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神 사이에서: 마르시온의 붕괴와 선택
마르시온(Marcion)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를 단지 이단의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지위와 내면의 격변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그는 전통적인 유대교 배경을 지닌 인물로, 토라(Torah)와 타나크(Tanakh)의 문자와 구조에 익숙했던 지식인이었다. 정경(canon)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 그는 신약 문헌, 특히 바울(Paulus)의 서신과 루가(Loukas)의 복음서를 접하면서 신의 형상에 대한 기존의 확신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특정 민족을 선택하고, 율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며, 반역과 타락에 대해 무자비한 심판을 내리는 존재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거룩함’과 ‘공의’로 설명되었지만, 마르시온에게 그것은 점차 공포와 배제의 신으로 읽혔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예수의 하나님은 조건 없는 사랑과 자비, 보편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율법이 아니라 은총, 민족이 아니라 인류, 복수가 아니라 용서가 신의 본질로 제시된다. 이 두 신은 윤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차이를 마르시온은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을 따라가기를 멈추고, 그 전통이 부여했던 신의 형상을 해체한다. 신이 하나라는 교훈보다, 신이 진정 사랑일 수 있다는 내면의 윤리적 직관을 따르기로 한다. 이 결단은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뿌리와 작별하는 행위였다. 그는 구약 전체를 배제하고, 바울의 서신 열 편과 루가복음 일부만을 ‘정경’으로 삼는다. 이 선택은 문자 이전에 감정의 지층에서 일어난 것이다.
신을 믿는 자가 기존의 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신이, 이전과 달리 자애롭고 인자하며 용서하는 존재라면—그 순간 눈물이 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공포에서 벗어나 사랑 안으로 진입한 그 전환의 시간은, 마르시온에게 존재의 구조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의 결정은 격정이 아니라 침착한 구조화로 이어졌고, 이는 후대 교부들의 반박 속에서도 드러난다.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 Tertullian)는 마르시온을 향해 “그는 자비의 신만을 믿고, 구약의 하나님을 혐오하듯 부정한다”고 비난한다 (Tertullian c. 207). 그러나 그 비난은 곧, 마르시온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형성된 윤리 감각에 충실했던 사람임을 방증한다. 에이레나이오스(Irenaeus) 역시 “경전을 자의적으로 잘라낸 자”라 평가했지만, 동시에 마르시온이 기존 체계에 대한 고도의 이해와 비판적 독해를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Irenaeus c. 180). 이단은 감정적 방종이 아니라, 도덕적 감수성에서 출발한 질문일 수 있다.
당시 교회는 아직 공의회(Concilium)조차 열리지 않았고, 정경의 목록도 확정되지 않았다. 마르시온은 공의회 이전의 인물이며, ‘이단’이라는 범주가 제도화되기 전 등장한 최초의 독립 신학자였다. 그가 잘못된 교리를 퍼뜨렸다는 판단보다 먼저, 그가 자기 내부에서 신의 윤리적 상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시킨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눈물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결단과 구조화된 정경 목록은 그 내면의 진동을 반영한다.
신이 변했다. 마르시온과 바울의 갈림길
신은 하나이며, 언제나 동일하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학의 대전제였다. 하지만 마르시온(Marcion)은 그 신이 ‘동일하다’는 전제를 근본적으로 의심했다. 그가 신약 문헌을 접했을 때 마주한 하나님은 너무도 달랐다. 단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이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울(Paulus)은 이 긴장을 조율한 해석자였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을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과 은총을 하나의 계획 속에서 해석하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괄하는 구원의 흐름을 강조했다. 그의 신은 연속적이다. 다만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했을 뿐이다 (Romans 3:21–26). 바울에게 신은 변하지 않았다. 구약의 분노도, 신약의 자비도 모두 한 신의 다른 면일 뿐이다. 하지만 마르시온은 이 연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속이 아니라, 단절을 보았다. 신약의 하나님은 더 이상 선택을 말하지 않았고, 복종도 강요하지 않았다. 마르시온에게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격의 개입이었다. 바울이 연속성을 강조할수록, 마르시온은 그 연결이 도덕적으로 설득력을 잃는다고 느꼈다.
이 지점에서 갈라진 것이다. 바울은 신의 계획을 믿었고, 마르시온은 신의 성품을 따졌다. 바울은 복합성을 받아들였지만, 마르시온은 윤리적 정합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도 신의 뜻”이라 보았지만, 마르시온은 그것이 다른 신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단지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신정론(theodicy)의 심층에서 갈라진 윤리의 결단이다. 그 결단은 단순한 이론적 판단이 아니라, 윤리적 직관의 파열음이었다. 그는 신약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을 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하지만 심판한다”는 말은, 마르시온에게는 불가능한 언어였다. 그는 그런 신을 신으로 부르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마르시온이 "심판을 부정하고 자비만을 신이라 했다"고 비난한다 (Tertullian c. 207). 하지만 그 비난은 동시에 마르시온이 신의 본질을 윤리의 언어로 묻는 자였음을 드러낸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권위가 아닌 도덕에서 찾았다. 바울은 신을 통합하려 했고, 마르시온은 분리함으로써 신을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그 보호의 대상은 자신이 새롭게 만난, 자비롭고 조건 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변하지 않는 신을 해석하려 한 바울과, 신이 변했다고 느낀 마르시온. 둘 사이의 차이는 단순한 노선의 갈림이 아니라, 신을 대하는 인간의 내면적 정직성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그는 신이 변했다고 느꼈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마르시온은 신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느껴지는 윤리의 상을 따라 신의 정체를 다시 묻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반박이 아니라 추방을 택한 교회, 이단이라는 제도적 폭력
마르시온(Marcion)은 교회의 이단 목록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인물이지만, 그가 어떤 근거로 이단이 되었는지는 단순한 교리 차이를 넘어서는 구조적 질문을 불러온다. 그는 단지 신의 본질에 대해 다른 해석을 시도했을 뿐이었다. 아직 정경(canon)도, 삼위일체 개념도 확립되지 않은 2세기의 교회는 다양한 신관(神觀)이 공존하던 시기였고, 교부라 불리는 인물들조차 신의 존재나 인격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시온은 독단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 안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체계적으로 신학적 입장을 정립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해석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급진적이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오히려 매우 정직한 반응이었다.
문제는 그의 해석이 교회의 다수 견해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교회는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가던 중이었고, 제우스(Zeus), 아폴론(Apollōn)과 같은 신들로 구성된 가족적 위계의 신 개념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아들, 성령으로 이어지는 삼위일체 개념의 심리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초기 교회는 이러한 위계 질서를 통해 신적 권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여기에 예수의 본성과 신적 위상에 대한 불확실성은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마르시온은 이러한 심리적 구조에 가장 뚜렷하게 반기를 든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 인격일 수 없다고 보았고, 예수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단순한 해석의 다양성이 아니라, 정체성의 근본적 전복으로 받아들여졌고, 교회는 이를 논박하기보다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정죄는 단지 그의 주장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교회가 그 주장을 감당할 구조와 여유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는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나 이레니우스(Irenaeus)와 같은 인물들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들도 삼위일체 개념이나 정경의 경계에 대해 치열한 해석을 시도했지만, 마르시온과 달리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았다. 그 차이는 사상의 내용보다, 그것이 언제 말해졌고, 누가 말했으며, 교회의 권력 구조와 얼마나 조화를 이루었는가에 있었다. 같은 해석도 ‘승리자’의 입에서 나오면 정통이 되고, ‘불편한 존재’의 입에서 나오면 이단이 된다. 정통과 이단은 교리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위치가 정해지는 이름이다.
그의 사상은 교리 체계로 수용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비논리적이었거나 신앙을 훼손하는 내용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윤리적 정합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 직관의 논리적 귀결로서 구약의 신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했다. 그는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말을 먼저 한 사람이었다. 정죄는 그의 오류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교회 조직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다수가 동의하지 않은 이론은 틀린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렇게 하나의 신학이 교리로 굳어졌다.
이단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토론이나 설득보다 추방과 삭제가 먼저 작동한 시대, 신학은 사유가 아니라 질서의 수단이 되었다. 이후 교회는 점차 정통의 기준을 확립하고, 공의회(Concilium)를 통해 교리적 경계를 구체화해 나가지만, 그 시작점에 마르시온의 추방이라는 선례가 자리한다. 그것은 사상적 오판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제도적 본능의 발현이었다.
마르시온은 자신이 틀렸다고 믿지 않았지만,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했다. 이 글은 그를 동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겪은 제도적 거부의 구조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마르시온은 단지 이단이 아니었다. 그는 초기 기독교가 자신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봉합하기 위해 처음으로 밀어낸 존재였다. 그를 통해 정통은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고, 교리는 사유의 결과라기보다, 권위와 안정의 이름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역사의 뒷면에 기록되었다.
정통과 이단은 함께 만들어진다.
정통(orthodoxia)은 흔히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제도적, 심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결과물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정통이란 말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고, 공의회(Concilium)도 열리지 않았으며, 경전(canon)도 정리되지 않은 불확정의 시기였다. 이때 마르시온(Marcion)이 등장했다. 그는 후대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실제로는 당대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눌러두고 있던 문제들을 드러내며 정통이라는 틀 자체가 만들어지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마르시온은 삼위일체 개념이나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복잡한 철학적 정리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성품과 일관성, 그리고 경전 내부의 윤리적 균열에 주목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복수, 전쟁, 멸절을 명령하는 존재이며, 반면 예수의 하나님은 자비, 용서,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로 나타났다. 마르시온은 이 두 신이 동일 인격일 수 없다고 판단했고, 이 판단은 해석이 아니라 윤리의 직관이었다. 그는 구약을 경전에서 제외하고, 바울(Paulus)의 서신 10편과 루가(Loukas)의 복음서를 편집한 ‘신약 정경’을 최초로 제시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이른 기독교 정경 목록이며, 지금 우리가 아는 정경 구도의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BeDuhn 2013; Hahneman 1992).
그러나 마르시온의 등장은 교회 내부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부분의 지역 교회들은 여전히 유대교 전통과 구약의 신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고, 다양한 신론과 기독론이 충돌하며 교리 체계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여기에 비정통이라 여겨지던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가 등장해 먼저 정경을 구성하고, 교회를 비판하며 독자적 공동체를 이끌자, 이는 신학적 반박 이전에 체제 내부의 위계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마르시온은 단지 불편한 해석자가 아니라, 제도화되지 않은 교회 내부에 외부의 기준을 먼저 제시한 인물이 되었고, 이는 교회가 마르시온을 ‘공공의 적’으로 설정하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그의 등장은 정통이라는 이름을 더욱 급하게 만들었다. 마르시온이 정한 정경 목록에 대응하기 위해 교회는 본격적으로 성서 정리를 시작했고, 이는 나중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 이르러 오늘날 신약 27권의 기본 틀이 등장하는 직접적 동인이 되었다 (Metzger 1987). 마르시온이 없었다면, 이 흐름은 그만큼 빨리 정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통을 해체한 자가 아니라, 정통이 자신을 구별하고 구성하게 만든 촉발자였다. 이단은 진리를 왜곡한 자가 아니라, 종종 정통이 자신을 더 선명히 하도록 만든 거울이다.
정통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수많은 배제의 역사 속에서 구성된 교집합이다.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는 신학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삼위일체와 신약 정경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교집합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누군가의 배제를 통해 공고해졌다. 마르시온은 그 교집합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그 교집합이 자신을 구축할 수 있도록 바깥을 만들어준 인물이다. 그는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시대보다 먼저 말했을 뿐이었다. 결국 마르시온은 교리를 바꾼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가 숨기고 있던 긴장과 불일치를 선명히 드러낸 자였고, 그로 인해 교회는 ‘무엇이 신의 말씀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급히 정해야 했다. 그는 기준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으로 선명히 가시화한 인물이었다.
존재 자체가 잘못된 사람들, 제노사이드와 윤리적 해석
마르시온(Marcion)이 구약을 거부한 핵심은 신이 폭력적이라는 단순 비난이 아니라, 윤리의 관점에서 그 신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정직한 감정의 결과였다. 그는 예수의 복음에서 전해진 하나님, 즉 자비롭고 보편적인 사랑을 베푸는 존재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껏 섬겨온 신이 과연 같은 인격일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의심했다. 이 의심의 중심에는 가나안, 아말렉, 미디안과 같은 민족들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구약의 명령들이 놓여 있었다. 신이 직접 내려준 이 명령들은 단순한 전쟁 지시가 아니라, 숨 쉬는 모든 존재를 제거하라는 말살의 선언이며, 그 대상은 단지 반항한 민족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제거되어야 할 ‘잘못된 존재’로 설정된 타자들이었다. 이 구조는 윤리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사랑의 존재라면, 죄를 지은 자에게조차 회개의 기회를 허락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구약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명령하며, 그것을 ‘의’로 포장한다. 이때 윤리는 무너지고, 신의 권능만이 남는다.
마르시온이 가장 강하게 충돌한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막 12:31)고 말하며, 그 이웃의 범위를 유대교 내부의 민족 단위를 넘어서 확장시켰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는 윤리의 경계를 넘어선 대표적 이야기이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마 5:44)은 종교적 정체성과 구분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급진적 윤리 선언이다. 예수에게 이웃은 신앙공동체 내부의 사람만이 아니라, 거리의 상처 입은 자, 타민족, 심지어 적대자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구약에서 말살 명령의 대상이 된 민족들은 결코 이웃이 될 수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회개의 여지도 주지 않으며, 단지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마르시온은 이러한 서사를 도저히 신의 계시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유대 전통의 체다카(צדקה, ṣĕḏāqāh) 개념을 통해 구조적으로도 드러난다. 체다카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서 공동체 내부에서 실현되는 ‘정의의 행위’이며, 그 대상은 신과 이웃으로 규정된다. 이때의 이웃은 계약공동체에 속한 자, 혹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식별 가능한 이방인’(ger)을 의미하며, 공동체 바깥의 적대자, 특히 가나안, 아말렉, 미디안 같은 민족은 윤리의 범주에서 처음부터 제외된 존재들이다(Berman 2008). 즉, 체다카는 인간에 대한 일반적 윤리가 아니라, 선민 중심의 윤리이며, 그것은 철저히 경계 짓기를 통해 작동한다. 예수의 윤리는 그 경계를 넘어서려 했고, 마르시온은 그 넘어서기를 신의 본질로 이해했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체다카의 경계 밖에 있는 자들을 멸절 대상으로 간주하며, 실천적 윤리에서조차 배제한다. 이는 단순한 구약-신약의 분위기 차이가 아니라, 윤리가 구조적으로 정의되는 방식의 전면적 충돌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마르시온 반박』(Adversus Marcionem)에서, 마르시온이 구약의 하나님을 감정적이며 질투심 많은 존재로 묘사했다고 전한다(Tertullian c. 207). 이는 당시 교회가 그를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르시온이 구약의 신을 윤리의 언어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현대 신학자 제이슨 베둔(Jason BeDuhn(은 마르시온이 신의 복수와 편애를 부정했던 이유는 그 윤리적 불일치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BeDuhn 2013). 마르시온은 단지 '신을 거부한 자'가 아니라, '이 신은 내가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는 폭력의 정당성을 허용하지 않는 윤리의 입장에서 신을 다시 보았고, 그 기준에서 구약의 하나님은 신의 이름을 가졌지만 신의 본질을 벗어난 존재였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말살 대상으로 삼는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경전 안에 있더라도 마르시온에게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윤리적 부정의 기록일 뿐이었다. 그는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닌, “이방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나님이라 부를 수 없었고, 그 판단은 윤리를 지키기 위한 사유의 출발이었다.
“사랑하지만 죽이겠다”는 말은 도덕이 아니다. 구약 신의 병리적 인격
구약의 하나님은 종종 “사랑”이라는 말을 전제로 삼으면서도, 그 행위는 멸절과 형벌, 복수와 파괴로 이어진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홍수로 전 세계를 덮으며,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태워 없애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며 모든 생명을 진멸하라고 명령한다. 이 모든 사건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제공되지만, 문제는 그 처벌의 방식이 무차별적이고 비가역적이라는 데 있다. 갓 태어난 아이, 경고를 듣지 못한 외국인, 부당한 권력 아래 놓인 이방인은 그 신의 분노 아래서 동일한 멸망의 대상이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그 모든 서사의 전제처럼 붙어 있으나, 그 안에서 인간은 조건 없이 보호받지 못한다.
엘리사(Elisha)의 곰 사건은 이 긴장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열하 2장 23–24절에 따르면, 선지자 엘리사는 베델로 가는 길에서 어린아이 무리에게 “대머리야 올라가라”는 조롱을 듣는다. 이에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숲에서 나온 암곰이 42명의 아이를 찢어 죽인다. 이는 교훈적 설화로 자주 해석되지만, 마르시온이 보기에 이건 도저히 윤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인격적 폭력의 표출이었다. 이 장면은 예수가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 저들과 같은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마 19:14). 예수는 아이를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사랑이 가장 먼저 도달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약은 아이를 벌의 대상, 혹은 도구로 사용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고,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이를 잃는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리고, 야곱은 어린 시절 내내 외면받는다. 아이는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신의 뜻을 드러내는 희생물이 되었다.
마르시온은 이런 장면들에서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일관되지 않고, 윤리적으로 무책임하며, 자비롭지도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가 신약의 예수를 만났을 때, 그 충격은 단순한 종교적 감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신의 형상에 대한 발견이었을 것이다.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은 없지만, 윤리적 전환의 강도는 그가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의 일부만을 정경으로 편집하려 했다는 결단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 특히 “원수를 사랑하라”, “심판하지 말라”, “용서하라”는 말들에서 구약의 신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윤리적 일관성과 감정적 안정성을 발견한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조건 없이 품는 것이지, 순종하지 않으면 파괴하는 명분이 아니다. 마르시온은 바로 이 기준에서 구약의 하나님을 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창조자로 규정한다.
그는 “사랑하니까 죽인다”는 말이 도덕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런 말은 인간의 윤리에서도 수용되지 않으며, 그 어떤 가해자도 법정에서 그런 변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해서 죽였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병리적 상태에 있는 존재로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이와 동일한 서사를 신의 이름으로 반복해왔다. 마르시온은 그것을 신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예수는 단지 사랑을 말한 자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신의 정의를 재정의한 존재였다. 아이, 여성, 병자, 이방인, 죄인 모두가 그 사랑의 범주 안에 있었고, 마르시온은 바로 그 사랑 안에서 진짜 신의 얼굴을 본 것이다. 이것이 그가 구약을 버리고 신약을 택한 이유였다. 그는 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거짓된 사랑을 신의 이름에서 제거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감정적 신, 병리적 신, 마르시온이 꿰뚫은 ‘신의 사랑’의 조건들
마르시온이 구약의 하나님을 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의 명령이 폭력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조건을 걸고, 불순종에 대해 파괴와 절멸로 응답하는 그 감정의 구조 자체가 병리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너는 내 백성이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백성이 언약을 어기면 전염병, 기근, 전쟁으로 벌을 내리며 때로는 도시 전체를 불태우기도 한다. 이런 구조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smothering, 즉 질식시키는 감정의 과잉과 통제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겉보기에 보호하고 아끼는 것 같지만, 그 감정은 상대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너를 사랑하니까, 내가 정한 선을 넘으면 너를 파괴하겠다’는 구조는 사랑이 아니라 통제 disguised as affection, 즉 애정으로 위장된 소유욕이다.
문제는 다수의 신자들이 이런 관계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구약의 하나님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그 신의 보호를 간구하며 충성을 맹세한 대중의 반응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의 전형적인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피해자가 오랜 시간 통제와 위협, 간헐적 보상 안에서 가해자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충성을 보이게 되는 심리적 적응 방식이다. 구약에서 신은 복종하면 은혜를, 불순종하면 죽음을 약속하며 끊임없이 인간을 시험하고 훈육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지우거나, 판단을 유예하거나, 폭력을 내면화하게 된다. 마르시온은 이 구조에 저항했다. 그는 신을 단지 “전능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감정의 구조가 윤리적 사랑인지 아닌지를 질문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때 마르시온이 떠올렸을 질문은 어쩌면 단순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사랑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인가?” 만약 한 인간이 “사랑해서 너를 죽이겠다”고 말하며 연인을 해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병리적 집착, 혹은 얀데레(yandere)적인 위협으로 간주한다. 이 단어는 ‘사랑에 미쳐 상대를 소유하려 하고, 거절당하거나 위협을 느끼면 상대를 파괴하려는 집착적 감정 상태’를 뜻하며, 통상적으로는 범죄나 스릴러 서사의 핵심 심리구조로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말한다. 그는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말하고, 자신의 백성이 딴 신을 섬기면 “가증한 짓을 했으므로 진멸하겠다”(신 13:12–17)고 선언한다. 이 구조는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집착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존재의 정서와 거의 동일하다.
이 병리적 감정 구조는 창세기 1장의 신학적 선언,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과도 기묘한 일치를 보인다. 흔히 이 구절은 인간이 신을 닮았다는 선언으로 읽히지만, 마르시온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히려 신이 인간의 감정 구조를 닮아있다고 느꼈을 수 있다. 그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질투하고, 감시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그 신의 인격에서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감정은 윤리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구원도 아니다. 마르시온은 그런 구조 안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진짜 신이 누구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윤리적 기준을 꺼내든 사람이었다. 사랑은 조건이 붙는 순간 사랑이 아니며, 그 사랑을 강요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마르시온은 신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분석하려 했다
마르시온은 흔히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그가 구약의 하나님을 배척하고, 신약의 하나님만을 진정한 신으로 고백한 선택은 단순한 거부나 파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신을 왜곡된 이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의 눈에 구약의 하나님은 질투하고 분노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조건을 내걸고 불순종에 대해 파괴로 응답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며, 원수조차 포용하는 완성된 존재로 등장한다. 마르시온은 이 둘이 동일한 존재일 수 없다고 느꼈다. 이는 전통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충절의 결정이었다.
그에게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을 보완하거나 재해석한 존재가 아니었다. 구약은 불완전한 윤리와 감정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체계였지만, 예수와 신약의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런 모자람이 없었다. 사랑은 보상이나 복종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지 않았고, 이미 완성된 상태로 세상에 주어졌다. 마르시온은 이 충격 앞에서, 지금껏 자신이 믿어온 신이 사실은 거짓 형상이었고, 진짜 신은 처음부터 저기 있었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어떤 역사적 점진성이나 계시의 발전이 아니라, 질적 전환을 보았던 것이다. 기존의 신은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감정에 반응했지만, 신약의 신은 시간 바깥에서 고요히 사랑하는 존재였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이 신이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신을 욕보인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신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윤리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교회는 이를 모독으로 읽었지만, 그는 신의 이름에 덧씌워진 수많은 폭력과 왜곡의 더께를 걷어내고, 그 안에 감춰진 사랑의 진실을 꺼내고자 했다. 그에게 신약의 하나님은 신을 새롭게 정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진짜 신을 만난 사건이었다.
현대 종교철학자 제이슨 베둔(Jason BeDuhn)은 마르시온을 “신의 윤리적 일관성을 지키고자 했던 윤리적 급진주의자”라고 평한다(BeDuhn 2013). 그는 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신이 진정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은 사람이었다. 그의 선택은 믿음의 파괴가 아니라 정화였고,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신의 이름을 다시 세우려는 기도였다. 결국 그가 한 말은 단순했다. “내가 사랑하는 신은 이런 분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때로는 가장 깊은 신앙의 형태다.
신을 말하는 자유, 그리고 다시 묻는 사람들, 정죄의 신학을 넘어서기 위해
신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그것은 인종, 언어, 지리,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심연의 질문이다. 신을 향한 이 끌림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니며, 어느 교리의 테두리 안에 가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 속 종교는 이 본능을 체계화하고 해석하며, 점차 소유하려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정통 교리는 단순한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누구의 해석이 받아들여졌고 누구의 해석이 배제되었는가에 따라 형성된 권력적 구조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교리는 ‘진리’의 목록이 아니라 ‘말할 수 있었던 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다.
현대에도 신학은 여전히 정죄라는 장치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 사유는 위험하게 된다.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존 힉(John Hick)이다. 힉은 모든 종교는 하나의 실재(the Real)에 대한 다양한 반응일 뿐이라며,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론을 부정했다. 그는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며,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통해서도 신과의 관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교리를 바꾸지도 않았고, 누구의 믿음을 박탈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는 여러 보수 교단에서 이단적 사유의 대명사처럼 간주되었다. 하지만 힉의 말은 정죄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신은 정말 특정한 형식으로만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그것을 절대화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의 사유는 기독교 내부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그 내부가 가진 폐쇄성을 시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힉만의 몫은 아니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신을 '존재의 근거'로 설명하며, 신에 대한 의심조차 신앙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신학이 종말론적 전망을 가져야 하며, 현재의 교리는 잠정적 형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신학은 공공의 장에서 대화할 수 있어야 하며, 교회 안의 자기 언어만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칼 라너(Karl Rahner)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명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이들의 사유는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신학이 닫힌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유한다.
종교와 신학은 도구일 뿐, 신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신을 향한 감정, 갈망, 사유는 모든 인간이 나눌 수 있는 공공의 재산이다. 신앙은 교리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런 말들이 있었기에 교리는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다. 지금 신학이 다시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의 보호가 아니라 질문의 개방이 먼저여야 한다. 현대의 마르시온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이제 교회가 스스로 지워버린 것이다. 과거에 교리를 정제시킨 것은 이단과의 충돌이었지만, 지금은 충돌 자체가 실종되어 있다. 신을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었고, 그 위험은 여전히 구조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묻는다. 신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누가, 누구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신학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유일한 문턱이다.
*. 추가로 찾아본 구약의 제노사이드 명령. 신이 살인한 경우. 마르시온의 눈에 비친 신의 사랑이 어떻게 현현(顯現)했는지 보여준다. 마르시온이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을 구분짓는 중요한 데이터.
절멸 당해야 하는 "네 이웃"과 사랑받지 못한 "원수"
민족/왕국 | 관련 성서 구절 | 명령 내용 요약 |
아말렉(Amalekites) | 사무엘상 15:3 |
남녀노소, 젖먹이, 가축까지 모두 죽이라 명령
|
미디안(Midianites) | 민수기 31:17–18 |
남자아이, 성인 여성 모두 죽이고 처녀만 남기라는 성별 구분 진멸
|
가나안 족속 전체 | 신명기 7:1–2 |
일곱 족속 포함 전체 민족을 모조리 없애고, 조약과 자비 모두 금지
|
헷(Hittites) | 신명기 7:1, 여호수아 3:10 |
가나안 7족속 중 하나, 모조리 없애야 할 대상
|
기르가스(Girgashites) | 신명기 7:1, 여호수아 24:11 |
동일하게 진멸 대상, 구체적 전투 서술은 드묾
|
아모리(Amorites) | 신명기 3:6–7 |
성읍 전체 인구를 진멸하고 가축만 노획
|
브리스(Perizzites) | 신명기 7:1, 여호수아 3:10 |
가나안 내 원주민 계열, 진멸 대상
|
히위(Hivites) | 신명기 7:1, 여호수아 11:19 |
진멸 대상이나 기브온 히위족은 속임수로 조약 체결, 살아남음
|
여브스(Jebusites) | 신명기 7:1, 여호수아 3:10 |
가나안 족속 중 하나, 예루살렘 거주, 진멸 명령 존재
|
바산 왕국(옥) | 신명기 3:6–7 |
남녀노소 모두 죽이고 가축만 약탈
|
헤스본 왕국(시혼) | 신명기 2:34–35 |
주민 전체 진멸, 가축만 노획
|
신이 직접 인간을 살해한 사건, 역시나 살해당안 "네 이웃", 용서받지 못한 "원수"
사건 | 성서 구절 | 인명 피해 (추정) | 비고 |
코라 일파 땅벌림 | 민수기 16:31–33 | 약 수백 명 |
지도자 포함 가족, 재산 통째로 삼켜짐
|
노아의 홍수 | 창세기 7:21–23 | 수백만 명 |
노아 가족 외 전 인류, 동물 포함 전멸
|
출애굽 장자 멸절 | 출애굽기 12:29 | 수만 명 추정 |
이집트 전역의 첫째 아들, 가축 포함
|
불뱀 사건 | 민수기 21:6 | 불특정 다수 |
불평한 자들 다수 물려 죽음
|
법궤 들여다본 자들 사망 | 사무엘상 6:19 | 70명 |
궤를 본 벧세메스 사람들
|
다윗 인구조사 후 역병 | 사무엘하 24:15 | 70,000명 |
3일간 역병으로 유다에서 사망
|
엘리사 곰 사건 | 열왕기하 2:23–24 | 42명 |
아이들이 조롱했다가 암곰에게 찢겨 죽음
|
삼손 기둥 붕괴 | 사사기 16:30 | 3,000명+ |
신의 힘을 받아 기둥 무너뜨림
|
금송아지 사건 | 출애굽기 32:28 | 3,000명 |
신 명령에 따라 동족 처형
|
나답과 아비후 | 레위기 10:1–2 | 2명 |
부정한 불로 분향하다 죽임
|
에리, 오난 | 창세기 38:7,10 | 2명 |
신 보시기에 악하여 죽임
|
베냐민 지파 내전 (신 승인) | 사사기 20:46 | 25,000명+ |
신의 지시에 따라 전투, 베냐민 지파 거의 전멸
|
웃사 궤 붙잡고 즉사 | 사무엘하 6:6–7 | 1명 |
법궤 넘어질까 붙잡았다가 사망
|
코라 사건 후 항의한 백성 역병 | 민수기 16:49 | 14,700명 |
코라 일파에 대한 징벌 후 항의자들에게 역병
|
사악한 존재에게 살해 당한 케이스
사건 | 성서 구절 | 인명 피해 (추정) | 비고 |
욥의 자녀 사망 | 욥기 1:18–19 | 10명 |
큰 바람으로 집이 무너져 자녀 7남 3녀 사망
|
악마니 악령이니 하는 존재가 살인한 케이스는 이게 전부.
신 vs 악마 / 악령의 웅장한 대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