관용파)와 엄격파(Spirituals, 청빈파)로 분열을 일으킨다. 

관대파  

   기존 수도원과 흡사하게 정착형 수도원, 재산에 대한 관대함, 교육 행정의 제도로 변화를 모색한다. 프란치스코가 강조했던 청빈한 삶을 유지하지만 교황청의 제도와 지시에 어느 정도 따라가는 형태를 취한다. 교황은 제도화 되어가는 관대파를 인정하고 이들을 수용한다.

 

   이후 교황청에 흡수되어 영향력을 넓어졌고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버금가는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tura)를 배출한다.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대전기(Legenda Maior Sancti Francisci)'와 '소전기(Legenda Minor)'를 집필한다. 1263년 '대전기'가 공식 승인을 받고 이외 버전들은 사라진다. 

 

엄격파

   프란치스코의 생전 삶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정착하지도 않고 수도원 개설도 하지 않았다. 형제회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극히 반대하는 자세를 취한다. 일부는 종말론적 성향까지 보이며 관대파와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교황 요한 22세(John XXII)는 엄격파를 교회 밖의 모임으로 여기고 이단으로 규정한다. 

 

 

중세 최초의 ‘크리스마스 구유(praesepium)’를 만든 사람
프란치스코는 1223년 이탈리아 그레치오에서 동물과 사람을 동원해 실물 성탄 구유 장면을 재현했다.
신앙 체험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구유 전통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https://www.radiosienatv.it/casole-delsa-domani-la-seconda-rappresentazione-di-praesepium/

말년엔 거의 장님
질병과 극심한 고행 때문에 시력을 잃다시피 했다. 햇빛도 못 보고, 고통이 심해졌다.
그 시기에 그는 유명한 찬가인 ‘태양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를 지었다.

 

‘성흔’을 받은 최초의 인물
1224년, 라베르나(La Verna) 산에서 기도 중에 손-발-옆구리의 상처가 나타났다.
교회는 이를 인류 최초의 성흔(Stigmata) 으로 인정했다.

 

술탄을 만난 프란치스코
1219년 5차 십자군 전쟁에서 프란치스코는 술탄 말리크 알카밀(al-Malik al-Kamil)를 만나러 간다.
이슬람 1차 사료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루이 마시뇽(Louis Massignon)은 15세기 이슬람 문헌에서 술탄의 조언자 파크르 알딘(Fakhr al-Dīn)과 한 기독교 수도승(rahib) 의 만남을 찾았고 이 부분을 프란치스코와 술탄의 만남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1776년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캘리포니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선교소(Mission)을 세웠다.
현재 선교소의 흔적이 미션 돌로레스’(Mission Dolores)라는 유적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