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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라합은 의로운가? 민족 반역자인가?

by napigonae 2025. 5. 8.

 

기생 라합? 

   기생 라합(Rahab)은 구약 성경 여호수아기 2장에 등장한다. 소위 의로운 기생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인물의 직업은 일반적으로 זֹנָה(조나, zônāh)로 표현된다. 이 단어는 전통적으로 ‘창녀’, ‘매춘부’로 번역되어 왔으며, 성경 본문의 어휘 선택은 이 인물의 직업적 정체성을 특정 방식으로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상업적 성매매를 가리키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예가 구약 전반에 걸쳐 확인되며, 여호수아기 외에 창세기 38장, 열왕기상 3장 등에서 유사한 용법이 나타난다.

 

   이 어휘는 아람어로 옮겨질 때 동일한 어근에 기반한 ܙܘܢܬܐ(존타, zuntā)라는 명사로 번역되며, 역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의 의미로 쓰인다. 아람어 문헌에서도 이 단어는 명확히 윤리적 판단보다는 직업적 묘사에 가까운 용례들이 다수 존재한다. 초기 유대 문헌인 탈무드에서도 같은 어근을 사용하는 표현들이 있으며, 이는 문맥에 따라 성직과 분리된 사회적 역할로서 기능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헬라어 성경인 칠십인역(LXX)에서는 라합의 직업을 πόρνη(포르네, pornē)로 번역한다. 이 용어는 고전 및 헬레니즘 시기 문헌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대가성 성접촉을 하는 여성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서도 동일한 단어로 라합의 직업이 명시된다. 헬라어 사용권 내에서 라합의 직업이 문학적 또는 상징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현실적 직업에서 분류되었음을 보여준다.

 

https://shelleyjohnson.me/2023/06/25/women-of-hope-rahab/

 

여관 주인 라합?

   고고학 및 문헌학적 연구에서는 고대 근동 도시 안 성벽 근처에 위치한 거처가 대개 이방인에게 개방된 숙박 공간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다는 구절(수 2:15)은 이 공간이 주택이 아닌 외부 방문자가 접근 가능한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에블라(Ebla) 문서나 마리(Mari) 문서에서 확인되는 고대 서신에는 유사한 형태의 장소가 ‘음식 제공’, ‘숙박’, ‘중개 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 등장한다.

 

   라합이 정탐꾼을 맞이하고 숨겨주는 장면은 환대의 행위를 넘어서, 그 공간이 공적 접근이 가능한 장소였음을 전제로 한다. 이는 개인 주거 공간이 아닌 공공적 기능을 가진 건물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정탐꾼이 해당 장소로 직행했다는 점도 일반 주택보다는 방문객에게 널리 알려진 공간이었을 개연성을 높인다. 또한, 아람어 타르굼(Targum Jonathan)에서는 라합을 펜다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며, 이는 전통적으로 주점 혹은 객잔 운영자를 가리킨다.

 

   이 번역은 초기 유대 해석 전통 안에서도 라합을 성적 직업자 대신 영업 공간 운영자로 인식한 흔적을 보여준다.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pornē(창녀)를 사용하지만, 일부 필사본에서는 보다 중립적인 표현이 확인된다. 이 해석은 라합의 도덕적 평가를 변경하려는 목적과는 별개로, 본문 맥락과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의미 재구성에 해당한다. 객잔은 군사적 정보의 통로가 되기 쉬운 장소였으며, 정탐꾼의 활동이 그 안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은 라합이 단지 개인 거주자가 아닌 지역 정보가 흐르는 거점을 관리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James Tissot의 여리고의 창녀와 두 정탐꾼 https://en.wikipedia.org/wiki/Rahab

 

협상가 라합?

   여호수아기 2장에서 이스라엘의 정탐요원들은 여리고 성 내부로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해당 인물들을 ‘정탐꾼’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의 군사 조직 및 정보 수집 체계를 고려할 때, 이들은 졸개 정찰병이 아니라 고급 전략 정보를 직접 취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사용된 ragalim(수 2:1)은 일반적 정찰 행위자를 뜻하지만, 문맥상으로는 생존 보장, 가족 구출, 정보 제공이라는 교섭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정찰병이나 전령이 아니라, 사실상 고급 정보장교의 역할에 가깝다.

 

   이들이 선택한 최초 접촉 대상이 라합이었다는 점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도시에 처음 진입한 정보요원이 접촉하는 대상은 사전 탐문 또는 내부 정보에 의해 선별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외부 방문자가 접근하기 용이한 장소, 동시에 지역 권력에 접근 가능한 정보를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 라합이 그 장소와 인물에 아주 적절했다. 그녀의 거처는 성벽 위에 위치해 있었고, 이는 도시 경계선이자 감시와 정보 수집이 집중되는 구역이며, 군사적 접근성이 높은 지점이다.

 

   라합은 이들을 은닉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 전체에 대한 생존 보장을 전제로 명확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녀는 협상의 대가로 정찰 행위에 필수적인 은닉, 차단, 도주 경로 제공이라는 실질적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여리고는 폐쇄된 도시 체계를 가진 도시국가로, 성 내부에서 외부인에게 도피 경로를 제공하는 행위는 극단적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라합은 이 위험을 감수하며, 정보를 제공하고 도주까지 도와준 것이다.

 

   그 대가로 그녀는 단지 자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그 외 가족 전체의 생존을 요구했다. 협상의 범위가 개인적 의미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사회 구조에서 여성 개인이 가족 전체를 대변하여 이와 같은 거래를 성사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라합이 가족 내부에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 즉 실질적 가권이나 재산 운용 주체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협상의 주체가 될 수 있으려면 정탐꾼 역시 그녀를 정보 제공자이자 협력자로 여겼어야 한다.

 

협상 100% 성공률

합리적 배신인가?

   라합의 선택은 대의가 아닌 생존에 기반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했고, 여리고의 패망을 예측했다. 생존 가능성이 높은 쪽에 붙는 선택은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이 자동적으로 도덕적 옳음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역사적 사례에서 동일한 구조의 선택이 ‘매국’, ‘이적’, ‘배반’으로 정의돼왔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20세기 한반도에서도 유사한 정황이 있었다. 제국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고, 어떤 이는 나라 전체가 무너지리라 판단했다. 그러자 일부는 조선인의 생존을 위해 ‘이제라도 제국과 협력하자’고 했다. 이 논리는 바로 ‘친일’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가족과 공동체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그들의 선택은, 당시에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 판단은 민족적 반역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도출되는 질문은 명확하다. 왜 라합의 선택은 의로운 선택이, 친일은 정죄되는가. 이유는 단 하나, 결과다. 라합은 정복자 편에 섰고, 살아남았고, 승자의 기록 안에 포함됐다. 반면 친일은 패망한 식민지 체제 안에 속해 있었고, 광복 이후 새롭게 형성된 국가 체제에 의해 심판됐다. 도덕이 아니라 기록권력이 그들을 나눴다. 그렇다면 도덕은 어디에 있는가. 생존한 자의 선택이 언제부터 도덕이 되었는가.

 

   라합이 딱 한 번 그런 행동을 했다는 점을 들어 그녀의 책임을 줄이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한 번의 배신이든 세 번의 배신이든,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한 번 흘린 피와 세 번 흘린 피는 무게가 다르지만, 죽음이라는 성질은 같다. 배신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가 한 번 정보를 넘기고 도시가 함락되었다면,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역이다. 회수 가능성과 반복성은 책임의 범위를 결정하지만, 죄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또 다른 반론은 라합이 당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었다는 주장이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에서, 남성 중심의 정치 구조에서 밀려난 여성이 생존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며, 그것이 반드시 도덕적 비난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회는 구조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회가 가지는 구조적 불행이지만, 그 불행이 반역이라는 불의를 용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해서 개인의 이적행위가 자동으로 윤리적 행위가 되지는 않는다. 억압이나 불행은 행위를 설명할 수 있지만, 변명으로 쓰일 수 없다.

 

   이 논리가 허용된다면, 어떤 체제 내부의 소외계층도 국가 안보를 위협하거나 공동체를 해체해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체제 전복을 시도한 집단들이 항상 소외집단에서 출현했다는 점은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동으로 ‘의로운 자’로 바뀌지는 않는다. 저항과 배반은 구조가 아니라 맥락과 목표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 라합이 어떤 구조 속에서 살았든, 그녀의 행위는 공동체 내부를 무너뜨리는 결정을 스스로 내린 것이다. 만약 라합의 행위를 “살아남은 자의 지혜”로 포장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셔버려도 된다는 입장에 들어서게 된다. 공동체는 상호 책임과 신뢰 위에 세워지며, 위기 상황에서도 나 아닌 ‘우리’를 지키는 결속이 없으면 무너진다. 라합의 선택을 의롭다는 모든 논리는, 동시에 ‘이 나라가 무너져도 나는 산다’는 논리를 합법화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진다.

민족 반역자 vs 의로운 기생

항목 의로운 기생
민족 반역자
행위 여리고 정탐꾼을 숨기고 도와줌,
가족의 생존을 요구
여리고의 보안 파괴
외세에 협조
도시/민족에 대한 태도 창녀이자 소외계층
정당한 선택
공동체를 배신,
정복자에게 붙은 행위
동기의 해석 신의 뜻을 따르고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임
생존과 이익,
실리적 선택
역사적 평가 관점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믿음의 인물로 인정
공동체에 대한 이적행위
신학적 해석 관점 이방인 편입,
구원의 상징
배신과 결과 중심,
구속 서사에 편입
이야기에서의 위치 예수의 족보에 편입,
신앙의 모범
종교의 계획에 이용,
정치적 도구
도덕성 판단 가족 보호 이상의 구속 서사
공동체 기준으로 반역자

 

민족반역자 라합 보다는 창녀 라합이 적절해?

   하지만 성서은 라합을 배신자라 부르지 않는다. '의로운 기생'으로 부른다. 그녀의 이름을 신약성사 예수의 족보에 올리고, 이름을 명확히 적고,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라합의 행위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녀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라합을 ‘창녀’로 표현한 성서의 감추고 싶은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창녀’는 낮은 신분이었다. 법적인 보호도 없다시피하고, 종교 활동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중받지 못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가장 끝자락, 가장자리에 위치한 여성이었다. 라합은 그런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지점이 바로 전환의 출발점이다. 라합이 만약 유력자였다면, 즉 경제력도 있고 사회적 영향력도 가진 인물이었다면, 그녀의 행동,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살려달라고 했던 거래가 명백한 배신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가진 자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팔아넘겼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성경은 라합을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끌어내린다. ‘재력 있는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사회에서 밀려난 창녀’로 재구성한다. 이 재구성은 아주 전략적이고 치밀하다. 배신자 라합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버림받은 창녀 라합은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이미 보호하지 않은 존재가 자기 생존을 위해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 된다. 그렇게 평가의 방향이 달라져 버린다.

 

   이 흐름은 예수의 족보 구성에서도 이어진다. 예수는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존재로 묘사된다. 그가 선택한 길은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었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따라서 그의 조상중에는 ‘높은 자’도 있지만 ‘낮은 자’도 있어야만 했다. 라합이 '낮은 자'의 역할을 맡는다. 창녀였고, 이방인이었고, 남성 중심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없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존재는 예수가 어떤 사람들을 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라합은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족보에 들어간 것이다. 그녀가 구원의 이야기에 들어간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죄인으로, 낮은 자로, 약자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와 어울리는 구도가 되고, 이방인인 라합이 정통 유대인의 혈통에 적절하게 섞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흐름은 라합의 실제 행위를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포장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게 진행이 된다. 라합은 높은 자리에서 행동한 이기적인 배신자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생존을 택한 이해 가능한 인물로 다시 쓰여졌다. 바로 그 점이 예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이유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프레임, 다시 말해 해석의 틀이다. 라합이 누구였는가보다, 라합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해진다. 성경은 그녀의 삶 전체를 바꾸는 대신, 시선을 바꾸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래서 라합은 죄인임에도 받아들여졌고, 배신자임에도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이것은 단지 종교의 용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편집하고 선택하는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https://guidedbiblestudies.com/?p=2284

 

라합과 막달라 마리아; 같은 프레임, 다른 배신

막달라 마리아, 예수가 세운 사도, 교회가 지운 여자  포스트

 

막달라 마리아, 예수가 세운 사도, 교회가 지운 여자

예수와 함께 있었던 인물,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는 예수의 공생애와 죽음, 부활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단지 병을 고침 받은 여인이 아니며, 예수의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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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합은 배신을 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인 여리고를 떠났고, 그 도시의 안보를 외부 세력에게 넘겼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략적으로 행동했고, 명확한 대가를 요구했다.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생존까지 포함한 교환이었다. 성경은 이 행동을 비난하지 않는다. 칭찬하고, 그녀를 예수의 족보에까지 포함시킨다. 이 배신은 결과적으로 용서받았고, 심지어 의로운 행동으로 재해석되었다.

 

   반면, 막달라 마리아는 배신을 한 적이 없다. 성경 본문 어디에서도 그녀가 예수를 배반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정반대다. 다른 제자들이 도망치고 사라질 때, 그녀는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인물이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를 가장 먼저 목격했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린 첫 번째 증언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성서의 역사 속에서 배신당했다. 교회는 그녀를 ‘창녀’로 규정했고, 수많은 세기 동안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정작 성경은 그녀를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그녀를 침묵시켰고 지워버렸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같은 ‘창녀’라는 단어가, 라합에게는 구원의 출입증이 되고,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추방의 딱지가 된다. 라합은 실제로 배신을 했지만, 창녀라는 사회적 약자 프레임에 덧씌워져 용서받고 신앙의 주인공이 된다. 반면 막달라는 배신한 적이 없음에도, 창녀라는 프레임을 씌워져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라는 지위에서 끌어내려졌다. 같은 단어가 정치적 해석의 격랑 속에서 완전히 다른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다.

 

   이 차이는 개인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프레임을 짠 쪽이 누구인가, 그 프레임을 어디에 쓰려고 했는가에서 비롯된다. 라합의 이야기는 신앙의 경계가 확장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족보에는 의외의 인물도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면, 낮은 자가 필요했다. 창녀이자 이방인이었던 라합은 그 구도에 꼭 맞는 인물이었다. 배신이라는 불편한 진실은 ‘사회에서 밀려난 자의 생존’이라는 내러티브로 교체되었다. 그렇게 라합은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이유는 그녀가 너무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먼저 말한 인물은 그 자체로 신앙의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남성 중심의 권위 체계를 세워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증언은 불편했고, 그녀의 입은 닫혀야 했다. 창녀라는 낙인은 그렇게 쓰였다. 도덕적 타락의 이미지를 덧씌우면, 누구든 입을 다물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지워졌다. 말한 사람은 침묵당했고, 말하지 않은 사람은 대표자가 되었다.

불공평해

 

   7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는 설교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죄 많은 여자’(누가복음 7장)의 인물과 동일시했다. 원래 성경 본문에서는 이 두 인물이 분리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 들렸다가 나음을 입은 여인이고,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킨 제자이며, 부활의 첫 증언자다. 하지만 교황은 이 세 인물을 의도적으로 하나로 묶어버렸다. 이 설교는 이후 중세 교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막달라 마리아는 단지 ‘죄에서 용서받은 여인’이 아니라, 성적 타락의 대표 이미지로 박제되었다. 예수의 수제자였던 여성은 신앙의 상징에서 창녀로 전락했다. 교회의 권력은 그녀를 기억 속에서 지웠고, 낙인을 씌우는 방식으로 증언자라는 권위를 박탈시켰다.

 

막달라 마리아, 라합, 가롯 유다

항목 막달라 마리아 라합 가롯 유다
실제 배신 여부 없음 있음 있음
성경 내 역할 예수의 제자,
부활의 첫 증인
정탐꾼 협력자,
생존자
예수를 팔아넘긴 제자
직업 프레임 후대에 창녀로 오해됨 본문에서 창녀로 명시됨
본문에서 직접 묘사 없음
역사적 평판 변화 제자 → 창녀 →
복권 시도 중
배신자 → 믿음의 여인 →
족보 편입
제자 → 배신자 →
저주의 상징
도덕적 평가 불명확,
억울한 타락 이미지
실제 배신자,
용서와 칭송 대상
의도적 배신자,
회복 없는 정죄 대상
정치적 도구화 여성 제자의 권위 억제 약자 포용을 위한 상징
신의 계획,
희생양으로 해석되기도 함
권력에 의한 재구성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창녀 이미지 확립
신약 기자들이 족보,
신앙 서사에 편입
구원 내러티브의 반대 이미지

 

그래서..

   배신이라는 행위는 딱히 하나의 정의되기 어렵다.  배신이라는 행동은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해석되며, 어떤 목적을 가진 집단에 의해 재구성되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라합의 경우, 여리고 공동체에 대한 배신은 이스라엘 전승 안에서 신앙적 결단으로 재해석되었고, 예수의 족보에 포함되며 이방인 구원의 서사로 들어왔다. 반면 막달라 마리아는 실제로 배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 권위의 구조 속에서 여성 제자로서의 위치가 전통 교회의 위협으로 인식되며 창녀라는 낙인이 씌워졌다. 이와 달리 가롯 유다는 복음서에서 필연적 배신자로 등장하며, 도덕적 정죄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특정 인물의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가 포함된 이야기의 목적과 상황이 도덕적 평가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배신은 실체가 아니라 기능이며, 그 기능은 공동체의 기억이 요구하는 방식에 따라 충분히 변형된다. 특정 인물이 의로운 자로 남는가 혹은 배신자로 고정되는가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권력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역사적, 문화적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절대적 도덕성보다, 그것이 어떻게 기록되고, 어떤 방식으로 집단 기억 속에 정착되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배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갖는 상대성과 정치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배신은 언제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권위와 정치적 질서 안에서 기능한다.

 

 

이름 자체가 이방인의 상징?
‘라합(Rahab)’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넓다, 크다’를 뜻하는 rachav에서 유래했으며, 구약에서는 종종 ‘혼란’과 ‘바다 괴물’을 상징하는 단어로도 쓰였다(시편 87:4, 89:10). 이는 라합이 여성 인물을 넘어서 이방과 혼돈의 의미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라합이란 이름 자체가 유대 공동체 바깥의 세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라합의 편입은 개종 이야기만 담아내지 않음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선하다면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는가?
라합은 여리고 왕에게 정탐꾼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장면에서 거짓말로 그들을 숨긴다(여호수아 2:4–5). 성서은 이 거짓말을 죄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히브리서 11:31과 야고보서 2:25에서 믿음의 행위로 칭찬한다. 이는 구약의 윤리 기준이 행위의 선악보다, 공동체 생존과 신의 의도에 맞는지를 중시했다고 보는 중요한 부분이다.

 

라합은 유대교의 신을 제대로 알았을까?
라합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이다”(수 2:11)라고 고백했다. 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 것.  이는 두려움뿐만이 아닌, 이스라엘 신의 인식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정통 유대교 신에 대한 시각이라기 보다는, 당대 여신 숭배 전통 속에서도 혼합된 신 이해일 수 있다. 

 

미모의 화신?
정탐꾼들이 ‘바로 그 집’으로 갔다는 대목은 그녀가 여리고 안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존재였음을 시사한다. 탈무드는 라합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하나’였다고 전하며,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욕망이 일었다는 구절까지 있다 (Babylonian Talmud, Megillah 15a) 

 

높으신 분들과 접촉(?)이 많았던 라합
라합은 탈무드 문헌에 따르면 “세상 어떤 귀족도 그녀와 관계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묘사된다(Mek., Zeb. 116b).  라합이 당대의 고위층 인물들과 광범위한 관계망을 유지하며 정보의 요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