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있었던 인물,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는 예수의 공생애와 죽음, 부활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단지 병을 고침 받은 여인이 아니며,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증인이고 부활의 첫 목격자이자 증언자다(요한복음 20:1–18). 누가복음 8장 2절에서는 그녀가 “일곱 귀신이 나간 자”로 등장하며, 이후 예수의 사역에 헌신적으로 물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대부분의 남성 제자들이 예수의 처형 현장을 떠났을 때, 그녀는 끝까지 남았고, 무덤에 향품을 들고 갔으며,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으로 복음서 네 곳 모두에서 언급된다. 이로 인해 중세 일부 교부들은 그녀를 ‘사도 중의 사도’(Apostola Apostolorum)라 불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정체는 이후 전승에서 가장 왜곡되고 흐려진 인물이 되었다.
의도된 혼동: 세 인물의 인위적 통합
막달라 마리아는 교회 역사 안에서 세 인물과 의도적으로 혼동되었다. 첫째는 누가복음 7장의 향유 부은 ‘죄 많은 여인’, 둘째는 요한복음 11장과 12장에 등장하는 베다니의 마리아, 그리고 셋째는 본래의 막달라 마리아다. 이 세 인물은 본래 각각 독립된 인물이지만,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이 셋을 하나로 통합하는 설교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는 '회개한 창녀'로 확정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녀를 “예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한 여성”이자 “죄에서 돌아선 모범적인 인물”로 정의했으며, 이후 서방 교회 전통은 이를 표준으로 삼게 된다. 하지만 이 통합은 성경 본문과 정합되지 않는다. 성서학자 바트 어만(Bart Ehrman)은 이 혼동이 본문의 전개와는 모순되며, 오히려 권위 질서의 안정화를 위한 장치였다고 분석한다(Ehrman 2006).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죄인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전승 조작이었다. 그녀는 십자가와 무덤, 부활 현장을 모두 목격한 유일한 인물로서, 경험적 권위에서 다른 사도들을 압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초기 교회는 남성 중심의 사도직과 권위 체계를 세워야 했고, 그 틀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위험한 존재였다. 성서학자 캐렌 킹(Karen L. King)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전달하는 교사로 기억되었으나, 이 기억은 사도 중심의 정통화 과정 속에서 조직적으로 침묵당했다고 지적한다. 이 기억의 왜곡은 단순한 이미지 축소가 아니라, 여성의 발언권을 봉쇄하고, 사도적 권위를 남성에게만 귀속시키는 교회 구조의 반영이었다.
복음서 본문에는 없는 ‘창녀’라는 딱지
복음서 어디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 본문은 그녀가 귀신 들렸다가 회복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하지만, 그 외의 윤리적 비난이나 성적 낙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승에서 그녀는 향유를 붓고 눈물로 예수를 씻긴 ‘죄 많은 여인’으로 혼동되었고, 이는 곧바로 창녀 이미지로 이어졌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억은 신학적 이미지보다 훨씬 더 사회적 통제 욕망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녀의 증언은 더 이상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회개의 상징으로 기능하도록 조정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삭제되었고, 다시 재창조되었다. 이는 단순한 역사 왜곡이 아니라, 기억을 관리하는 자들이 어떤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남기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녀의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재조정된 형태로 살아남았고, 그 재조정은 여성 권위의 제거라는 명확한 목적을 따랐다. 신약 정경 외 문헌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에서 그녀는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등장하지만, 이 목소리는 정경 형성과정에서 “신앙 공동체에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은 이 문헌이 정통의 경계에서 배제된 여성 권위의 가장 분명한 흔적이라 말한다.
남성 사도 중심 구조의 형성과 권위의 독점
초기 교회는 예수의 부재 이후 복음 공동체를 제도화해야 했고, 그 중심에는 사도직(apostolate)이 놓였다. 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예수를 따랐던 열두 명의 남성 제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이 명단을 신학적 정통성의 근거로 고정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여성도 분명 존재했고,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 사건을 포함한 핵심 순간마다 등장한다. 그녀는 예수로부터 직접 사명을 부여받았지만, 공식 사도 명단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엘리자베스 셰플리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는 이 현상을 “기억의 정치적 재구성”이라 부르며, 초기 교회가 여성의 경험을 교리적 권위 체계 안에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Fiorenza 1983).
막달라 마리아는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예수의 활동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목격했으며, 부활 후 가장 먼저 예수를 만났고,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직접 받았다. 이 경험의 밀도는 다른 사도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경험은 곧 권위로 연결되기 때문에, 초기 교회는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그녀의 증언이 남성 사도들의 공백을 드러내는 구조로 작동했기 때문에 삭제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단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 제도적 위계를 흔드는 존재였다.
베드로 중심 서사와 그 결핍의 보완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베드로(Petros)를 교회의 초석으로 묘사하지만, 복음서 본문에서 그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처형 현장에서는 모습을 감춘다. 반면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과 부활을 모두 지켜본 인물이다. 교회는 부재했던 베드로를 복원하고, 부활한 예수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를 조직 바깥으로 배치해야만 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 권위를 회복시키려는 대표적인 서사 장치다. 제임스 더니(James D.G. Dunn)는 이러한 장면들이 남성 사도직을 회복시키기 위한 문학적 장치였다고 분석한다(Dunn 1990). 이 구조에서는 목격자의 경험보다 직위의 정당성이 우선시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중세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미술과 설교에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여성으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그러나 그 상징성은 그녀의 사도적 증언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과 복종을 상징하는 도상(iconography)으로 작동했다. 로빈 젠슨(Robin M. Jensen)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그녀는 대개 무릎 꿇거나 예수의 발 아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이는 실질적 권위가 아니라 도덕적 교훈의 이미지로 사용된 것이라 말한다(Jensen 2000). 즉, 여성의 존재는 남지만, 그 안에 담긴 권위와 실천적 의미는 삭제된다. 복음서에 분명히 등장하는 그녀의 말과 행동은, 교회의 기억 구조 안에서 상징화되어 무력화된다.
기독교 공동체의 기억은 언제나 문서와 해석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나 누가 쓰고, 무엇이 기억되며, 어떤 것이 침묵당하는가는 그 시대의 권력 구조를 반영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문에 존재하지만, 조직 안의 권위 서열에서는 사라진다. 그녀는 예수를 만났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고,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로스 크레머(Ross Shepard Kraemer)는 여성들이 신적 체험의 주체로는 인정되었지만, 공적 권위를 구성하는 자리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고 말한다(Kraemer 2004).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교차점에 서 있었고, 그녀의 삭제는 곧 다른 여성들의 침묵을 제도화하는 시작점이었다.
정경화(canonization)의 기준과 정치적 전제
초기 기독교는 수많은 복음서와 문헌이 존재하던 시기를 거쳐, 점차 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헌을 선별하게 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문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적 통일성과 권위 구조를 구축하기 위한 선택의 결과였다. 어떤 문헌은 정경이 되었고, 어떤 문헌은 위경(apocryphon)으로 밀려났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이 과정에서 정경으로 편입되지 못한 대표적인 문서다. 이 복음서는 5세기 전반 필사본으로 존재하며, 나그함마디(Nag Hammadi) 문서군과는 별도로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캐렌 킹(Karen L. King)은 이 복음서가 여성 사도와 영적 해석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대 교회의 교리적 중심과 충돌했기 때문에 배제되었다고 말한다(King 2003). 정경화는 진리를 선별하는 작업이 아니라, 공동체 내 기억과 권력의 방향을 설계하는 작업이었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의 핵심 장면은 베드로와의 갈등이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비밀스럽게 전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그녀의 말에 반발하고, 베드로가 “왜 우리 중 여자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가”라고 질문하는 대목은 가장 대표적인 예다. 이는 단지 개인 간 갈등이 아니라, 영적 권위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대립을 드러낸다. 이 갈등은 단순히 여성 대 남성의 구도만이 아니라, 경험 중심의 권위와 제도 중심의 권위 사이의 충돌이기도 하다. 피오렌자(Fiorenza 1983)는 이 복음서가 단지 마리아를 높이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 내부의 정체성 갈등을 반영한 문헌이라 분석한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도덕적 문제나 왜곡된 교리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내면의 순수, 영적 진리를 통해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는 요한복음의 구절들과 정서적으로 닿아 있다. 그러나 그 복음서가 제도적 권위에 대한 도전의 언어를 담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은 정경화의 핵심 기준이 교리의 순수성보다는 교회적 권위에 복무하는 구조였다고 지적하며, “사도적 전통에 연결되지 않는 목소리는 쉽게 배제되었다”고 말한다(Hengel 2000).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적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지만, 그 주장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은 정통 권위의 구조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여성 중심 영성과 그에 대한 거부감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에는 내면의 지혜, 침묵 중의 계시,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외적 율법이 아니라 내면적 인식(gnosis)으로부터 온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은 단지 신학적 색채 차이일 뿐 아니라, 여성적인 언어로 읽힐 수 있는 요소가 많았다. 특히 침묵 중에 진리가 드러나며, 감정과 직관의 감수성을 통해 하늘의 비밀이 열리는 방식은, 당대의 로고스 중심 교리에 대한 간접적 반론이었다. 마르가릿 바커(Margaret Barker)는 초기 기독교 내 여성 영성 전통이 존재했으며, 그것이 사라진 것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체계의 조정 때문이라고 본다(Barker 2003).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이 여성 영성의 마지막 흔적 중 하나였고, 사라진 이유는 신학이 아니라 정치였다.
정경은 선택된 기억이다. 그것은 신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인간 공동체가 남기고자 했던 이야기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배제된 것은, 그녀의 증언이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증언이 가진 권위가 교회의 공식 구조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은 나그함마디 문서군 전반에 대해 “공동체의 기억에서 밀려난 대안적 신학의 기록”이라 부르며, 이들이 위경이 된 것은 교리에 대한 이단성 때문이 아니라 교회 통제력 밖의 메시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서는 정경이 되지 못했지만, 그 안에서 교회가 감당하지 못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유산이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선택이다
기독교의 기초를 구성하는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를 조직하기 위한 선택이다. 누가 기억되고, 무엇이 반복되며, 어떤 침묵이 정당화되는가는 그 자체로 권력의 표현이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복음서 안에서 중요한 장면에 등장하면서도 교회 전승에서는 왜곡된 이미지로만 남은 대표적인 사례다. 그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지만, 그 경험은 사도적 권위로 환산되지 않았고, 오히려 감정적인 회개의 이미지로만 정리되었다. 피오렌자(1983)는 이를 “기억의 사회적 구조화”라 부르며, 여성의 증언이 복음 전승의 한복판에서 소외되는 과정을 교회의 서사 구성 원리와 연결시킨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마지막을 함께한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십자가 아래에 선 사람, 무덤을 찾은 사람,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 모두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베드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성 제자들은 도망쳤거나 부재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교회가 기억하는 복음의 공식 구조 안에서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재배치되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로부터 직접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알리지만, 이후 교회 문서들은 이 사실을 ‘최초 증언’이 아니라 ‘중간 전달’로 축소한다. 셸리 매튜스(2010)는 이 현상을 “침묵으로의 전환”이라 부르며, 복음의 최초 전달자가 공동체 권위자에서 소식 전하는 하위 인물로 바뀌는 과정을 지적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의 서사에서 완벽한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를 따른 자였고, 고난과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부활을 목격하고 이를 증언했다. 반면 베드로는 부인하고 도망쳤고, 부활 장면에 처음 등장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베드로의 복권과 마리아의 삭제를 병행한다. 요한복음 21장이나 사도행전 2장은 베드로의 설교와 회복을 강조하며, 그가 공동체의 지도자로 자리잡는 과정을 서사적으로 강화한다. 제임스 던(1990)은 이런 장면들이 초기 교회가 불편한 기억을 조정하고, 제도화 가능한 권위를 중심에 재배치하는 방식이었다고 본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에서 사명을 받은 증언자였지만, 교회는 그녀를 눈물 흘리고 향유를 붓는 인물로 다시 만들어냈다. 이 전환은 단지 이미지의 변화가 아니라, 권위의 구조를 조정하는 전략이었다. 증언은 공식 권위를 필요로 하고, 교회는 그 자리를 남성 사도들에게 고정시키려 했다. 여성의 목소리는 감정과 돌봄, 신비한 감성의 이미지로 바뀌면서 증언의 자리를 빼앗긴 채 남겨졌다. 로빈 젠슨(2000)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여성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거나, 눈물 흘리는 장면으로 고정된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러한 재현은 단지 미적 선택이 아니라 권력적 서사라고 말한다.
삭제와 침묵은 제도화된 결정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 안에 존재하지만, 교회 권력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활의 핵심 증인이지만, 사도직과 직결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제도와 기억 사이의 긴장에서 생긴 결과다. 로스 크레머(2004)는 여성의 경험과 역할이 텍스트에서 점차 사라지는 현상은 교회가 권위를 구성하기 위해 선택한 침묵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기억은 잊힌 것이 아니라, 지워진 것이고, 복음은 경험이 아니라 구조에 맞게 편집된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모든 삭제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다.
기억의 유통기한은 권력이 정한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흔히 2세기 중반의 문서로 분류된다. 이 시기를 이유로 위경(apocryphon)으로 배제하는 해석은 “기록의 유통기한”이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 정경에 포함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조차도 정확한 기록 시기를 특정할 수 없으며, 모두 구전 전승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한계를 지닌다. 특히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쓰인 것으로 여겨지며(기원후 90~110년경), 그 구성 방식과 신학적 색채는 2세기 문서들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Brown 1979). 따라서 기록 시점 자체는 어떤 문헌을 정경으로 삼을지 결정하는 근거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기억을 보존하고 어떤 기억을 지울지를 정하는 권력 구조가 핵심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를 위경으로 규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서가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일한 기준을 요한복음에 적용한다면 모순이 발생한다. 요한복음은 “로고스(logos)” 개념, 빛과 어둠의 이분법, 세상의 악함에 대한 강조, 진리의 내적 계시에 대한 관심 등에서 영지주의적 사유와 밀접한 구조를 가진다(Hengel 20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이름을 통해 권위를 부여받고, 정경으로 채택되었다. 반면,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이름은 있으나 제도적 권위와 연결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배제되었다. 결국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이름이었고, 내용의 정당성보다 누가 말했는가가 중심이 된 구조였다.
정경 복음서들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초반에는 강한 존재감으로 등장하지만, 부활 이후에는 사도직이나 교회 지도력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그녀는 단 한 번 부활을 목격하고, 그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에만 머물며, 이후 다시는 중심 서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침묵은 단지 문헌상 실수가 아니라, 공동체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증언자의 삭제 결과다. 셸리 매튜스(2010)는 이를 “침묵의 구조화”라 말하며, 기억의 부재가 아니라 기억의 거세로 발생한 서사적 조정이라고 본다.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마르시온(Marcion), 발렌티누스(Valentinus) 등과 함께 이단적 문헌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단(heresy)은 절대적 오류가 아니라, 정통 정의 과정에서 배제된 사상의 자리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신과 신약의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이해했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의 복음을 재정의하고자 했다. 그의 사상이 수용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거짓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대 교회의 권위와 교집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일린 페글스(Elaine Pagels)는 『The Gnostic Gospels』에서 이단 개념은 정통 교리를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가 아니라, 교회의 권력화와 병행해 만들어진 경계 규정이었다고 분석한다(Pagels 1979).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역시 이 경계 밖에 놓였지만, 그 위치는 배제의 논리이지 본질적 오류의 증거는 아니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공관복음(synoptic gospels)과 명확히 이질적인 구조를 가지지만, 동시에 유사한 요소도 존재한다. 예수와의 비공개 대화, 제자들의 불편한 반응, 예수의 진의에 접근하려는 노력 등은 구전 전승과 공통된 기원을 암시한다. 카렌 킹(King 2003)은 이 복음서가 공관복음과 신학적으로 갈등하더라도,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실재한 대화 전승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한다. 만약 그것이 순전한 창작물이었다면, 굳이 베드로와의 갈등을 삽입하거나, 제자들로부터 의심을 받는 구조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서사는 존재했던 불편한 기억의 흔적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정경(canon)의 목록은 초대 교회가 수 세기에 걸쳐 역사적, 교리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한 기억의 선택물이다. 위경과 외경의 구분은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각 시대와 지역의 해석 공동체가 세운 선별 규칙에 따라 달라진다. 제임스 로빈슨(Robinson 1990)은 정경이란 개념 자체가 특정 기억을 보호하고, 특정 기억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적 구조였다고 지적한다. 정경은 절대적 진리의 목록이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여지길 바란 문헌들의 정치적 배열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제외된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 아니라, 선택된 침묵의 결과다.
지워진 증언자, 전승에서 말소된 권위
막달라 마리아는 단 한 번도 침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고, 증언했고, 따라갔고, 무덤 앞에 섰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기록되지 않았고, 그녀의 이름은 교회가 기억하기로 선택한 방식 안에서만 남겨졌다. 교회는 그녀를 ‘사도 중의 사도’라고 부르면서도, 단 한 번도 사도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았고, 복음을 먼저 전한 여인을 정식 사도직의 바깥으로 밀어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성차별도, 우연한 편집도 아니다. 그것은 권위의 중심을 설정하고, 서사의 방향을 남성 중심으로 고정하려는 교회 제도의 집단적 기획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 안에 등장하지만, 복음의 역사에서는 지워진다. 그녀는 오직 특정한 이미지로만 남는다. 눈물 흘리는 여자, 향유 붓는 회개자, 지나간 감정의 상징으로 축소된다. 그리고 그런 축소는 곧 배제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에게만 적용된 배제의 기준, 복음서 중에서도 유독 그녀의 이름만 침묵당한 전승, 영지주의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문서의 선별…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막달라 마리아는 불편한 증언자였고, 교회는 그 불편함을 서서히 지우는 방식으로 정리를 선택했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판본마다 내용이 다르다. 현재까지 발견된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5세기 콥트어(Coptic)로 된 필사본 하나뿐이며, 16쪽과 1114쪽만 남아 있고 중간이 통째로 유실되어 있다. 전체 내용의 절반가량이 사라진 상태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단편에 불과하다. 더 흥미로운 점은 지역별 사본 간 문구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부 필사본에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입을 맞췄다는 표현이 남아 있는 반면, 다른 판본에서는 그 대목이 삭제되거나 문맥이 불분명하게 처리되었다. 이 차이는 필사 과정에서 신학적 부담이나 검열이 개입되었음을 암시한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정경은 오랜 기억의 선택 결과다. 그 선택에서 빠진 목소리는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사라졌다.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는 바로 그 사라진 진실의 단면이며, 삭제된 권위의 표식이다. 이제 그 흔적은 더 이상 침묵 속에 묻혀 있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디서 죽었는지는 지역마다 전승이 다르다. 서방 교회 전승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프랑스로 이주해 복음을 전하고 생트-보뵈(Sainte-Baume)의 동굴에서 은둔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는 13세기 도미니코 수도회에 의해 널리 퍼졌고, 그녀를 여성 수도자의 모델로 만들기 위한 전승으로 활용되었다. 반면 동방 교회, 특히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에페소로 이주해 사도 요한과 함께 복음을 전하며 살다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동일한 인물에 대해 서방과 동방이 완전히 다른 서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의 기억이 제도화된 전승 외에도 다층적으로 살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막달라(Magdalene)는 지명이 아니라 상징일 수 있다. 막달라라는 이름은 보통 갈릴리 호수 근처의 실재하는 마을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히브리어 '미그달(מִגְדָּל)', 즉 '탑'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경우 '막달라 마리아'는 출신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탑처럼 높이 선 자’, 혹은 공동체 내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상징하는 이름일 수 있다. 이는 그녀가 초기 공동체 내에서 상징적 권위를 가졌고, 단지 고향이 아니라 역할로 불린 인물일 가능성을 열어둔다(Brock 2003).
기독교 미술에서 머리를 푼 여성은 막달라 마리아뿐이다. 중세 이후 기독교 미술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자주 머리를 풀고, 붉은색 옷을 입은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는 당시 문화에서 회개한 창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동시에 성적 이미지의 시각적 코드로 작동했다. 특히 그녀는 많은 작품에서 거의 나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순결한 성모 마리아나 순교자 여성들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도상으로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구성은 막달라 마리아를 철저히 도덕적 교훈의 대상으로 전락시켰고, 그녀의 실질적 증언자 역할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Jansen 1991).
복음서 외 문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가장 깊은 제자였다. 영지주의 계열 복음서들, 특히 『도마 복음서』, 『빌립 복음서』, 『이집트인들에게 보낸 복음서』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하고, 다른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말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빌립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그녀를 ‘동반자(companion)’라 부르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제자들은 이 관계를 불편해하며, 베드로는 그녀가 예수의 말씀을 독점한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낸다. 이는 단지 신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초기 공동체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위치가 높고도 특별했음을 암시하는 전승의 흔적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