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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라운은 스파르타쿠스와 뭐가 다른가?

by napigonae 2025. 5. 22.

존 브라운(John Brown)의 생애는 나무위키 참고. 

https://namu.wiki/w/%EC%A1%B4%20%EB%B8%8C%EB%9D%BC%EC%9A%B4

 

존 브라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John_Brown_portrait%2C_18

namu.wiki

성서를 이용한 노예제 옹호의 시작

   성서를 악용하여 흑인 노예제를 옹호하는 주장은 다양하게 시도 되었다. 17-19세기, 특히 함(Ham)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받은 이야기(9:20-27)는 노예 제도를 증명하는 구절로 자주 써먹었다. 저주는 함이 아니라 막내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졌지만, 이후 함과 그의 모든 자손이 저주받았다고 뒤틀린 선입견을 일으킨다. 아프리카인이 함의 후손, ‘영원한 종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15세기  포르투갈 역사가 고메스 드 주라라(Gomes Eanes de Zurara)는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은 대홍수 이후 노아가 함에게 내린 저주 때문에’라고 썼다. 이 해석은 유럽인들에게 혹은 노예제를 예언 성취로 느끼게 하고, 흑인 노예들은 죄의 대가를 치른다며 자신들의 죄책감을 줄일 수 있게 만들었다.

 

   17세기까지 흑인 노예 당연사상은 유럽 전역에 퍼져 신대륙 원주민이나 아프리카 흑인들이 모두 함의 후손이며 저주받은 족속이라 여기게 만들었다. 1627년 영국의 성서학자 윔스(John Weemse)는 '함에게 노예가 되리라는 저주가 내려졌고, 그의 자손인 흑인들이 노예로 팔린다'고 기록했다. 당시 영국 지식층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 식민지 시기부터 남부연합 등장까지; ‘흑인 노예는 당연’ 주장들

   미국에서 특히 남부에서 ‘흑인 노예 당연’은 노예제 옹호를 위한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 17세기 식민지 시대부터 식민 개척자들도 흑인을 가나안의 후손으로 여기며 노예매매를 했다. 심지어 식민지 지도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동시에 다수의 흑인 노예들을 샀다. 18세기 말 노예제도에 부정적 의견이 나오긴 했지만, 매사추세츠의 판사 새핀(John Saffin) 는 ‘흑인 노예 당연’ 은 운명이라 주장했다. 1701년 노예제도 비판자 시월(Samuel Sewall)의 주장에 흑인은 가나안의 후예로  영원한 노예이자 신의 섭리라고 반박,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시월은 '성경에 흑인의 피부색이 저주의 표시 구절은 없다'고 받아 쳤지만, 당시 식민지의 경제적 시각은 성서적 반박보다는 ‘흑인 노예 당연’ 주장으로 기울고 있었다.

 

   19세기 미국 남부에서는  '성서적 노예제'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하나, 성서 여기 저기에서 노예제가 나타난다. 노예제는 '신의 제도'라는 주장. 둘, 가나안이 저주 받은 사건은 인류를 셈-함-야벳로 나누는 신의 섭리로 셈의 자손(아시아인)과 야벳의 자손(유럽인)은 번성하고 함의 자손은 노예가 되도록 신이 정했다. 셋, 함의 자손 아프리카 흑인들은 이 저주로 인해 피부색이 어둡고, 열등해졌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문명화시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선행이라는 주장. 미국 남부의 목회자들은 '흑인은 노예로 있을 때, 구원받을 기회'를 얻는다'며, 노예제를 반대하면 흑인의 영혼구원을 방해한다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남부 장로교 목회자 팔머(Benjamin M. Palmer)는 노아의 저주를 '백인-흑인-황인 인종의 운명 청사진'이라고 했고, 로스(Fred A. Ross) 목사도 인종 우월주의와 노예제를 옹호했다. 노예제를 반대했던 흑인 성직자 알렉산더 크러멜(Alexander Crummell)은  '기독교의 보편적 견해는 흑인 노예제도가 노아의 저주 때문' 이라는 사고 방식이 영향력과 파급력이 너무 강력하다고 비판했다. 루이지애나 가톨릭 주교 마틴(Auguste Marie Martin)은 남부의 분리를 지지하며 '노예제는 신의 뜻', ' 함의 자손들을 문명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 캘훈(John C. Calhoun)은 노예제를 '근본적 착한 제도'라면서, 흑인은 “백인 아래 있을 때 행복하고 문명화”된다고 주장했다. 부통력씩이나 지낸 스티븐스(Alexander H. Stephens)는 '흑인은 백인에 대한 속한다'고 말했다. 이런 인종  원리가 ' 새 정부의 주춧돌'이라고까지 말했다. '인종별로 각기 다른 위치에 있다'는 주장 속에는 ‘흑인 노예 당연'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판사 타니(Roger B. Taney)는 1857년 나쁜 의미로 유명한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에서 “백인은 흑인을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결, 흑인은 열등하고 종속적이라는 인식을 법적으로 못 박아 버렸다. 법학자 코브(Thomas R. R. Cobb)도 '노아 이후 흑인 노예제는 자연적' 이라며 편향적 성향을 보였다.

 

미국의 노예제 옹호

시기 및 인물 역사적 맥락 직책
위치
‘함의 저주’
사용 여부
노예제 정당화 논리 사회적 영향 층위
17c 새핀 식민지 시대,
노예제 도입 초기
판사 간접 흑인은 함의 후예,
천성적 노예
식민 지배층의 정당성 확보, 초기 노예제 유지 논리 강화
19c
리처드 퍼맨
덴마크 베시 반란,
남부 불안정기
침례교
목사
사용 노아의 저주 + 신약 인용,
신의 질서
종교계의 통제 강화,
노예 교육, 단속 명분 제공
19c
토른턴 스트링펠로우
폐지론 확대,
남부 방어 논리
침례교
목사
강조 함의 저주 = 신의 뜻,
노예제는 축복
일반 신자 및 노예주 설득,
종교적 근거 확보
19c
프레더릭 A. 로스
남북전쟁 전야,
분열 격화
장로교
목사
강조 함은 셈-야벳보다 열등,
인종 간 위계는 신의 섭리
이데올로기 강화
19c
알렉산더 스티븐스
남부연합 건국 전,
연방 분리
부통령 간접 흑인은 열등 존재,
종속은 자연적 상태
인종 불평등의 이념화,
제도적 인종차별 기반

유럽에서의 흑인 노예제에 대한 시각

영국

   영국에서도 역시 일찍이 성서를 기반으로 노예제 옹호를 하기 시작했다. 성공회 성직자 해리스(Raymund Harris)는 '신이 노예무역을 허락' 했다 주장했다. '이방인을 노예로 삼는 것은 종교의 원칙'이라 여겼다. 노예 출신이자 인권운동가 에쿠아노(Olaudah Equiano)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노예제 폐지(Abolition) 운동이 18세기 후반 크게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노예제 지지자들, 폐지론자들 모두 성서를 근거로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노예제 지지자들은 '성경 어디에 노예제를 죄라 했나?', “함의 저주는 흑인 지위의 예언'이라는 주장을, 맞은 편에서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마 7:12)'로 받아쳤다.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흑인 노예 당연' 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다. 인종 학자 프라차드(James Cowles Prichard) 는 '인류 단일 기원'”을 주장했다.

 

프랑스

   1685년 루이 14세의 '흑인법(Code Noir)'을 제정하면서 노예제를 공식화 했다. 이 법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노예제를 묵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성직자들 대다수는 노예제를 '신의 허락'으로 여겼고, 노예들에 대한 복음화를 강조하면서 노예들의 주인인 백인들의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피부색이 다르다고 노예로 삼을 수 있을까?'라며 노예제를 반대했고, 볼테르(Voltaire)는 아예 성서의 '함의 저주' 부분을 믿지 않았다.

 

   18세기 카리브 해 식민지 가톨릭 성직자들은 노예들에게 복종을 설교하면서, 노예들에게 '함이 저주받아 노예 운명으로 정해짐'이라 가르쳤다. 노예들에게 최고 덕목은 순종임을 주입 시키려 했던 것이다. 아이티 독립 후, 잠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나폴레옹이 다시 식민지 노예제를 부활시키면서 '노예의 통제'를 주장했다. 19세기 프랑스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노예제 폐지 바람이 불어 1848년 노예제를 다시 폐지했다.

   

   ‘함의 저주’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학자는 자연과학자 비레이(Julien-Joseph Virey)다. 그는 노예제의 기원을 밝히며, '흑인은 저주로 종속되어 왔다', '흑인의 조상은 함'이라고 주장했다. 카톨릭 사제 그레구아르(Abbé Henri Grégoire) 는 '가나안 저주를 흑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스페인

   인디오들의 학대를 비판했던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도 바야돌리드 논쟁 전 '원주민 대신 흑인을 노예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후에 카사스는 그 제안을 철회하고 노예제를 반대하였지만 당시 가톨릭인 사제들도 '흑인의 노예'에 거부감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가 세풀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는 남미 원주민을 '자연적 노예'로 여겼고, 정복과 노예화를 지지했만, 흑인 노예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교황 파울루스 3세는 1537년 칙서를 통해서 노예제도를 금지했지만, 흑인 노예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별 다른 영향력은 없었다. 콜롬비아 선교사 호세 구밀라(José Gumilla) 신부, 산타크루즈(F. de Santa Cruz) 주교는 흑인 노예가 노아의 저주로 개종이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쿠바의 가톨릭 성직자 후안 바우티스타 카사스(Juan Bautista Casas)는 '흑인에게 저항의 권리는 없다. 노아의 저주로 노예는 형벌로서 운명', '흑인들은 신의 은혜에 참여하지 않아 노예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고 방식의 영향으로 쿠바의 노예 해방, 독립은 늦어지게 된다.

https://www.adirondackalmanack.com/2019/01/that-so-called-adirondack-hall-of-fame.html

여전히 존 브라운은 본회퍼, 스파르타쿠스와 다른 테러리스트인가?

   존 브라운(John Brown),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스파르타쿠스(Spartacus)는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체제와 질서를 깨부수기 위해 맞서 싸웠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브라운에 대해 유난히 차별적이고 비판적 논조로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 설명들도 설득력도 타당성도 없다.

   

   이 세 인물의 공통점은 불의한 체제에 고개를 들고 맞서 싸웠고, 폭력을 앞세웠으며, 실패했지만 이후 윤리적, 정치적 요소들을 남겼다. 그 차이는 이들의 폭력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는 사회의 시선과 해석의 차이 때문이다. 본회퍼는 나치에 대항했과, 스파르타쿠스는 노예제에 저항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같은 행동, 같은 저항을 했지만 미국의 체제에 맞섰기 때문에 유독 저평가를 받는다. 그 뿐이다.

 

세 인물의 비교

항목 존 브라운 디트리히 본회퍼 스파르타쿠스
시대/배경 19세기 미국, 노예제 20세기 나치 독일 고대 로마 제국
저항 대상 노예제, 연방정부 나치 정권
로마 제국, 노예제
저항 방식 무장 봉기, 무기고 습격 히틀러 암살 공모
무장 반란, 전면전
동기 종교적 확신, 도덕 신학적 양심, 책임감 자유에 대한 갈망
결과 처형, 실패 처형, 실패 전사, 실패
역사적 평판 논쟁의 인물 도덕적 지성, 존경 계급 해방의 상징
평가의 조건 미국 내 인종 문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노예제도
후대 기억의 정치성 미국 내부 정치 갈등 나치=절대악으로 규정
없음

존 브라운의 일부 학계의 비판

존 브라운이 갈등을 키워 남북전쟁을 유발했다

    맥퍼슨(James M. McPherson), 포터(David M. Potter), 궬조(Allen C. Guelzo) 등의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한다. 미국 남북의 정치적 갈등이 다소 완화되는 상황에서 존 브라운의 하퍼스 페리 사건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남북전쟁이 앞당겨지고 대규모 살상이 벌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1차 대전의 원인을 사라예보 사건이라 단정짓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남북 전쟁의 원인을 단순화 시키고 존 브라운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인상을 준다.

 

   존 브라운도 미국 남북의 갈등 중 하나일 뿐이고, 일개 개인의 사건이 파장을 일으켰다고 해도 전쟁을 앞당길 정도의 상황이라면 존 브라운과 상관없이 전쟁은 벌어졌을 것이다. 도리어 이 주장은 존 브라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만 증명할 뿐이다. 스파르타쿠스도 왜 대화로 해결해보려 하지 않았을지 비판하는 것과 비슷하다.

 

목표가 정의로워도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니버(Reinhold Niebuhr), 프레드릭슨(George M. Fredrickson), 왈저(Michael Walzer) 등의 학자들의 견해다. 존 브라운이 실패하고 처형 당했기 때문에 생기는 주장이다. 만약 존 브라운이 성공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이끌었다면 그의 행위는 선구자, 예언자로 평가했을 것이다. 모든 윤리의 평가가 결과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전쟁도 실패했다면 이 윤리학자들은 정당성에 대해서 의심하고 흠집내기 바빴을 것이다.

 

   '폭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존 브라운의 입장에선 공허하게 들렸을 것이다. 어제, 오늘, 내일 여전히 주변의 흑인 노예들이 물건처럼 취급 당하고 죽어가는데, '최후의 수단'을 썼다고 비판하는 것은 1년 뒤에 남북전쟁을 일으킨 정치인들과 이익관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작전이 치밀하지 못했다

   오츠(Stephen B. Oates), 하위츠(Tony Horwitz) 등의 주장. 이 주장 역시 윤리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하다. 치밀하지 못해서 실패한게 아니라, 실패했기 때문에 치밀하지 못하다 평가 받는다. 역사상 모든 저항운동, 반란, 쿠테타는 실패할 경우 같은 평가를 받는다. 성공하면 작전의 치밀함 같은 것은 평가 하지 않는다. 치밀하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그 주장 그대로 실패해서 처형당한 본회퍼와 로마군에게 패퇴하여 죽은 스파르타쿠스에게도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치밀하지 못한 작전에 대한 비판은 사후약방문이고,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은 승자의 포지션임에도 비판 받을 부분이 있다. 하물며 실패한 존 브라운은 말 할 것도 없다. 프랑스 대혁명도 치밀한 작전으로 이루어졌을까? 그 의도와 과정 그리고 결과가 더 중요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본회퍼와 스파르타쿠스에게 적용했던 기준으로 존 브라운을 평가해야 옳을 것이다.

 

세 인물의 철학적 행위 비교

비교 항목 존 브라운 디트리히 본회퍼 스파르타쿠스
목표 노예제 폐지,
인종차별 체제 타파
히틀러 암살,
전체주의 저지
노예 해방,
로마 체제 저항
수단 무장 봉기, 연방 무기고 습격,
살해 포함
암살 계획,
비밀 결사 활동
군사 반란,
로마 군단과 전투
결과 실패, 체포 후 처형,
남북전쟁 도화선
실패, 체포 후 처형,
전후 윤리적 상징화
실패, 전사.
노예 해방 상징
공리주의
판단
성공 시 이익 극대화 정당화
실패 고통 강조
성공 시 전인류에 이익
실패시 고통
성공 시 노예  해방
실패 시 고통 극대화
칸트
윤리학
동기는 납득, 폭력은 보편화 불가
정언명령 위반
동기는 납득, 폭력은 보편화 불가
정언명령 위반
동기는 납득, 폭력은 보편화 불가
정언명령 위반
역사평가모순 테러리스트,
인종차별 철폐운동가
영웅,
실천적 목회자
노예 해방 운동
가장 정당한 전쟁으로 평가

https://experimentaltheology.blogspot.com/2021/12/on-john-brown-part-3-slave-revolts-and.html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나는 아모스다. 목사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고,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그냥 시골에서 밭 갈고 가축 돌보며 살던 농사꾼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썩었다. 그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말하러 나왔다. 도시는 더럽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 법은 힘 있는 자 편이고, 정의는 돈으로 거래된다. 사람은 숫자고, 노동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다. 말만 민주주의지, 실제로는 가진 자들끼리 짜고 치는 판이다.

 

   그리고 입으로는 신을 찬양한다며 예배당에서 노래하고, 기도하고, 헌금 바치지만, 그 입으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손으로는 약자를 짓밟는다. 누가 신을 모욕하는가? 그들이 예배당 안에서 부르는 노래가 나에겐 시끄러운 소음이고, 그들의 기도가 나에겐 위선이다. 나는 그런 예배를 거부한다. 누가 더 경건한지 따지기 전에, 누가 옆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지 보자. 가난한 사람, 외국인, 노인, 환자,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기도한다고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다. 불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정의를 흘려보내라. 흘러넘치게 만들어라. 공의를 잠깐 흘리고 마는 물방울이 아니라, 범람하는 강처럼 흐르게 만들어라. 억울한 자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게 하고,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게 하라. 너희가 쌓은 집과 재산은 사라진다. 너희의 사회, 질서, 체계는 무너진다. 불의 위에 세운 나라가 벌 받는 것은 원칙이다. 그 날이 오면 모두 침묵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이 거슬린다면 그래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세상이 썩었다.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썩은 냄새는 결국 다들 맡게 된다.

 

   이름을 아모스에서 존 브라운으로 바꾸면 딱 들어 맞는다. 아모스는 무서운 저주를, 존 브라운은 무서운 총을 들었을 뿐.