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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의 저자는 자녀가 없었다? 욥기는 무슨 의도로 썼나?

by napigonae 2025. 4. 10.

 

 

자식 잃은 욥에 대한 묘사

     욥기의 저자는 자녀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글을 써 본다. 욥기는 산문으로 된 서문(1-2장)과 결말(42장), 그리고 시적 대화로 구성된 본문(3-41장)으로 구성된다. 서문에서는 욥이 일곱 아들과 세 딸, 막대한 재산을 지닌 의인으로 등장하며, 사탄의 도전으로 인해 재산과 자녀를 한꺼번에 잃게 된다(욥 1:18-19). 욥의 반응은 비통함 속에서도 경배와 신앙 고백으로 나타난다(욥 1:20-21). 흥미로운 점은, 자녀의 죽음이라는 극단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는 심리적 애도 과정이나 자녀 각각의 개별성에 대한 언급 없이, 상실을 매우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욥기의 결말(욥 42:12-17)에서는 욥이 이전보다 두 배의 재산을 회복하고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얻게 된다(욥 42:13). 특히 딸들의 이름이 여미마, 긋시아, 게렌합북으로 구체적으로 명시되며(욥 42:14), 그들의 미모가 온 땅에서 으뜸이었다고 칭송된다. 더불어 그들은 형들과 함께 유산을 상속받는다(욥 42:15). 이는 고대 근동 사회의 여성 상속 규범을 고려할 때 파격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이 회복의 묘사는 상실의 본질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는 그저 몇 명이라거나, 겉보기 특징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절대 최강 지존의 존재다. 자녀를 다시 얻었다는 사실이 곧 상실의 회복을 의미일 수 없다. 오히려 이는 상실의 본질에 대한 미묘한 오해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욥기 작가는 자녀가 부모에게 어떤 가치이고 존재인지 모른다. 잃은 자녀들은 숫자로만 기술되고 후에 얻은 자녀들은 이름과 외향적 가치만 기록하고, 아무런 감정도 따라붙지 않는다. 본문이 자녀를 이런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욥기 작가에게 자녀란 상실의 대상이 아니라 재산 목록의 일부처럼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성서 전체를 통틀어 자녀를 잃거나 자녀로 인해 고통받는 부모의 정서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예는 적지 않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의 심리적 고통은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독자는 상황의 극단성 속에서 아버지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5장에서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예수에게 간청하며 굴욕을 감수하는 장면이나,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 슬픔과 원망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성서 곳곳에서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슬픔, 절망, 간절함이 정서적이고 감정적으로 나타난다.

고통의 원인을 알고 싶은 욥

 

   이러한 사례들과 비교할 때, 욥기에서 자녀 열 명을 한 번에 잃은 사건은 내용의 일생일대의 중대한 사건에 비해 감정적, 정서적 묘사가 너무나 부족하다. 단지 욥이 머리를 밀고 경배했다는 행동 서술은 신앙의 자세를 강조하는 데 그치며, 자녀 각각에 대한 개별적 애도나 회상의 서사는 없다시피 한다. 이는 욥기의 신학적 초점과 장르적 제약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동시에 정서적 공감에 기반한 경험의 부족함을 시사하는 문학적 특징일 수도 있다. 작가가 부모로서의 경험이 있었다면, 자녀 상실이라는 주제에 대해 보다 정서적, 개별적 차원에서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비교는 기존 주장의 설득력을 한층 보충해 준다.

 

   욥이 자녀를 잃은 직후 보여주는 반응은 전통적인 애도의 제스처와 신앙적 선언으로 구성되며, 이후 구체적인 슬픔의 서사나 감정적 변화는 없다. 이는 욥기의 중심 주제가 인간의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 속에서 신의 정의와 인간의 반응을 조명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상실의 정서적 실재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사무엘하 18:33에서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접하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를 반복하는 장면은 자녀 상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의 전형적 예시다. 같은 성서 문학 내에서도 감정 표현들이 이처럼 다양한데, 욥기에서만 유독 간략한 묘사로 처리되는 것은 단순한 장르 차이로 설명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작가에게 자녀는 생명이 아니라 숫자였고, 한 줄로 지워지고 한 줄로 다시 채워졌다. 자식이 아니라 리스트였다. 특히 결말부의 딸들은 외모, 이름, 상속이라는 요소로 요약되며, 그들의 성격이나 욥과의 관계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이상적인 딸, 혹은 이상적 회복이라는 개념을 구현하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역할로 읽힐 수 있다. 만약 작가가 실제로 자녀를 양육한 경험이 있었다면, 상실과 회복을 이렇게 +, -로 다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이게 여기서 나온다.축복의 말이 아니라 성토하고 욕하는 것.

 

신은 네 신앙의 깊이로 천국을 보장하지 않는다.

   욥기는 믿으면 천국가고, 의로우면 복을 받고, 고통은 죄의 대가라는 통념을 모두 부순다. 종교가 신과 인간 사이에 계약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그 계약을 조건으로 불안에 떠는 인간에게 안정과 구원을 약속해왔다는 사실은 종교들의 공통 사항이다. 기복신앙은 그중 가장 기초적인 형태다. 신을 믿는 대가로 얻는 내세, 천국, 축복은 인간이 신을 거래 대상으로 상상해온 흔적이다. 이러한 종교의 모습에서 기복신앙이 작용했고, 성서의 대다수 문서 역시 이 거래 시스템을 반복하며 유지한다.

 

   욥기의 등장과 함께 이 거래 체계는 의도적으로 부서지게 된다. 아무런 죄도 없는 욥이 모든 것을 잃고, 자식이 죽고, 몸이 망가진다. 친구들이 아무리 고전적인 보응신학, '네 죄를 네가 알렸다?'를 반복해도, 욥은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신은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는다. 해답 없는 고통, 설명 없는 재앙, 보상 없는 신앙. 이 세 가지가 한 인간의 삶을 부수는 방식으로 욥기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전통 종교가 강조해온 믿음의 대가라는 발상은 욥기의 전개와 함께 제도적 허구로 드러난다.

 

   고통받는 자는 위로받지 못하고, 의로운 자는 보상받지 못하며, 하나님은 그 어떤 정당한 논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욥은 믿음의 자세를 거두지 않는다. 보상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설명을 받아서도 아니다. 어떤 해석이나 윤리도, 그의 신앙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이제 거래의 수단이 아니라, 일종의 고집이나 신념으로 보기이고 한다. 욥기의 신앙은 신학적 도구도, 도덕적 보상 체계도 아닌, 오직 무상(無償)의 지속이라는 상태로 전환된다.

 

   구약의 다른 문학적 서사들은 대부분 신앙과 복, 순종과 구원 사이의 인과관계를 유지한다. 에스더는 민족의 위기 속에서 금식과 순종으로 왕의 호의를 얻고, 이를 통해 유대 공동체 전체가 구원받는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했다가 재앙을 겪지만, 니느웨 사람들의 전폭적인 회개와 함께 도시 전체가 멸망을 면한다. 룻은 시어머니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고, 그 행위가 보아스를 통해 보상되며 다윗 왕조의 시작점에 위치하게 된다. 이 모든 서사는 인간의 도덕적 선택과 하나님의 응답 사이에 약속된 보상작용, 윤리적 행위가 직접적 보상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전제한다. 이런 작품들은 기복신앙과 권선징악이라는 종교적 틀을 문학적으로 체계화한 결과물이다.

 

   욥기에서 기복신앙은 더 이상 작동불능 정도가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폐기 처리 된다. 이는 파기(disavowal). 원래부터 믿음과 신앙을 가치로 하는 거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믿음과 신앙은 보상이 없는 상태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신앙이 아니라, 믿음을 종교로부터 분리하는 전환이다. 신앙은 더 이상 구원의 장치가 아니며, 어떤 조건도 붙지 않은 절대적 위치가 된다. 욥기의 메시지는 결국 단 하나다. 고통은 설명되지 않으며, 신앙은 그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도 계속된다. 이 말은 설명이 아니라, 기복신앙을 부수는 강렬한 도전이다(Tillich 1957; Barth 1936–1975, Church Dogmatics).

내기? 쫄?

후대에 새로운 에디터의 손길, 저자가 여러 명?

   욥기의 결말부(42:7–17)는 본문의 시적 중심부(3:1–42:6)와 비교할 때, 문체적·신학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후대 편집자가 삽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삽입설을 문학적, 언어적, 신학적 단서를 근거로 뒷받침하며, 결말부가 욥기의 급진적 주제를 약화시키고 기존 신학 구조로 회귀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먼저, 문체적 단절은 삽입설의 주요 근거다. 본문의 대부분은 히브리 시로 이루어져 있으나, 서두(1–2장)와 결말부(42장 후반)는 산문 형식을 띠고 있다. 이 문체 차이는 단순한 장르 전환이 아니라, 내용의 전달 방식과 감정의 표현 방식까지 바꾸어 놓는다. 시적 담화가 고통, 분노, 부조리함을 직접 언어화하는 데 반해, 결말부의 산문은 상황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데 집중한다.

 

   신학적 이야기의 맥락 역시 달라진다. 중심부에서는 신이 욥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피하며 침묵을 유지하지만, 결말부에서는 신이 직접 욥을 인정하고, 친구들을 꾸짖으며, 복을 되돌려주는 서사로 바뀐다. 이 전환은 이유 없는 고통과 무력한 신앙이라는 본래의 갈등을 약화시키고, 다시 보상 중심의 기복신학적 질서로 회귀시키려는 편집적 의도로 충분히 보일 수 있다.

 

   정서적 표현의 결여는 이 결말부가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강화하는 또 하나의 요소다. 특히 자녀를 다시 얻게 되는 장면에서 욥은 감정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자녀를 모두 잃은 직후에도, 새 자녀를 얻는 순간에도 슬픔이나 회복의 감정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히브리어 원문상 ‘애도하다’(אֵבֶל, 에벨), ‘통곡하다’(תַּאֲנִיָּה, 타아니야) 같은 감정적 어휘는 일절 사용되지 않으며, 대신 간단한 사실 설명과 숫자만이 있다. 이는 감정의 회피라기보다는 감정 자체를 이야기의 흐름에서 다룰 수 없었건 걸로 보인다. 부모로서의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초반에 죽은 자녀들은 단 한 명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으며, 어떤 특성이나 자녀들의 개별적 묘사도 없이 사라진다. 그들은 서사적, 감정적으로도 지워진 존재들이다. 반면 결말부에 다시 얻은 자녀들, 특히 세 딸은 이름이 나오고 외모와 상속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서술 방식의 차이는 편집자가 본래 이야기의 정서적 무게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잃은 자녀의 의미를 지우고, 새 자녀에게 보상의 서사를 덧씌우려 했다는 증거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정서적 반응이 없는 이 구성은 자녀 죽음을 하나의 서사적 장치, 플롯 전환의 기점으로만 처리하려는 서술적 의도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정서 표현의 부재는 구약 성서 전반의 가족 상실 서사들과 뚜렷이 대비된다.

 

   첫째,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믿자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했다”(창 37:34). 슬픔은 행동, 언어, 시간의 흐름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둘째, 사무엘하 18장에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자 “내 아들 압살롬아”를 반복하며 통곡하고, “내가 너 대신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절규한다(삼하 18:33). 고통은 반복, 자기 대입, 절규로 강화된다.

 

   셋째, 룻기 1장에서는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나는 이제 마라(괴로움)라 불러달라”고 말하며, 자신의 정체성 전체를 슬픔으로 대체한다(룻 1:20).

 

   넷째, 예레미야 애가에서는 “내 자녀들이 적에게 사로잡혀 갔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상하였다”(애 1:5, 16)며 가족 잃은 슬픔조차도 정밀하고 세밀하게 묘사된다. 이런 예들과 비교하면, 욥기의 결말부는 정서 표현이 다소 부족하다는걸 넘어서는 결핍을 보이며, 이로 인해 서사적 진정성과 감정의 흐름이 끊긴다.

 

성서 속 자녀를 잃었을 때 표현 비교

본문 사건 정서 표현 표현 강도
창세기
37장
야곱
요셉이 죽었다고 착각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 묶고, 오래 애통
אֵבֶל 슬픔과 애
강함
사무엘하
18장
다윗
아들 압살롬의 죽음
‘내 아들 압살롬’ 반복, 대신 죽고 싶다는 절규
יְלָלָה 통곡과 울부짖
매우 강함
룻기
1장
나오미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음
자신을 ‘괴로움’(마라)라 부르며 정체성 자체를 바꿈
מָר 쓰다, 고통스럽다
강함
예레미야 애가
1장
예레미야
자녀들이 포로된 사건
눈물, 마음의 상함, 정밀한 슬픔 묘사
דִּמְעָה 눈물, 슬
매우 강함
욥기
1장

자녀 열 명 잃음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엎드림
고대 근동의 형식적 고통 표현
약함

 

   이러한 삽입 구조와 정서 억제는 단순한 문학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를 바꾸고 비튼 흔적으로 읽힌다. 욥기 중심부는 보상 없는 신앙, 설명 없는 고통, 응답 없는 신을 보여주며 전통 신학의 근간을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결말부는 이런 급진적 결론을 거두고, 다시 보상의 언어로 독자를 회유한다. 자녀를 다시 주고, 재산을 되돌려주고, 욥을 이전보다 더욱 진정한 복된 자로 회복시키는 구조는, 읽는 이의 불안을 잠재우고 믿음과 신앙의 체계를 회복시키려는 의도적 개입일 수 있다. 이러한 서사적 평형 복구는 문학적으로는 완결처럼 보일지 모르나, 원저자의 파괴적 질문을 덮어버리는 조작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Clines 1989; Habel 1985; Ehrman, 2013).

 

  결말부의 문체적 이질성, 정서적 결핍, 그리고 전통적 신학 복구 구조는 단순한 이야기 정리가 아니라, 욥기의 급진적 사유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추가적 결론으로 수습하려는 후대 편집자의 의도된 개입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원래 욥기는 어떤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 신,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 세계, 그 안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제시했다. 이 구조는 기복신앙을 성서 내부에서 정면으로 파괴하려는 시도이며, 윤리적 거래로서의 신앙과 믿음이 조건이 아니라 개인의 필수적이고 필연적 행위로만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보여준다. 고통은 설명되지 않고, 신은 책임지지 않으며, 믿음은 응답 없이 지속된다. 이것이 욥기의 본질이다.

 

   그러나 후대 편집자는 이 기복신앙의 파괴 설명을 이해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했다. 그는 열린 결말, 즉 해석과 긴장을 남긴 상태로 마무리되는 본래의 서사를, 닫힌 결말로 전환시켰다. 욥이 복을 되찾고 자녀를 다시 얻고 장수한다는 말은, 문학적 안정감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기복신앙 파괴라는 충격은 철저히 제거된 처리 방식이다. 편집자는 욥기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했더라도 독자와 공동체를 위해 신의 정의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 즉, 성스러운 조작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삽입의 흔적은 되레 원문이 품고 있던 긴장을 더욱 부각 시킨다. 감정이 억제된 장면, 설명되지 않는 고통, 신의 침묵, 고통 속에서도 이어지는 신앙, 이 모든 것들은 신앙의 결과가 보상이어지지 않는다는 점, 믿음은 대가로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욥기의 주제이며, 이것이야말로 기복신앙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한다. 결말의 개입은 욥기 저자의 의도를 바꾸려고 했지만, 흔적이 남긴 위화감은 오히려 기복신앙 부정이라는 원저자의 의도를 더 진하게 만든다.

욥의 마누라 미스터리; 욥의 숨소리도 싫다는데, 자식은 어디서 났나?

   욥기의 부인은 2장에서 단 한 번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이 짧은 발언은 단순한 불만이나 충고가 아니라, 욥의 신앙과 존재를 동시에 부정하는 극단적 거절이다. 이후 본문 전체에서 그녀는 사라지고, 이름도 감정도 역할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욥은 “내 아내가 내 숨결을 싫어한다”고 말한다(욥 19:17). 이 구절은 단지 불화를 넘어서, 인간관계의 가장 최악의 단절, 즉 혐오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밥 먹는 모습이 싫은 순간, 관계는 끝"이다. 숨소리조차 싫다고 말하는 이 부부에게 다시 자녀가 태어났다는 상상은, 도저지 이해할 수 없는 억지다.

 

   그럼에도 결말부에서 욥은 다시 자녀를 얻게 되고, 그 자녀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만약 그가 여전히 같은 부인과 함께 있었다면, 병간호 장면, 재결합, 회복의 정서적 암시 중 하나쯤은 최소한 한 번은 나타났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결고리는 전혀 없다. 욥의 부인이 초반에 등장하고 이후 완전히 사라진다. 이는 산문부의 후대 삽입자가 기존 시적 서사에서 부인을 제거한 사실을 놓쳤거나, 혹은 새로운 자녀의 어머니를 설정하지 못하고 방치한 결과로 보인다. 고대 문헌의 병합 편집에서 자주 드러나는 현상, 서사 단절, 인물 기능의 중복 또는 소거, 감정선 결여는 여기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더불어 외경 『Divrei Iyov』는 이 공백을 감당하지 못하고 욥에게 두 부인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처음 부인인 우짓(Uzit)은 고통과 빈곤 속에서 머리카락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죽고, 이후 욥은 야곱의 딸 디나(Dinah)와 재혼하여 자녀를 낳는다. 이 외경은 정경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서사를 확장한 결과지만, 동시에 정경 본문의 단절과 불연속성이 분명하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욥기의 부인 문제는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편집 실패와 복수 서사 합치기의 흔적으로 봐야 한다.

한 미모해서 이름이 남은 욥의 딸들; 노아의 부인은 이름 없더라

   구약 전체에서 이름이 명시된 여성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며, 대부분은 특정한 서사적, 신학적 목적을 지닌 인물들이다. 이들은 서사의 흐름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거나, 신의 역사에 직접 참여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예컨대 미리암, 룻, 한나, 아비가일, 드보라 등은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니라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 개인적으로 상징성과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이들은 이름을 통해 그 서사 안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갖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욥기의 결말부에 등장하는 세 딸, 여미마, 그시야, 게렌합북은 이례적이다. 이들은 성서에서 보기 드물게 딸들의 이름이 모두 명시된 경우이며, 유산 분배까지 받은 유일한 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남게 된 이유는 다른 여성들과 같이 이야기 속의 주체적 여성성이나 신앙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땅에서 가장 아름다웠다(욥 42:15)”는 외모에 기초한다.

 

    “그 땅에서 가장 아름다웠다(욥 42:15) 라는 구절은 여성의 이름이 불리는 이유를 외모로 한정하면서, 성서 서사 안에서 여성의 주체성, 신앙, 행위보다는 외형적 조건에 따라 가치를 부여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시각을 드러낸다. 여성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통상 그 인물이 어떤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사하지만, 욥기의 딸들은 그 틀을 박살내고 오히려 여성의 정체성을 철저히 남성적 시선과 미적 기준이라는 틀에 끼워 넣는다.

 

   유산 분배가 파격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이 딸들의 권리,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바탕으로 하는 결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를 보인다. 유산은 욥의 기준 없는 일방적 결정으로 서술되며, 이는 여성 권리의 제도적으로 확장이 아니라, 그 아비의 기준없는 혜택이라는 결정을 통해 가능해진 특수한 경우로 보인다.

 

   욥기 전체가 전통적 기복신앙에 대한 격한 파괴로로 구성되다가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 전통적 보상 윤리로 연결되는 구조를 갖는 만큼, 결말의 여성 서술도 이와 같은 흐름을 같이한다. 즉, 고난을 이겨낸 욥의 회복이라는 서사 속에서 딸들은 보상의 일부로 제시된다. 이때 여성은 자율적 인격체가 아니라 ‘회복된 질서와 기복신앙’ 속의 악세사리로로 기능한다.

 

   이러한 요소는 여성신학적으로 욥기 42장을 강하게 비판하게 만든다. 딸들의 이름이 성경에 등장한 이유가 여성 존재의 존엄성이나 신학적 기여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외모에 기초했다는 사실은, 성서 속 여성 묘사의 가장 전형적이고 문제 사례로 볼 수 있다. 여성의 가치를 외형적 아름다움으로 보는 시선이 어떻게 성서에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 지표이긴 하다.(Trible 1984; Brenner 1985; Bird 1983).

 

   욥기 42:15에서 딸들이 형제들과 함께 유산을 받았다는 서술은 당시 고대 근동의 상속 규범과 성서 내부 법전의 제약을 감안할 때 상당히 독특한 장면이다. 이를 단순히 가부장제 재현으로만 읽는 것은 여성신학의 분석을 쪼잔하게 만든다. 실제로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는 형제가 있는 경우 여성이 유산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고, 슬로브핫의 딸들(민 27:7, 민 36:6–7)  처럼 특수한 청원이 있어야만 허용되었다. 이와 비교하면 욥의 결정은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여성을 경제적 주체로 인정한것으로, 여성의 법적, 재산적 권리를 인정한 전례 없는 예로 볼 수 있다. 비록 그 동기가 미모나 악세사리로 흐려질 수 있는 한계는 있으나, 균형 잡힌 여성신학적 비평이라면 이와 같은 구절에 품고 있는 '전통적 여성 차별의 파괴' 또한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이쁘니까 유산 준다

그래서..

   신은 어떤 설명도 주지 않고, 어떤 대가도 약속하지 않는다. 고통은 죄와 연결되지 않으며, 믿음은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욥기는 종교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 기복신앙을 정면에서 부인한다. 고통은 설명되지 않고, 그 안에서 신은 침묵하고, 관계는 무너진다. 그런데도 믿음과 신앙은 유지되어야만 옳다는 것이다. 욥기는 그 불가능한 자리에 신앙을 놓는다. 대가성 복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놓지 않는 믿음. 이것이 이 본문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 인간 경험의 일반적 감정들과 복잡한 연속성과 관계 구조가 충분히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녀 상실과 회복을 ‘대체재로 보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은, 욥기 작가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 '부모입장에서 자식이 가지는 거의 모든 가치'라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감정적 반응을 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식을 키운 사람이라면, 죽은 자녀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새 자녀를 숫자와 자녀의 미모로 보상받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식을 키워 본 적이 없다면, 이렇게 쓸 수도 있다.

 

   이러한 결말은 욥기의 주제는 기존 자주 보이는 욥기의 의미를 훼손한다기보다, 오히려 원래의 급진적 주제를 감당하지 못한 흔적을 드러낸다. 아마도 새로운 저자는 이 이야기를 마무리를 지으려 했고, 기복신앙 체재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 신은 거래하지 않는다. 기복신앙은 신앙은 무너져야 한다.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시편 127:3) 내기로 선물을 앗아간 신과 슬퍼하지 않는 아비, 숫자로 복구된 새로운 자녀, 미모로 이름이 남은 딸들, 욥기는 참 알흠다운 이야기다.

 

 

욥기 원형은 아람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욥기 사본(4QJob)은 마소라 본문보다 축약돼 있으며 아람어식 표현이 섞여 있다.
일부 학자는 욥기가 원래 아람어로 구성되었고 이후 히브리어로 옮겨졌다고 본다.

 

욥기의 ‘사탄’은 후기 유대교나 신약의 악마 개념이 아니다.
욥 1–2장의 사탄은 고대 왕정 시대 궁정의 감찰관 역할을 하며, 신 앞에서 인간의 동기를 시험하는 역할을 한다.
히브리어 정관사 "하-사탄"(הַשָּׂטָן)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직책을 뜻하는 보통명사다.

 

엘리후는 가장 후대에 삽입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엘리후의 이름은 도입부에서 등장하지 않다가 32장에서 갑자기 삽입되며, 문체와 어휘가 본래 대화체와 다르다.
일부 사본에서는 엘리후 연설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욥기와 이집트의 ‘생각하는 사람’ 전통의 유사성
이집트 문헌 중 ‘생각하는 사람의 항변’(The Dispute Between a Man and His Ba)은 의로움의 보상 문제를 다룬다.
이 문헌은 욥기의 전체 주제와 유사하며, 지중해 동부의 공통된 고통 이해 전통을 암시한다.

 

욥기의 새와 짐승 은유는 고대 점성술과 밀접하다.
욥기 38–41장은 리워야단과 베헤못, 별자리와 새들의 이동을 언급한다.
당시 바빌로니아-아시리아 천문 관찰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