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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유명한데,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왜 안 유명할까?

by napigonae 2025. 6. 16.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이하 월리스)는 진화론에서 찰스 다윈과 쌍벽을 이루는 성취를 이뤘는데 어째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을까? 월리스는 1854–1862년, 약 8년간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페낭 일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자바, 발, 보루네오섬의 사라왁, 폰티아낙, 순다 열도 등의 지역을 탐험하고 많은 생명체를 관찰하고 수집한다. 말레이 반도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는 것은 오해다. 실제 말레이 반도는 약 1년간 머물렀고 해마다 지역을 이동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13/jan/20/alfred-russel-wallace-forgotten-man-evolution

1855년 사라왁의 법칙(Sarawak Law Paper)

    월리스는 영국 학술지 'Annals and Magazine of Natural History'에 '새로운 종(種)의 출현이 등장하는 법칙에 대하여(On the Law Which Has Regulated the Introduction of New Species)'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출간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종은 고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이미 함께 있던 종에서 출현한다.

   새로운 종은 먼저 있던 종과 연속성을 보인다.

   생명체의 종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 분화될 수 있다.

   종의 변화는 자연 법칙에 따른다.

새로운 종의 도입을 규정해 온 법칙에 대하여 전문

 

   이 논문이 실질적으로 생물의 진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종의 분화나 연속성에 관측된 결과를 내세웠다. 학계의 반응은 아주 미미했다. 결과만 나열하고 추론만 있고, How와 Why가 빠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월리스의 사회적 위치 역시 한 몫했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고, 측량사로 일하며 각종 생물들을 수집 판매하며 나름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한다. 학계의 변두리에서 있는데다 '사라왁의 법칙'은 학술적 인정을 받는 저널에 게시되었다고 하더라도 큰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했다. '정교 교육을 못 받은 현장 경험자의 생태 관찰 결과' 정도로 인식되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월리스의 논문을 읽었다. 'Annals and Magazine of Natural History' 1855년 9월호를 보관하고 있었고, 그의 독서 노트에도 이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과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에게 각각 편지를 보낸다. 

 

   1856년 찰스 라이엘에게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외부 환경과 생존 경쟁이 종을 형성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걸로 보인다.' 같은 해, 조지프 후커에게는 '출판 노트를 준비 중이다. 다른 이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는걸 알 수 있고..' 라고 편지를 보낸다. 다윈은 이 시기 자신의 진화론과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이들이 있음을 경계하고 있었다. 

1858년 테르나테 논문(Ternate paper)

  월리스는 린네 학회(Linnean Society)를 통하여 테르나테 논문을 발표한다. 이 글은 과학적 논문 보다는 일종의 관찰 결과 중심의 에세이 형식에 가깝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명체 개체는 모두 생존하지 않는다. 먼저 죽는 개체는 열등하다.

   특정한 변이나 분화가 우세하면 종의 원형에서 멀어지는 변이 누적이 발생한다.

   이 원리는 자연이 무의식적으로 수행한다.

   단절된 환경은 변이나 분화 가능성을 높인다.

   생명체의 종은 자연의 무의식적 변이와 누적된 생존으로 기존의 종을 대체한다.

종(種)이 원형 종에서 무한히 벗어나려는 경향에 대하여 전문 

 

   발표 당시 학회장이었던 토마스 벨(Thomas Bell)의 '오늘 발표된 것 중 후세에 기억될 만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가장 권위있는 학술지에 실리고 발표되었지만 월리스의 테르나테 논문은 '관측 결과 중심의 일반화'를 다루면서 데이터와 계통 변화와 같은 근거가 전혀 없었다. '무의식적 자연의 변이'라는 개념은 생소한데다가 보수적 생물학계에 통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글은 '새로운 학설'로 학계에 논쟁을 촉발시키기 보다는 '내 의견은 어때?'라고 공손하게 묻는 태도에 가까웠다. 

 

   다윈은 월리스의 논문과 편지를 보고 상당히 당혹스러워 했다. 후커에는 '놀라운 우연이다. 월리스가 1842년 나의 초고를 봤다고 해도 이 보다 더 잘 요약할 수 없을 것', 라이엘에게는 '당신 말이 맞았다. 난 선수를 빼앗겼다'는 편지를 보내며 월리스 논문에 대한 충격과 심경을 토로했다.

 

   동시에 다윈은 자신의 자연선택 이론이 월리스의 주장과 거의 같았기 때문에 학자로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다윈은 자신이 월리스의 주장을 도용하지 않은 점을 확실히 했지만 자신이 발표를 미루면서 '표절'이나 '도용'의 문제에 빠질 수 있음을 걱정했다.

월리스는 왜 다윈에게 편지를 썼을까?

   다윈은 이미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와 여러 논문들로 명성을 쌓고 있었다. 월리스는 다윈에게 보낸 서신을 통하여 '비글호 항해기 흥미롭다. 당신 연구와 글 읽는게 즐겁다'라며 학문적 존경을 표한다. 정중한 표현으로 다른 학자들에게 자신의 성과를 보여주길 청하기도 한다.

 

   월리스는 다윈의 여러 저작을 통하여 이미 종(種)의 분화, 변이, 변종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알고 있었다. 1857년 다윈의 회신에서 '난 종과 변종에 대한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월리스에게 신뢰할만한 다른 학자들도 있었지만 공통적 관심사가 같았던 다윈은 더욱 신뢰할 수 있었다.

 

   월리스는 다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연구가 괜찮다면 다른 학자들에게 소개해주길 바랬다. 동시에 자신의 견해가 다윈의 견해와 겹칠 수도 있다는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학계과 교과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부분이다.

 

   하지만 '성실한 학술적 중개자'로서 다윈에 대한 월리스의 신뢰는 후대에 생성된 신화적 평가라는 비평도 함께 존재한다. 다윈이 월리스와 공동으로 학술 발표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만든 사후 평가라는 주장이다. 냉정하게 '성실한 중개자'로서 다윈은 조금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다윈-월리스 공동 발표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윈을 신뢰한 월리스', '다윈의 양심이 월리스를 학자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협력은 과학 윤리와 상징'이런 평가는 과학사에서 흔하게 보이는 사후 평가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긴장감이 흘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다윈의 서신, 월리스의 자서전, 사후 평가를 다루는 학자들의 기술로 그 간극이 메워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막상 '아름다운 두 학자'의 신뢰도에 대한 평가의 근거를 따지고 들면 '해석'으로만 접근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윈-월리스의 공동발표(Darwin–Wallace joint presentation)

  1858년, '종(種)이 변이를 형성하는 경향, 자연선택에 의한 변이와 종의 유지에 관하여(On the Tendency of Species to form Varieties; and on the Perpetuation of Varieties and Species by Natural Means of Selection)라는 3가지 형식의 개별 문헌을 한데 묶어서 공동발표한다.

 

    사실 월러스는 이 발표에 대해 다윈과 상의를 하거나 서신을 주고 받지 않았다. 다윈의 두 친구 라이엘, 후커의 의견 조율을 다윈이 받아 들인 것이다. 월러스는 다윈의 연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종의 분화나 변이와 같이 자신의 연구 주제와 일치할 것이라는 것은 몰랐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연구물이 학회에서 읽혔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I had no idea that Darwin had long been at work upon the same lines... I was astonished to find that he had been for so many years studying the problem and developing a theory closely resembling that which I had arrived at independently."

"난 다윈이 같은 주제로 오래 연구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가 오래 이 주제를 연구하고 내가 독자적으로 도달한 것과 비슷한 이론을 연구했다는 것에 놀랐다."

 

   월리스는 이 발표 이후, 학계에서 분명한 학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고 해서 확고학 생물학자로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동 발표에 참여하지 못하고 공동 논문에 대해 토론할 수 없었다. 방대한 자료와 체계를 갖춘 다윈의 글에 집중되었다. 다윈은 월리스는 높게 평가하면서 학계에 '선구자'로 말하기도 했다. 

 

    진화론의 공동 창시자로 이후 자신의 연구를 이어갔고 다윈과 연락하며 지낸다. 2인자로 굳어지면서 점차 다윈과 함께 다뤄지지 않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후 언급할 非과학적 행보도 월리스의 학자로서 위치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학자로서의 월리스

   현대 생물지리학의 출발점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전까지 생물의 분포는 기후와 외형으로 구분하는 성향이 강했고 한편으로는 분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분포의 원인, 지리적 경계로서 연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월리스는 1848-1852년 브라질 아마존 1854-1862년 까지 동남아시아에서 생물을 연구하며 서식지에 따른 생물 분포, 외형, 서식지를 연구했다.

 

   1859년 이전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월리스선(Wallace Line),  발리(bali)와 롬복(Lombok) 사이 선 너머 양측 생물들의 모습이 다름을 관찰하고 이 라인을 월리스선이라 이름 짓는다. 이 명칭은 이후 헉슬리(Thomas Huxley)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1869년 '말레이군도(The Malay Archipelago)'에서 월리스선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게 된다.

월리스선. https://www.reddit.com/r/MapPorn/comments/d0aqcq/wallaces_line_represents_a_biogeographical/

 

   위에서 언급한 '말레이군도(The Malay Archipelago)를 통하여 동남아시아 생물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방대한 연구를 시도했다. 이로 유럽에서는 동남아 생물군에 대한 귀중한 연구 결과를 얻게 된다. 월리스 이전 남미 생물체계를 연구했던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도 생물지리학의 초석을 마련했다. 훔볼트가 생물지리학의 선구자라면 월리스는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생물지리학의 창시자로 보는게 조금 타당할것이다.

 

   인간의 정신, 영성, 도덕성은 진화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가지면서 과학자로서 노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지적 능력은 진화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고등한 정신능력은 진화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1870년 '자연 선택 이론에 대한 기여(Contributions to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에서 '자연은 원시인의 뇌는 만들 수 있지만, 뉴턴과 셰익스피어의 뇌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왜 월리스는 교과서에서 사라졌는가?

   먼저 다윈의 학문적 성취에 비해서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장은 있지만 실질적 근거는 부족한 형식을 글로 학문적으로 부족한 감이 있다. 그의 글들은 공손하고 예의를 갖췄지만 당시 창조설과 자연발생설과 맞서 싸울만한 강렬한 근거는 갖추지 못하였다.

 

   다윈에 비하면 월리스는 어느 정도 성공한 사업가로 생물학을 공부한 인물을 아니었다. 그의 주변과 학술 단체에는 인맥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 만약 다윈과 공동 발표가 아니었다면 진화론이 등장하기 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주도적으로 발표했고, 월리스는 자신의 이론을 따로 명명하지 않고 다윈의 이론 옆에 선 '기여자'로 남았다. 이후 월리스는 위에 등장한 '자연 선택 이론에 대한 기여, 1870', '다윈주의; 자연 선택 이론의 설명(Darwinism: An Exposition of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 1889)', 진화론과는 좀 다르게 '목적', '방향'이 있다고 주장한 '생명의 세계(The World of Life, 1910)'를 출간했다. 진화론이 불완전하다고 보는 입장을 선택한 것.

 

   위 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정신, 영성, 도덕성에 대해 진화론만으로 설명이 어렵다고 주장. 급격하게 非과학의 세계로 이탈. 정신이나 지능도 철저하게 자연 선택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적과 현대 영성주의(Miracles and Modern Spiritualism, 1875)'를 통해 심령학(Spiritualism), 접신(seances)를 언급한다. 월리스는 이런 현상도 과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영혼, 사후세계, 육감(Sixth sense)의 실제 여부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생명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정신에 초월적 존재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생계형 생물학자로 처음 진출했던 아마존 탐험에서 표본 판매 사업은 실패, 동남아시아 탐사는 성공적, 사회주의자 성향으로 토지분배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실패, 전원 주택 사업을 했지만 실패. 말년에 과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연금을 받게 된다. 귀는 얇고 학자로서 경험도 부족했지만 열정 만큼은 당대 최강이었다.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다윈이 중요한 이유(Why Darwin Matters, 2006)에서 '월리스는 말년에 과학자라기 보다는 철학자나 선지자 같았다'고 평가했다. 다윈주의 진영에 끝까지 남았다면 '협력자', '조력자, '기여자' 위치보다는 더 강렬하게 과학계에 남았을 것이라 주장한다. 학계의 보통 이런 주장과 일치한다. 

다윈이 학계의 신사?

   월리스는 다윈주의 창시자로 과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다. 유일하게 잠깐 동남아시절 연구 성과가 진화론으로 연결되었다. 그가 사업에 성공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했다면 사업가가 아니라 학자로서 연구에 더욱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를 했기 때문이다. 

 

   좀 더 파고들어 보자. 다윈은 과학, 역사에서 상당한 신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다윈은 자신의 부와 학계 인맥, 네트워크를 월리스와 공유하지 않았다. 다윈은 월리스 말년 연금을 받는 것에 대해 한 표를 행사했던게 전부다. '신사'라는 이미지는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포장에 불과하다. 냉정하게 다윈은 월리스와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학문적 주제가 겹치는 것에 대해 거리두기를 했다. 월리스가 서서히 非과학적 성향으로 돌아설 때도 그의 생물학적 관점은 높게 평가했지만 영성이나 지능에 대한 주장에 대해 거리두기를 했다. 

 

   다윈은 월리스의 이론을 동시에 발표하지 않았나? 공동 발표는 맞지만 2개의 다윈 저작물과 1개의 월리스 저작물을 묶어서 발표한 것으로 공동 저자(co-author)가 아니라 개별 저자로 기록한다. 심지어 다윈의 두 친구 라이엘과 후커가 서문을 붙여 3개의 저작물을 하나처럼 만들었다. 이 발표에 깊이 관심이 없었다면 월리스의 저작이 뭔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월리스가 고생하며 쌓아올린 학문적 성과는 자신의 과도한 겸손으로 '공헌자', '기여자' 정도로 축소되었다.

중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월리스

   정확하게 어떤 이유에서 월리스가 변화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추정을 할 뿐이다. 월리스는 산업혁명이 한창인 시기에 태어나 산업혁명의 충격을 몸소 체험한다. 과학, 산업, 기술의 발전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非인간적 처우, 극심한 빈부격차, 경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의 호주 유배, 제국주의, 인종차별, 노예제 폐지, 차티스트 운동, 아일랜드 대기근..

 

   '말레이 군도(The Malay Archipelago)'는 생물학적 연구 성과를 보였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해 비판의식을 드러낸 첫 저작이다. 자바, 술라웨시, 뉴기니의 원주민들이 딱히 유럽인 보다 하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책이 비열하고 노동착취를 한다고 보았다. 현지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은 원주민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벌인다고 기술한다. 동시에 관찰된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하려는 경험주의 면모도 역시 가지고 있어서 '말레인은 내향적, 파푸아인은 공격적'이라 일반화시키는 모습도 보인다. 

 

   '토지 국유화: 그 필요성과 목표(Land Nationalisation: Its Necessity and Its Aims, 1882)'에서는 토지를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온당치 않고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주는 아무런 노동 없이 댓가를 얻는 구조를 비판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과 흡사하다. 그는 토지 국유화를 통하여 사회 불평등 해소, 실업 문제 해결, 자급자족 가능성을 주장한다. 주장은 상당히 급진적이지만 시민들의 민주적이고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非폭력 저항 운동을 해야 한다는 면모를 보인다.

 

   '인간에게 적용되는 자연 선택의 한계에 대하여(On the Limits of Natural Selection as Applied to Man, 1870)'에서는 인간의 정신, 도덕, 영성은 자연 선택으로 해결되지 않고,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나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하기 한다. 물론 이 초자연적 존재나 힘은 기독교적이지는 않다. 다윈도 헉슬리는 월리스를 존중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확실한 거리 두기를 하면서 과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다윈주의: 자연 선택 이론의 설명(Darwinism: An Exposition of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 1889)'에서는 프란시스 꼴통(Francis Galton)의 우생학에 대해 비판하며 '인간 육종 가능성'을 부정하고 인간 선택-윤리, 도덕-은 자연 선택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당시에 상당히 논란이 있었고, 다윈의 철저한 자연 선택과 다른 방향이지만 현대 과학에서는 문화 진화, 집단 선택, 니치 구성(niche construction) 등의 방식으로 자연 선택을 이외의 부분을 설명하려 한다. 월리스의 주장은 다윈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현대 과학에선 부분적으로 수긍되는 아이러니함을 지녔다.

 

   '과학과 사회 연구(Studies Scientific and Social, 1900)'에서는 여성의 지능이 남성 보다 열등하지 않고,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이에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면 남성과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진다고 말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지만 이 주장도 당시에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학계는 여성의 지적 능력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남성과 동등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다윈은 '인간의 혈통과 성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1871'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지적능력이 우월할 가능성을 언급하고 그 예로 과학자, 철학자의 대다수가 남성임이라 주장했다. 재미있게 이 주장은 현대 사회에서도 제기 되는 문제다. 월리스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골턴의 우생학과 다윈의 여성 지능 열등 주장에 대해 통렬한 반박을 가한다. 다윈이 시대산물이었다면 월리스는 시대를 뛰어넘는 생물학적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라마르크.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Lamarck

사라진 용불용설(Theory of Use and Disuse)

   다윈과 월리스 이전 약 50년 전 즈음 프랑스의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는 ' 자주 쓰는 기관은 발달, 쓰지 않으면 퇴화, 그리고 유전'라는 용불용설을 주장했다. 생명체의 진화(evolution)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학자.

 

   동물 철학(Philosophie Zoologique, 1809)에 등장한 라마르크의 주장은 라마르키즘(Lamarckism)으로 불리며 학계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용불용설의 정합성 여부를 떠나서 오랜 시간 '고정 생물' 개념에 정면으로 '진화'와 '변화' 개념이 들여 왔기 때문에 그 관심과 호기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와 같은 주류 학자들은 라마르크의 주장에 대해 부정하면서 '종의 고정'을 주장했다. 라마르크의 주장이 비웃음을 사고 고통 받았다는 것은 학계에서 밀려나면서 고생했던 그의 말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20세기 거의 후반까지 용불용설은 폐기되었다. 다윈의 자연선택, 멘델의 유전 법칙, DNA 발견이 되면서 학술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비교적 최근 후생유전학(Epigenetics), 진화 생물학에서 다시금 재조명 받고 있다. 

   

   학계는 스트레스, 영양상태와 같은 환경압이 유전자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아도 다른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거나, 일시적 유전자 변화가 환경압이 지속될 경우 다음 세대에도 전해질 가능성, 획득 형질은 제한적이지만 유전 가능성이 있음을 재논의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맞았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 생물학은 라마르크의 의도적 진화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압이 유전자 발현 패턴을 변화시키고 일부 유전시킬 수 있다는 부분을 연구하는 것이다.

 

라마르크와 월리스의 평행 세계

항목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 (Jean-Baptiste Lamarck)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 (Alfred Russel Wallace)
주요 업적 최초의 진화 이론 제안자,
용불용설, 획득 형질
다윈과 공동 이론 제안자,
자연선택 
초기 위상 국립자연사박물관 교수,
분류학·생물학의 권위자
박물학자, 탐험가,
생물학자
생전 이론 수용 동시대 과학자들의 조롱과 무시,
주류 과학계 외면
자연선택 공헌 인정
과학계의 변두리로 소외
非주류화 요인 용불용설과 ‘획득 형질의 유전’ 이론,
당시 생물학계 반발
심령술, 반백신, 사회주의, 도덕 진화,
과학계와 충돌
대표적 대립 조르주 쿠비에,
주변 과학자들
토마스 헉슬리,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
말년의 상황 가난, 실명,
학계 고립
상대적 무명,
과학계의 ‘기이한 노인’
사후 평가 '진화 개념의 선구자'
일부 이론은 폐기,
문화 진화론 등과의 연결로 재조명
공통된 정서 최초 진화 이론,
고립된 말년
진화론의 공동 창시자,
고립된 말년

 

훔볼트. https://www.smithsonianmag.com/smithsonian-institution/who-was-alexander-von-humboldt-180974473/

 훔볼트의 책 'Personal Narrative' 원제 '1799-1804년 신대륙 적도지역 탐험기(Personal Narrative of Travels to the Equinoctial Regions of the New Continent, during the Years 1799–1804)'를 읽고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월리스 역시 같은 책에 큰 감명을 받아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훔볼트는 진화론의 할아버지?

 

   일부 지적 설계설(ID)을 주장하는 이들이 월리스의 '고등 지능(Higher Intelligence)' 언급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월리스의 다른 주장들이 ID와 상반된다. 

 

월리스는 찢어지게 가난한 9-10남매 중 일곱째 아들, 사료에 따라 9-10명의 남매로 기록.
측량 기사, 건축 설계사, 교사로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머리는 똑똑하여 독학으로 모든 것을 공부.

 

월리스의 부인 애니 월리스(Annie Wallace)는 윌리엄 미튼(William Mitten)의 딸.
윌리엄 미튼은 이끼학자로 월리스가 보내온 여러 이끼 샘플들을 연구했다.
월리엄의 집을 들락 거리던 월리스 딸과 결혼, 23살 차이. 도.둑.놈

 

윌리암은 월리스가 채집한 이끼에 학명을 붙였다.
Hypnum wallacei Mitt. Plagiochila wallaceana Mitt.

 

월리스는 백신 반대론자.
백신이 효과 없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몸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

 

1823년생 1913년 사망. 월리스는 다윈 사후 30년을 더 살면서 과학계의 별 꼴을 다 봄

 

월리스의 The Dell

월리스는 말년에 집을 손수 지었다. 창문, 채광 방향, 벽 두께까지 직접 설계했다.
정원에 토종 식물과 외래종을 함께 배치하여 작은 자연사 박물관처럼 꾸몄다.
https://wallacefund.myspecies.info/2002-dell-plaque 월리스의 Old Orchard
 

2002-“The Dell” plaque | The Alfred Russel Wallace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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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acefund.myspecies.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