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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돌리드 논쟁; 인간 존엄성을 묻는 최초의 윤리 논쟁

by napigonae 2025. 5. 24.

 

바야돌리드 논쟁(Valladolid Debate)의 원인

인터 카테라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까지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직후, 스페인 왕실은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에게 새 땅의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493년 스페인 출신 교황은 스페인에 유리한 내용을 담은 교서 인터 카테라(Inter caetera)를 발표(1차)했다. 이 교서는 선교를 명분으로 스페인 왕에게 새 땅에 대한 점령과 지배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2차 인터 카테라에서는 기준을 좀 더 명확하게 하였다. 카보 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100 리그 떨어진 지점을  경도로 기준으로, 서쪽 지역에 대해 스페인이 탐사, 권리, 선교를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리그라는 단위는 스페인, 포르투갈의 기준이 달라 큰 오차가 발생했다. 기준선 자체가 애매하니 포르투갈은 자국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반발했다.

 

   포르투갈은 로마 교황청을 압박했다. 포르투갈은 1455년의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1481년의 에테르니 레기스(Aeterni Regis) 같은 교황청 교서로 아프리카 해안, 인도 항로에 대한 독점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독점 권리와 스페인의 권리와 충돌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지리적 경험과 지식으로는 아프리카 해안과 남미의 해안이 닿아 있는지, 남미 해안과 아시아 항로와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독점 권리가 침해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스페인 곧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었다. 교황 칙서와는 다르게 스페인의 권리를 부여하는 기준선을 재설정했다. 기준선 위치는 카보 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리그 떨어진 지점으로 그 선의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했다. 1500년 포르투갈 탐험대가 남미 동쪽 해안을 발견했을 때, 포르투갈은 남미 해안이 토르데시야스 조약 기준선 동쪽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브라질 지역이 포르투갈 땅이 됐다.

 

   복잡한 땅따먹기 싸움에는 원주민은 협상에서 빠져 있었다. 유럽 국가들은 원주민을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법과 제도의 바깥에 있다고 여겼다. 이 차별적인 인식은 이후 남미 원주민에 대한 정복. 강제 개종, 토지 몰수, 강제 노동을 발생 시킨다.

 

뿌리까지 뽑아 먹은 스페인의 경제 착취

   1492년 이후 스페인은 남미를 노다지로 여겼다. 금과 은, 향신료과 같은 자원에서 원주민 노동까지 포함한다. 특히나 식민지 경제구조를 굴리는 원천은 원주민 노동이 이었고,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분배하기 위해서 '엔코미엔다(encomienda)'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스페인 정복자에게 원주민 집단을 배분하고, 그 집단에서 노동력을 얻을 권리를 부여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호와 교육이 목적이라 했지만, 강제노동일 뿐이었다.

 

   페루 지역에서는 원래 잉카 제국 시절의 공공노역 방식이었던 미타(mita)제도를 이용했다. 스페인은 광산 노동에 맞게 살짝 변형시켰다. 이 제도는 원주민 부족, 마을을 노동력 공급 단위로 나누었다. 주민들은 은광에서 교대로 일정 기간 일해야만 했다. 원주민들은 중노동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았고 사망자도 속출했다.

 

   이 두 제대로 원주민 사회는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노동 동원은 전통적인 부족 공동체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 사냥이나 채취 활동 마저도 통제 받았다. 중노동으로 인해 질병과 사고가 잦았고, 인구는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남겨진 가족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공동체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강제 노동은 처벌과 감시로 유지되면서 구타와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엔코미엔다와 미타제도를 다뤘던 포스트

 

1492 콜럼버스, 1992; ‘발견’이 아니라 ‘고장’, 콜럼버스가 망가뜨린 세계

영화를 빌미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자신을 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존재로 여겼고, 신대륙 발견을 단순한 항해 성공이 아닌, 성서적 서사 안에 배치하려 했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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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영향

   유럽의 신대륙 진출은 표면적으로 탐험, 선교를 내세웠지만 이후 원주민 강제 노동, 학대, 부족과 공동체 파괴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원주민 현실을 두고 유럽의 내부에서 질문이 생겨났다. '원주민도 사람이라면 이렇게 다뤄도 되나?', '이교도에게도 자연법상 권리가 있는가?', '이성 없는 사람도 인간인가?', '정복과 개종은 정당한가?' 같은 의문들로 이어졌다.

 

   신대륙에서 벌어진 최악의 인권 탄압은 유럽 사회 내부에서 이미 퍼지고 있던 르네상스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인식은 여전히 식민 지배, 원주민 강제 노동을 당연한 질서로 생각했다. 인본주의적 반성은 일부 학자와 성직자들 내부에서 제기 되었을 뿐이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벌어진 인권 탄압은 인본주의와 맞물리면서 사람의 기준, 조건, 범위, 상황에 대해 여러 사고 방식과 반응으로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라스 카사스의 회심

   1502년 즈음 바르톨로메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는 그의 부친 페드로 데 라스 카사스(Pedro de las Casas)와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기 위해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로 향했다. 이후 카사스 부자는 식민지 정복자의 한 사람으로서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 운영하여 수익을 얻었다. 카사스는 이 과정에서 식민지의 잔인한 현실을 목격했다. 1514년에는 엔코미엔다의 모든 수익 포기하고 권리를 버렸다.

 

    이후 카사스는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고, 히스파니올라와 쿠바, 과테말라를 오가며 원주민의 삶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왕실과 교회에 연줄이 있는 카사스는 고통 받는 원주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며 목적 의식이 뚜렷한 옵저버 역할을 했다. 카사스의 옵저버 경험은 《인디아스의 역사》, 《인디아스의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 《인디아스 문제에 관한 논의》와 같은 글로 남았고, 각종 보고서와 청원서로도 이어졌다.

 

   카사스는 원주민도 생각하고 판단하며, 종교적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 했는데, 그의 저작물을 보면 카사스가 원주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식민지 원주민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원주민에게 이성과 신앙의 능력이 없다'는 시각이었다. 카사스는 문서로 기록을 남긴 최초의 원주민 옹호론자였다. 카사스는 일관성 있게 원주민이 겪고 있는 학대와 강제노동에  반대했고, 생각이 다른 이들의 비판도 꾸준히 받아야 했다. 1520년부터 카사스는 침묵하지 않고 꾸준히 왕실과 교회에 원주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바야돌리드 논쟁 이후에도 카사스는 쉬지 않고 원주민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약 40여년에 걸친 인권운동가 카사스의 활약은 정말 대단하지만 당시 정복자의 정복, 신대륙과 신항로에 대한 관심, 불편한 원주민 인권 문제로 인하여 그 중요성 드러나지 않는다.

 

흑인 노예제에 무관심했던 카사스

  1516년경 카사스는 남미 원주민들의 학대와 착취에 반대하며 흑인 노예를 데려오자는 방안을 제시했던 적이  있다. 1547년즈음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Carta a un amigo)에서 흑인 노예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죄'라는 입장을 밝혔다. 거의 20년간 카사스도 흑인 노예제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지식인 중 하나인 카사스가 흑인 노예제에 무감각 했다는 것은 비판 받을 일이 아니다. 카사스 마저도 사회적 산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히스파니올라 섬

 

히스파니올라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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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5세의 신법 제정과 무력화

   약 30여년 동안 카사스는 꾸준하게 남미 원주민의 처우 개선, 엔코미엔다 제도에 변혁을 요구했다.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Carolus V)에게는 카사스 뿐만 아니라 도미니크 수도사와 사제들의 끈질긴 청원이 이어졌고, 1542년 신법(Leyes Nuevas)이 제정 되었다.

 

   신법은 New Laws, 새로운 식민지 통치법 정도로 볼 수 있다. 어감이 직관적이지 않다. 신법의 주요한 내용은 크게 4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엔코미엔다 제도를 점진적 폐지와 상속 금지, 원주민을 왕의 백성으로 간주, 청문회 재판소(Audiencia)와 총독의 권한을 강화하여 군벌화된 정복자들의 견제, 새로운 통치관의 파견.

 

   하지만 신법이 시행 이후 식민지 현지의 반응은 냉담을 넘어서 반발로 이어졌다. 대표적 사건은 1543년 블라스코 누녜스 벨라(Blasco Núñez Vela) 신임 총독이 페루 지역에 파견 되고 피사로(Pizarro) 형제들에게 피살 당한 사건이다. 많은 유력 엔코미엔다 소유주들이 극렬한 저항을 했고 새로운 총독, 통치관은 힘을 전혀 쓰지 못했다. 1545-1546년 칼 5세는 일부 지역에서 신법 자체를 무효화 하거나 엔코미엔다 세습 금지를 철회하기도 하였다.

바야돌리드 논쟁의 서막(1550-1551)

   신법(Leyes Nuevas)은 단 몇 년만에 무력화 되어, 식민지는 이전의 무분별한 인권 탄압의 현장으로 되돌아 갔다. 동시에

도미니코회 성직자들은 수 차례 언급했듯이 원주민 인권 탄압 실태에 대해 끝없이 서면으로 보고하고 청원을 올렸다. 교회 내부에서도 학대와 강제 노동 문제가 식민지 정복과 경영의 정당성에 해를 끼친다고 보았다.

 

   1547년, 라스 카사스는 신법이 식민지에서 실패하자 환멸을 느꼈고 곧 치아파스(Chiapas) 주교직을 사임 본국으로 돌아왔다. 카사스는 다른 도미니크 사제들과 함께 청원을 하며 원주민 인권 문제를 반복 제기했다. 침묵하던 왕실을 향해 이 문제가 더는 종교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묻지마 신고(익명신고), 묻지마 혐의(비공개), 묻지마 고문(자백)으로 재판의 형식은 사라졌고, 개종자의 출신과 혈통을 신앙의 기준을 삼아 '출신 차별'을 제도화했다. 잉글랜드, 프랑스의 위그노, 루터파 등 개신교 국가는 스페인 종교재판을 신앙의 탄압으로 비난했다.

 

   칼 5세는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황제로서 패권을 형성했다. 이는 프랑스 및 독일 내 反합스부르크 세력의 강한 강력한 적대감을 일으켰다. 스페인의 식민지 팽창, 스페인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이중 권력은 유럽 전역에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와 무역로를 철저히 통제하면서 프랑스,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들의 강한 반감을 사게 되었다.

 

   무르익은 분위기, 카를 5세는 이 압박을 더는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550년, 식민지 정복과 원주민 지배가 올바른지 판단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카를 5세는 이 문제를 정면돌파하여 자신은 신학적으로 투명하고 윤리적으로도 흠결 없는 모습을 보여 유럽 각국의 비난을 잠재우고 싶어했다.

https://mubi.com/en/kr/films/the-valladolid-debate

1년간의 바야돌리드 논쟁

   1550년 바야돌리드의 산 그레고리(San Gregorio) 대학 안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논쟁이 시작된다. 1년간 비정기적으로 이뤄졌다. 라스 카사스와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가 논쟁을 벌였고, 왕실 고문과 수도회 고위 인사들이 참관 했다. 토론 과정은 칼 5세에게 보고되었고, 칼 5세는 참관하거나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바르톨로메 라스 카사스의 입장

   남미 원주민(인디오)들은 '이성과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자연법과 신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원주민들을 미개하거나 야만적으로 보는 인식에 반대한다. 그들 역시 윤리와 소속감을 가진 문명적 인간들이다. 스스로의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식민지에서 학살, 고문, 강제 노동, 약탈과 같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저질렀고 이 행위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부서졌다.

 

   강제 노동, 폭력, 강제 개종은 신의 뜻이 아니고 자유를 침해하는 죄악이다. 강제 개종 진실한 회심으로 이어지기 않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으로 될 수 없다. 선교는 끊임없는 인내와 설득으로 이뤄져야 한다. 복음 전파를 이유로 재산과 토지를 빼았는다. 이 욕심은 선교 사명을 더럽힌다. 원주민들의 자유와 문화를 존중하고 스스로 개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정당하고 그것이 신의 의지다. 원주민들도 인간으로 모든 강압적 폭력은 금지 되어야 한다.

세풀베다 Juan Gines de Sepulveda https://historia-hispanica.rah.es/biografias/42571-juan-gines-de-sepulveda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의 입장

   원주민들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고, 스스로 바른 사회나 제도를 세울 능력이 없다. 인간 제물을 바치는 행위, 질서 없는 공동체, 무지와 미신에 의지하는 생활을 보면, 원주민은 문명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이들을 놔두는 것은 방임이고, 교화와 개종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스페인은 이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 약탈이 아니라 교육, 폭력이 아니라 교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노예가 되는 것이 맞고,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한다. 원주민들에게 자유는 방종이고, 규율과 질서를 주는 것이 바로 정의다.

 

   정의로운 정복이 필요하다. 원주민들은 스페인과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고, 선교를 거부했다. 문명과 질서를 거부하고, 신의 법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설득은 무의미하다. 이때 무력이 필요하다. 복음은 진리이고, 진리를 거부하면 무력을 써서 진리를 알게 해야만 한다. 원주민들의 삶은 자연법과 신의 법에도 어긋난다. 죄악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외부로부터의 교화는 신의 뜻이며, 죄악된 삶을 바로잡는 것은 정의다.

 

카사스와 세풀베다의 주장

쟁점 카사스 세풀베다
원주민 인간성 이성과 감정을 가진 인간
인간이지만 미성숙, 열등
원주민의 이성, 도덕  도덕 감각, 윤리 의식 있다.
이성적 판단 능력이 부족,
도덕 기준이 없다.
원주민 사회의 자율성 사회와 문화를 유지할 능력이 있다.
사회와 제도를 세울 능력이 없다.
야만적이다.
강제 개종, 무력 사용 모든 폭력, 강제 개종은 죄악.
무력과 강제 개종은 정당.
선교의 방식 설득과 인내를 통해 자발적 개종 유도
설득은 무의미,
강제 개종-교화가 필수.
스페인의 정복 정당성 정복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정복은 정의롭고 문명화의 수단이다.
자연법과 신의 법 신의 뜻은 자유 속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것.
자연법과 신의 법을 어긴 자.
외부에서 교정해야 한다.

 

칼 5세 Charles V https://www.thecollector.com/charles-v-holy-roman-emperor/

칼 5세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역사가 보는 칼 5세의 평가

   긍정적 평가. 칼 5세를 가톨릭 질서의 수호자이자 제국의 지도자로 본다. 오스만 제국의 팽창, 프랑스와의 갈등, 루터파의 확산 등 여러 복잡한 상황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나름 성공적 결과를 보여줬다. 교황청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종교적 성향도 관철해냈다.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동시에 통치, 나름 성공적으로 유지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부정적 평가. 관리 능력은 없는 거대 제국의 실패한 관리자라 보는 시각이다. 넓은 영토와 복잡한 준변국과의 관계에서 통제력은 희미하고, 경제는 전쟁과 식민지 사업으로 고갈되었으며, 종교적 분열은 수습 할 수 없었다. 말년에 제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숨어들었다. 이를 정치적 탈진,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본다.

 

   셋째, 회의적 평가. 칼 5세를 윤리적, 종교적 양심과 제국의 이득 관계에서 흔들렸다고 보는 시각이다. 바야돌리드 논쟁을 소집하여 원주민 인권 문제를 공론화 시켰고지만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 도덕적 비난은 피했지만, 식민지 정복정책을방임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야돌리드 논쟁 시기의 칼5세에 대한 평가

   칼 5세는 합스부르크 성골 중 성골로, 시기와 그의 환경에서 보통 백성의 삶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보통 백성들이나 식민지 원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할 가능성이 상당히 낮았다. 그런 그가 원주민 인권 문제로 학자들을 소집, 공개 토론을 열었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지만 의견은 들어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듣는 귀를 가진 군주라는 점에서 그는 왕들과 황제들의 기준에서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선택은 쉽지 않았다. 카사스를 지지하면 종교적, 윤리적으로 선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식민지 정복자들과 귀족들의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세풀베다를 선택하면 정복 사업에는 탄력이 붙고, 제국의 경제에 플러스 요인이 되겠지만, 인권 문제, 강제 개종 등 개신교 세력과 주변국들의 비판 여론을 감당해야 했다.

 

   세풀베다의 저작 출판을 금지하고 카사스 쪽에 살짝 손을 들어주면서 종교적인 성향을 내비쳤다. 그러나 제도가 바뀔만한 그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종교적 양심을 보이면서 동시에 미묘한 절충을 택한 것이다.

카사스 Bartolomé de las Casas https://derechoareplica.org/secciones/filosofia/1569-bartolome-de-las-casas-y-la-historia-de-los-derechos-humanos-en-america

카사스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역사가 보는 카사스의 평가

   인권운동가라는 평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카사스를 16세기 유럽의 선구적 인권의식을 가진 인물로 본다. 그는 여러 저작을 남기고 왕에게 끈임없이 식민지 원주민 인권 향상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스페인 정복자들의 잔혹한 만행을 고발했다. 카사스는 비인권적 식민주의와 맞선 윤리적 양심과 종교적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정적 평가. 카사스는 흑인 노예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남미 원주민에 대한 학대와 착취를 줄이기 위해 흑인 노동력을 공금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자신의 흑인 노예제 확대를 반대하고 노예제 자체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바꿨다. 카사스 역시 모든 면에서 윤리적, 도덕적입장면 견지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그를 '선의의 식민주의자' 또는 '도덕적 제국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의적 평가. 역사학계에서는 라스 카사스의 저작물들과 기록을 일관성 있는 진실로 보지 않는다. 그의 저작물들과 기록은 문학적 과장이 많고 원주민 사회에 대해 낭만적이고 이상적으로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 통해 그가 묘사한 '천진한 야만인' 이미지가 유럽 중심적 시각의 연장선일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카사스를 변호한다면

   부정적 평가에 대해, 흑인 노예 무역을 선동했다는 평가가 크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으로 봤을 때, 카사스의 윤리관은 시대를 앞선 윤리적 식견을 보였다. 일부 도미니크 수도사들도 이에 동참했지만 카사스만큼 꾸준하게 왕실에 건의를 하고 원주민 권익에 앞장선 경우는 없다. 1516년 흑인 노예 무역을 제안했다가 1527년 '인디아스의 역사(Historia de las Indias)'를 통해 제안을 철회하고 자신을 책망한다. 이런 회심 마저도 부정적으로 보겠다면 당시 지식인 중에 긍정적으로 볼 인물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회의적 평가에 대해서, 카사스의 저작물들과 기록들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이상적으로 기록했다 지적 받는다. 당시 남미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에 바야돌리드 논쟁이 벌어졌다는걸 상기해야 한다. 원주민들의 사회적 생활과 문화적 삶이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야만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카사스 입장에서 원주민들의 평가가 긍정적이고 이상적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원주민들의 문화에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고 아무리 미화해도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원주민의 삶에 대해 낭만적이고 이상적으로 표현했 것은 정복자들의 과한 학대와 강제 노동을 막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맞다.

바야돌리드 논쟁의 결과

   판결 없이 종료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이라서 대단한 결과와 영향력을 끼쳤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유례가 없는 '왕의 소집'이라는 점이 부각될 뿐이지 논쟁 이후 변화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국왕 카를 5세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 판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떤 쪽으로 손을 들어줬어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 결정했을 것이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럴싸한 이유를 만든 것 뿐이다.

 

   세풀베다의 주저인 'Democrates alter: De justis belli causis apud Indos'는 출판이 금지되었다. 이 결정은 교회와 종교기관의 판단에 따른 것이지, 왕실과 연관이 없다. 세풀베다는 이후에도 학자로서 활동 했다. 식민 정책에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식민지 정복자들의 사고방식은 세풀베다의 주장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페인 본토에 영향력이 약화된 것이지 남미 식민지에서는 거의 변화 없이 세풀베다의 사고방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카사스도 공식적 승리자는 아니었다. 세풀베다의 책이 출판금지된 부분에서 일부 승소(?)했다고 할 수있다. 카사스는 살라망카 학파(La Escuela de Salamanca)의 자연법 사상, 인간 존엄성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소토(Domingo de Soto),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 등 학파 주요 인물들은 이성적 존재로 원주민을 인정하고 정복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바야돌리드 논쟁 이후 살라망카 학파는 국제법, 정당한 전쟁(jus ad bellum), 주권 개념 등을 발전시켰다.

 

   흑인 노예 무역은 바야돌리드 논쟁이나 원주민 노예 금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흑인 노예 수요는 원주민 인구가 급감하면서 발생한 노동력 부족 문제에 따라 증가한 것이며, 도덕적 논쟁의 결과가 아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의 창시자로 비판 받는다는 것은 억지 주장일 뿐이다. 첫 노예 무역은 1444년, 신대륙에 처음 흑인 노예가 유입된 시기는 1501년, 카사스가 흑인 노예의 수를 늘리자고 주장했던 시기는 1516년이다. 카사스가 그 주장을 안 했어도 신대륙에 유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급증했을 것이다. 반대로 카사는 이후 흑인 노예제도 폐지해야 주장했는데 그 흑인 노예의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1573년 스페인 왕실의 '정복법'(Laws of the Conquest)에서는 '정복(conquista)'이라는 표현이 폐기되었다. 용어상의 변화일 뿐 실제 정복 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에나코미엔다 제도는 점차 약화되었지만, 원주민을 통제하고 개종시키기 위한 리두시온(reducción) 거주지 제도가 확산되었다. 총칼에 의한 폭력에서 종교와 문화적 자발적 동화형태로 바뀌었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검은 전설(La Leyenda Negra)'이나 '하얀 전설(La Leyenda Blanca)'과 관련이 없다. 15-16세 검은 전설은 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반(反)스페인 국가들이 스페인의 잔인한 식민 통치와 점령 방식을 비난하기 위해 만든 대륙적 언론플레이다. 라스 카사스의 저작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과장된 해석이 많았다. 하얀 전설은 검은 전설에 대응하기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스페인 내부에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의 주장들로,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세풀베다에게 발언권이 없았다.
종교할 회의에서 발언하려면 성직자 자격이 필요했고 평신도 였던 세풀베다는 말할 수 없었다. 세풀베다의 의견은 문서로 제출했고, 성직자 자격을 갖춘 인물이 대신 읽었다.

 

1년이나 논쟁을 벌였다고?
세풀베다의 의견은 문서로 제출, 성직자가 낭독, 카사스는 이를 듣고 반박 의견을 문서로 정리해서 세풀베다에게 전달 되었다. 문서 작성과 전달, 재반박이 반복되는 비효율적 회의가 진행되었다.

 

칼 1세와 칼 5세는 누구인가?
당시 스페인 국왕은 칼 1세였고, 그는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였다.
한 인물에 두 직위를 가진 상황.

 

필리페 2세도 논쟁을 참관했다.
필리페 2세는 당시 왕위 계승자로, 논쟁 현장에 참관하여 회의 과정을 지켜 봤다.
훗날 국왕이 된 그는 세풀베다의 의견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다.

 

스페인의 노예제는 어떻게 끝났나?
스페인 본토는 1837년, 푸에르토리코는 1873년, 쿠바는 1886년에야 폐지되었다.
노예제를 무려 300년이나 지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